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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호및지난호

불교와의 깊은 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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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글|성경화 . 삽화|정동훈 작성일06-01-23 13:11 조회2,83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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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직 초심자인
44세의 주부다. 원래는 천주교 신자였지만 언제부터인가 불교에 많은
관심을 갖게 됐다. 직접적인 계기는 베란다를 통해 먼 산을 바라보는
습관이 생기면서부터다. 그 때마다 법복을 입은 내 모습이 베란다 유리를
통해 환영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또 만약 절에 나간다면 열심히 다닐
수 있을 것만 같은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막상 개종을 하겠다고 생각하니
그동안 성당에서 정들었던 대모님과 교우들 생각에 쉽게 결정할 수가
없었다. 집에 모셔놓은 성모상과 십자가 상도 눈앞에 아른거리고 천주님을
배신하는 것 같아 ‘아니다’라고 고개만 저으면서 개종을 차일피일
미루었다. 그리고 한동안은 성당과 절, 어느 곳에도 가지 않고 괜히
남편에게 바가지만 긁는 등 무의미한 생활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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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조를 제대로 못해서인지
그럭저럭 잘 되던 남편의 사업도 어려워져 친정 어머니께 손을 벌려야만
했다. 못난 딸 때문에 어머니께 못할 짓만 시키고 빚은 자꾸 늘어만
가는 지옥과 같은 생활이 계속됐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때의 내 모습은
인생을 포기한 것 같은 절망적인 상태였던 것 같다.


그러다 보니 남편과
나, 아이들 모두 생각이 다른 곳에 가 있는 정신적인 이산가족 상태로
지내며 하루하루를 불행하게 연명해 갔다. 한 가족이면서 생각은 저마다
따로 따로인 ‘따로국밥’ 이었다. 자꾸 상대를 원망하는 마음에 미움만
늘어나 탈출구의 하나로 남편에게 헤어지자고 하니 남편은 화를 내며
집을 나가버렸다. 남편이 없는 열흘 동안은 나에게 무척 긴 시간이었다.


친정어머니의 설득으로
가까스로 남편은 집으로 돌아왔고, 새롭게 삶을 시작하자는 의미에서
이사를 하게 되었다. 이사를 하면서 천주교의 모든 성물을 치웠다. 죄송스럽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나에게 닥친 현실이 너무 힘이 드니 마음 가는대로
하겠다고 결심하고 절에 갔다. 처음에는 어떻게 절을 하는지 조차 몰라
서성이다가 법당에서 절하는 사람들을 따라 108배를 하고 돌아왔다.
다른 사람이 나의 절하는 모습을 볼까봐 창피해 하며 무조건 숫자만
채우고 왔다.


그때까지 불교라고
하면 토속신앙 쯤으로만 알고 있던 나로서는 절에 갔다는 것 자체가
불교를 실질적으로 접하는 계기가 된 셈이다. 내가 절에 간 것을 안
광명심이란 법명을 가진 동생이 “언니, 정말 개종 잘 하셨어요.” 하면서
사찰 예절, 불교 교리서, 고승열전 등을 비롯한 불교관련 서적들을 가져다
주었다. 불교에 대해서 문외한이어서 천주교에는 교리책이 있는데 불교에는
왜 없을까 의아해 하며 모든 것을 궁금해 하던 때라 가져다 주는 책을
무조건 읽었다. 『고승열전』을 처음 읽었는데 방장스님이란 말이 있었다.
창피한 얘기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방장스님’이란 주방에서 제일 높으신
분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불교에 무지했던 나였다. 그러나 한 권, 두
권을 읽어가면서 조금씩 내 사고에도 변화가 왔다. 그 이후부터는 불교
서적들을 들고만 있어도 저절로 마음이 편안해졌다.


하지만 집안 형편은
좀처럼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남편은 하는 일이 잘 되지 않으니
업종을 바꾸기까지 했지만 여전히 힘이 들다보니 화를 내는 일이 많아,
남편이 집에 들어오면 식구들은 숨죽이고 남편 눈치만 보았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큰 딸 애는 학교 가는 것도 재미없어 했다. 또 작은 아들도
매일 오락실만 전전하며 허송세월을 보내는 것 같아 안타까웠다. 산다는
것 자체가 고통이었다. 마음을 잡기 위해 절에 가려고 했지만 남편은
남편대로 절에 다니면 나중에 지옥간다며 다니지 말라고 트집을 잡았다.
그러면 나는 지옥을 가도 내가 간다며 그냥 두라고 퉁명스럽게 반박했다.
이에 질세라 남편도 지옥 갈게 뻔한데 어떻게 가만히 지켜보고 있냐고
대꾸하면서 말다툼을 했다. 부모들이 이렇게 싸우니 가정이 화목할 리
없었다.


