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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호및지난호

신심명(信心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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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여 큰스님 작성일06-01-23 12:40 조회2,613회 댓글0건

본문


Investigation.27.jpg


31.
대도체관 무이무난


大道體寬
無易無難


32.
소견호의 전급전지


小見狐疑
轉急轉遲


33.
집지실도 필입사로


執之失度
必入邪路


34.
방지자연 체무거주


放支自然
體無去住


35.
임성합도 소요절뇌


任性合道
逍遙絶惱


36.
계념괴진 혼침불호


繫念乖眞
昏沈不好


37.
불호노신 하용소친


不好勞神
何用疏親


38.
욕취일승 물오육진


欲趣一乘
勿惡六塵


31. 大道體寬하여 無易無難이어늘


대도는 본체가 넓어


쉬움도 없고 어려움도
없거늘


‘도’라는 것은 우리의
마음을 두고 한 말입니다. 마음 밖에 도가 없으며, 마음이 곧 도입니다.


대도, 우리의 마음자리는
한없이 크고 넓어서 온갖 것을 다 포용하고 있습니다. 대도의 본체가
바탕이 넓다고 한 것은 무궁무진(無窮無盡)하고 무한무변(無限無邊)한
것을 의미합니다.


대도의 본체는 넓어서
쉬움도 없고 어려움도 없다고 한 것은 본래 원만구족하여 있으므로 조금도
어렵다거나 쉽다거나 하고 생각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대도란 마음자리는
넓고 커서 온갖 것을 다 수용하고 있어서 남고 모자람도 없고, 부처도
중생도 성인도 도둑도 그 어떤 것도 다 들어 있는 원만구족한 것이기
때문에 쉽다 어렵다는 말이 맞지 않습니다. 쉽다 어렵다는 말은 중생이
변견(邊見)으로 하는 말일 뿐입니다. 이는 본래 스스로 원만히 갖추어져
있는 대도를 모르고 하는 말이므로 이러한 쓸데없는 지견은 모두 버리라는
것입니다.


32. 小見으로
狐疑하여 轉急轉遲로다.


좁은
소견에 여우 같은 의심지어


서둘수록
더욱 더디어진다.


‘호의(狐疑)’는 마치
여우가 사람이나 큰 짐승을 의심하듯 작은 의심, 얄팍한 의심을 뜻합니다.
물속의 물고기가 물을 찾는 의심입니다. 조그마한 견해로 여우처럼 자주
의심하며 급하게 서둘면 서둘수록 더디어 진다는 것입니다.


대도는 본래 원만히
구족되어 있으므로 성취하려면 쉽다는 생각도 내지 말고, 어렵다는 생각도
내지 말며, 급하다는 생각도 내지 말고, 더디다는 생각도 내지 말아야
합니다. 쉽다, 어렵다, 급하다, 더디다 하는 등이 모두가 변견으로서
취사심(取捨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취사심을 버려야만 대도를 성취할
수 있습니다.


33. 執之하면
失度라 必入邪路요


집착하면
법도를 잃음이라.


반드시
삿된 길로 들어가고


대도에 나아가려면
집착하지 말아야 합니다. 집착하면 병이 되어 법도를 잃고 삿된 길로
빠지게 됩니다. 공부를 하되 끈질기고 고집스럽게 하고, 그렇게 하되
집착이 없이 해야 합니다. 누구든지 집착하는 병이 있으면 근본대도와는
어긋나서 반드시 삿된 길인 변견에 떨어지게 됩니다.


무서운 것이 집착입니다.
집착이 상(相)을 이루고, 상이 육도(六途)를 이루었습니다. 이 집착만
없으면 스스로 맑아져 가없는 본래면목이 훤칠히 들어날 것입니다.


34.放支自然이니
體無去住라.


놓아버리면
자연히 본래가 되어


본체는
가거나 머무름이 없도다.


대도의 본체자리는
가거나 머무름이 없어서 가도 가는 것이 아니고, 머물러도 머무름이
없으며, 범부나 성인의 구별이나 어묵동정(語默動靜)의 상대관념을 초월했음을
뜻합니다.


집착을 놓아버리면
자연히 본체에 계합하여, 본체는 가는 것도 머무는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대도는 원만구족하여 가고 머무는 것을 초월했기 때문에 집착하는 생각만
놓아버리면 자연히 대도를 성취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변견인 취사심을 버려야만 대도를 성취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35. 任性合道하여
逍遙絶惱하고


자성에
맡기면 도에 합하여


소요하여
번뇌가 끊기고


모든 집착을 놓아버리면
자기의 자성을 따라서 그대로 도에 합합니다. 내 마음은 본래 그 자체가
도라는 것입니다. 아무 생각도 없고, 생각없다는 것도 없이 떠나면 그
자리가 본래면목이요, 바로 부처자리입니다.