이렇게 고통스런 나날을
보내고 있는데 광명심이 남해 보리암을 가는데 같이 가자고 했다. 남편에게
절에 간다고 하니 그 날 따라 이상하게도 순순히 다녀오라고 허락했다.
모두 다 부처님의 가피라는 생각을 하며 기분좋게 집을 나섰다. 가는
동안 아름다운 풍경을 보면서도 마음속에는 근심 걱정이 들끓었다. 새파란
수평선의 넓은 바다를 보니까 아집으로 가득 차 원망하고 미워하는 마음만
가졌던 내 자신이 왠지 모르게 부끄러워졌다. 자책감도 들었다. 하지만
가정을 이렇게 불행하게 만든 남편이 한없이 미워졌다. 보리암에서 기도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광명심의 어머니 댁에 들렀다. 남편의
성격이 너무 괴팍스러워서 힘들어 못살겠다고 푸념을 늘어 놓으니까
어머니께서는 당신도 젊은 시절에 힘들고 어려울 때 부처님이 계셨기에
이겨나갈 수 있었다며 많은 조언을 해주셨다. 그러면서 나의 업장이
두터워 그러니 남편이 잘 때 남편을 향해 매일 108배를 하라고 했다.
그 분의 충고가 내 인생을 바꾸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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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암을 다녀온 다음
날부터 미운 남편을 향해 108배를 하기 시작했다. 낮에는 남편이 하는
조그만 제조 공장에 나가 함께 일하고, 밤에는 자는 남편을 앞에 두고
108배를 했다. 하지만 때가 여름인지라 더위와 피곤함 때문에 마음만
앞서 무척 고통스러웠다. 그래도 꾸준히 108배를 했다. 어느 날인가,
한번 잠들면 업어가도 모르는 남편이 자다 말고 눈을 떠서는 “왜 그러냐”
하면서 이상하게 쳐다봤다. 순간 당황했지만 당신 잘 되라고 한다니까
이제부터는 잘 할 테니 절하지 말라고 하면서 감격해 하는 눈치였다.
그 뒤부터는 점점 온순해지더니 나와 아이들을 잘 대해 주었다.


그러한 남편의 변화가
얼마나 감사한지 그때부터는 신바람이 나서 힘든 줄도 모르고 부처님께
절을 계속했다. 모두가 잠든 밤에 절을 하니 환희심이 저절로 생겼다.
아이들도 조금씩 안정을 되찾으면서 학교에 잘 적응하기 시작했다. 다시
예전처럼 화목한 가정이 되었다. 하지만 남편의 사업은 계속 내리막
길로 치달아 힘들게 운영하던 공장을 정리하고 남편은 해외 기술자로
나가게 되었다.


이 무렵 나는 광명심과
함께 남편의 건강을 발원하러 해인사 원당암을 찾았다. 이때까지만 해도
참선이 뭔지 화두가 뭔지 전혀 모르는 상태였다. 그런데 원당암에서
종정 스님을 친견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가슴이 벅차 올랐지만
엄숙한 분위기 탓에 감정을 억누르며 기쁨을 그저 속으로만 만끽했다.
큰스님께서는 “우리의 육체는 똥자루인데 가만히 놔두면 더 썩으니
흔들어서 밖으로 쏟아부어라”라는 법문을 해주셨다. 당시에는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몰랐지만 그래도 그 엄숙한 법문에 매료되어 신심이 솟아났다.
큰스님께 화두를 받아 참선을 시작했다. 처음 해보는 것이라 몸이 따라
주질 않았다. 결국은 자정을 넘기지 못하고 중도에 포기하고 말았다.
허리와 다리도 아프고 다른 신도들에게 방해가 되지 않기 위해 살그머니
법당을 빠져 나왔다.


다음 날은 해인사 일타
큰스님의 사리도 친견하고 스님들도 많이 뵈었다. 갑자기 10년 전 성당에
다닐 때 남동생들과 해인사에 다녀간 일이 생각났다. 그때 나는 대법당
바깥에서 법당 안쪽을 이리저리 쳐다보고 있었는데 동생이 법당에 들어가
절을 하라고 권했다. 천주교 신자인 내가 왜 절을 하느냐고 퉁명스럽게
대답하며 다시 법당 안을 살폈었는데, 스님들께서 법당 가득 빼곡이
앉아 ‘부모은중경’ 독송을 하는 모습이 너무도 숙연해 기억에 유난히
남았었다. 그때의 내 모습이 떠올라 참회의 삼배라도 올리고 싶었지만
그날은 기도 드리는 불자들이 많아 법당에 발조차 디디질 못했다. 10년
전 해인사 경내를 나올 때는 다시 오게 될 줄 몰랐는데 이렇게 불교신자가
되어 해인사를 참배하니, 이것이 바로 지중한 불가의 인연 법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항상 변함없이 곁에서
불교를 가르쳐 주는 광명심에게 한없이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광명심이
아니었다면 불교와 인연 맺기도, 또 마음의 평정을 찾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광명심은 지금도 부처님 법을 믿고 따르며 그것을 생활 속에서
충실히 실천하는 나의 영원한 도반이다. 해인사를 다녀온 뒤 하루는
아들 친구의 엄마가 신행학교 얘기를 하면서 같이 다니자고 했다. 그때
무엇인가 불빛이 번쩍하며 ‘아, 이런 것이 있었구나’하는 생각이 왔다.
부랴부랴 같이 가서 등록을 하고 함께 신행학교를 다녔다. 신행학교에서
공부를 하다 보니 그 동안 찬송가와 성가만 있는 줄 알았는데 부처님
말씀을 노래로 표현한 찬불가가 있다는 것을 처음 알고 신기했었다.
너무나 신기해서 집에 와서까지 그날 배운 산회가를 열 번 정도 부른
기억이 지금도 새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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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행학교에 다니면서는
정말 행복했다. 남편은 기도하는 내 모습이 아름답다고 격려해 주었고
나와 함께 『고승열전』을 읽으며 불교에 대한 여러 가지 얘기를 나누는
등 부부애도 돈독해져 갔다. 어느 날인가는 남편이 나에게 『금강경』
사경을 함께 해보자고 제안해 깜짝 놀란 적도 있다. 나보다도 불교에
대한 편견이 심했던 남편이 오히려 더 불심이 돈독해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남편은 변해갔다.


특히 내가 신행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일과 시작 전 『천수경』부터 틀어주는 등 열성적으로
나를 이해해 주고 도와줬다. 아이들도 어렸을 때 영세를 받았을 정도로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지만 독경 소리를 싫어하지 않고 잘 들어주었다.
하지만 신행학교는 집안일 때문에 꾸준히 다니지 못했다. 다라니 기도를
하시던 스님이 너무 열심히 하신 나머지 목이 잠겨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는 모습을 볼 때는 나도 모르게 숙연해져 열심히 다니리라고 결심했으면서도,
절 밖을 나서면 그 발심을 잊어버리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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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신행학교에서 목탁
치는 것을 배울 땐 왠지 모르게 신이 나서 어린애들처럼 좋아했다. 참선도
어려웠지만 하나씩 하나씩 자상한 가르침을 받고 터득해 갈 때의 행복감은
이루 말할 수 없다. 하나라도 더 가르쳐 주려고 애쓰시는 통도사 포교원
스님들께 항상 감사드린다.


지금 남편은 8개월째나
쉬고 있어 가정 생활이 어려운 상태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어떻게 융통이
되어 그럭저럭 생활을 꾸려 가고 있다. 옆에서 지켜보는 광명심은 나에게
재주가 좋다고 하지만 나는 이 모두가 부처님의 크나큰 가피라고 생각한다.
아마 예전 같으면 내 성질에 못 이겨 살도 빠지고 정신적으로 스트레스도
심할 텐데 오히려 체중이 늘어날 정도로 마음이 편안하다.


수능시험 백일 전 법회
때에는 딸아이랑 함께 절에 갔었다. 기도중 환희심이 북받쳐 올라 감격스런
눈물이 나도 모르게 흘러 내렸다. 옆의 사람이 볼까 창피해 얼른 손수건으로
얼굴을 훔쳤다.


통도사 포교원 주지
심산스님께서 수험생들 손을 일일이 잡고 격려 말씀과 함께 호신불 하나씩을
주셨는데 딸 아이가 제 차례가 되자 큰스님께 합장 반배 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가르쳐 주지도 않았는데 나보다 낫다 싶어 콧등이 시큰하면서
딸이 얼마나 대견스러웠는지 모른다. 이젠 남편 사업도, 큰 딸 시험도
조바심 내지 않고 노력한 만큼 잘될 거란 확신을 가지고 마음 편하게
기도하면서 때를 기다릴 정도로 여유가 생겼다. 예전에는 사업이 안되면
남편 원망부터 늘어 놓았지만 불교를 믿고부터는 오히려 남편은 얼마나
더 답답하고 애간장이 탈까 하며 남편의 마음이 먼저 헤아려진다.


또 어려움에 닥치면
이 모든 것이 전생에 지어 놓은 복덕이 없는 내 탓이구나 생각하니 크게
화낼 일도 남을 원망할 일도 없게 됐다. 대행스님 말씀에 ‘내가 있으므로
생기는 일이다 라고 생각하면 모든 것이 편안해진다’고 했는데 그 말이
실감이 난다. 딸아이 한테도 점수 나오는 대로 대학을 선택하자고 위로를
해 주니까 오히려 걱정하지 말라고 엄마를 위로해 준다. 크게 경제적으로
나아진 것은 없어도 아이들 건강하게 잘 자라주고 남편이 나를 이해하고
따라주니 나는 행복한 아내, 행복한 엄마라는 생각이 든다. 더 부지런히
정진하는 참회발원의 삶을 살기 위해 오늘도 나는 법당을 찾는다.


나무 석가모니불, 나무
석가모니불, 나무 시아본사 석가모니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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