소요(逍遙)란 한가롭고
자재한 기상을 말하는데 아무 거리낌없이 소요자재한 방랑객같은 태도를
말합니다.


흥망성쇠(興亡盛衰)나
이언득실(利言得失)이나 팔풍(八風 : 이(利), 쇠(衰), 훼(毁), 예(譽),
칭(稱), 기(譏), 고(苦), 락(樂))에도 흔들리지 않고 생사에도 상관하지
않는 운수납자(雲水衲子) 같은 태도를 소요라 합니다.


이런 태도면 번뇌는
저절로 끊깁니다. 번뇌망상을 모두 쉬어 항상 당체의 진상이 들어난
채 자유자재하면 이것이 곧 정토낙(淨土樂)입니다. 이것을 세상 밖의
풍류라 하고 겁(劫) 밖의 세월이라 합니다.


36. 繫念하면
乖眞하여 昏沈이 不好니라.


생각에
얽매이면 참됨에 어긋나서


혼침함이
좋지 않느니라.


생각에 얽매이면, 즉
어떤 것에 집착하는 집착심을 가지면, 대도니 부처니 중도라는 생각에
얽매이면 진리에는 어긋납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진리에 계합하려면 부처라는 생각도, 진리라는 생각도, 대도라는 생각도
떠나야 합니다. 이런 생각이 조금이라도 남아있으면 근본에서 멀어지고
맙니다.이처럼 생각에 얽매이지 말라 해서 아무 생각도 없이 앉아만
있으면 되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라는 말입니다. 생각에 얽매이는 것도
병이고, 혼침해도 병이므로 이 모두를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덕산(德山)의 방망이도,
임제(臨濟)의 할(喝)도 이 얽매임에서 벗어나게 하는 수단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비야리성의 유마 거사의 묵연(默然)이 가장 친하다고 합니다.


37. 不好勞神커던
何用疏親가.


좋지
않으면 신기를 괴롭히거늘


어찌
성기고 친함을 쓸 건가.


좋지 않으면, 마음이
흔들려서 좋지 않으면, 신기(神氣)를 괴롭힌다는 것은, 마음이 번뇌롭게
된다는 것입니다. 고통의 바다에 빠지게 된다는 것입니다.그러니 어찌
성김과 친함을 쓸까 보냐 하는 것은 써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성김이란 멀리한다는
뜻이고, 친함이란 가까이 한다는 것입니다. 친하고 멀리함을 떠나서
양변, 즉 변견을 버리지 못하면 대도를 성취할 수 없습니다.


38. 欲趣一乘이어던
勿惡六塵하라.


일승으로
나아가고자 하거든


육진을
미워하지 말라.


일승(一乘)이란 지극한
도를 말합니다. 승(乘)이란 탄다는 말인데, 마음을 깨달아 운용하는
크기에 따라 삼승으로 나누는데, 성문, 연각, 보살을 일컫습니다. 이
삼승을 합하여 일불승(一佛乘) 또는 일승이라 합니다. 즉, 지극한 도,
무상대도를 말합니다.무상대도를 성취하려거든 객관의 대상인 육진(六塵)을
버리지도 미워하지도 말라는 것입니다.


육진이란 색(色), 성(聲),
향(香), 미(味), 촉(觸), 법(法)입니다.


‘색’이란 눈으로
볼 수 있는 모양과 색깔, ‘성’은 귀로 들을 수 있는 소리, ‘향’은
코로 맡을수 있는 냄새, ‘미’는 입으로 맛볼 수 있는 맛, ‘촉’은
몸에 닿아서 느낄 수 있는 촉감, ‘법’이란 우리가 마음으로 생각하는
이치입니다.


이 육진을 미워하지
말라는 것은 육진 이대로가 전체로 진여대용(眞如大用)이기 때문입니다.
미혹한 사람이 볼 때는 분명히 육진이지만, 깨친 사람이 볼 때는 진여대용의
육용(六用)입니다. 중생이 집착심을 가지면 육진이 되고, 눈 밝은 사람이
바로 쓰면 육용으로서 진여대용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육진을 버리고서
지극한 도를 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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