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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호및지난호

어떤 부업의 무한공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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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글:정찬연- 작성일06-01-21 18:01 조회3,43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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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아미타불 10만
8천 번 사불(寫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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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풀리지 않는 화두를
동산불교대학에서 받은 지 2년, 한 봇짐이나 되는 분량과 10만 8천이라는
그 엄청난 숫자에 압도되어 처음부터 바쁘다는 핑계로 포기한 채 졸업을
코앞에 두게 되었습니다. 도반들은 거의 마무리 카운트다운 단계에 도달한
것 같았고 그런 도반들 보기가 민망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기발한(?)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아내에게 S.O.S.를 보냈습니다. 공짜로는 어림도
없고 한 번 사불에 10원씩은 줘야 해보겠노라는 아내의 반응에 즉석에서
계약을 하고 다음날부터 사불에 들어가기로 하였습니다. 시작을 잘하면
체면치레 정도의 분량은 사불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나의 이런 예상은 다음 날부터 빗나가기 시작하였습니다.


첫 날 아내는 1,000번을
넘게 사불하였습니다. 첫 날이니까 그럴 수도 있겠다고 넘겼지만 다음
날도 1,000번을 넘어섰고 그 다음 날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사정이 이러하니
심각한 문제에 직면했습니다. 이런 추세로 지불하다가는 나의 비자금으로는
한 달 견디기도 힘들 것이 분명하였습니다. 그렇다고 적당히 하라고
말릴 처지는 더욱 아니었습니다. 방법은 단 한 가지였습니다. 아내가
써야 할 분량을 줄이는 길뿐이었습니다.


첫 날, 둘째 날 부진했던
나는 셋째 날 1,500번을 사불하였습니다. 손가락 사이에 물집이 생겨
고통스러웠지만 알 수 없는 오기와 신심이 생겼습니다. 그 날부터 나는
아내와 경쟁이라도 하듯이 직장의 근무시간과 잠자는 시간 외에는 오로지
나무아미타불만 찾았습니다. 손가락 사이엔 어느새 굳은 살이 박히고
몇 백 번 사불하고 나면 시간의 흐름을 몇 십 초 오차 내로 정확하게
집어 낼 정도가 되었습니다. 아내 역시 조금도 뒤지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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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주가 지난 뒤에는
열심히 하면 10만 8천 번 사불도 가능하리라는 욕심이 생겼습니다. 비자금은
이미 바닥이 났고 내 용돈까지 투자해도 모자라 급기야 후불로 하기로
재약정하니 아내에게 진 빚은 점점 늘어갔습니다. 그런 아내가 밉살스럽기까지
하였습니다. 꿈 속에서조차 나무아미타불 사불한 원고를 잃어버려 밤새
찾느라 고생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무엇엔가 쫓기듯 그렇게
한 달 보름 만에 10만 8천 번의 마침표를 찍을 수 있었습니다.


아내에게 나의 모든
비자금을 털어가며 이 일을 부탁한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아내는
불교신자가 아닙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가까운 친족 중 불교신자는
나 하나뿐이라고 해야 정확한 표현입니다.


나는 정말 금생에는
불교와의 인연의 끈이 전혀 없었습니다. 부모님이 교회에서 결혼하셨고
신앙생활을 하셨으니 나의 모태 신앙은 기독교입니다. 셋째 작은 아버지,
둘째 작은 아버지의 아들인 사촌동생, 처가 쪽으로 큰 동서가 목사입니다.
둘째 작은 아버지께서는 장로이시고, 형수도 목회는 않고 계시지만 신학을
공부하셨습니다.


그러나 나는 내 스스로
불법과의 인연을 숙세의 인연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나는 군입대 전까지
육식을 못하였습니다. 냄새가 역겨워 곁에서 식사조차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향연(香煙)은 너무 좋아 지금도 집안의 방향제로 대용할 정도입니다.
남보다 특별히 건강한건 아니지만 절하는 데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습니다. 철없던 시절부터 먹물옷 입은 스님의 모습이 그렇게
좋았습니다. 처음 불법과 인연도 내 스스로 찾아가서 시작한 대불련
활동입니다. 그리고 불교 군종병으로, 또한 직장생활에서도 2개의 직장
불교 신행단체의 창립 멤버로 활동하였습니다.


나는 부처님의 극성팬임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개인적 신행생활에 있어서도 나는 십년 넘게 1년에
1안거 기간만이라도 날마다 1시간씩 참선의 생활화를 하려고 무척이나
노력하였으나 하근기라서 그런지 석 달을 채운 적이 없었습니다.


문제는 지계였습니다.
몇 달 동안 계를 지킨다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매년 실패하고
몇 년 전부터 방법을 바꾸어 기간을 줄이고 강도를 높여 매년 연초가
되면 직장생활과 1일 8시간의 수행을 병행하기 위해 새벽 3시면 어김없이
일어나 참회와 지계 그리고 선정의 3대 목표를 세우고 삼칠일을 용맹정진합니다.
1년간 사용할 밧데리를 충전하는 셈입니다. 내가 직장불교 신행단체의
회원들에게 늘 강조하는 게 있다면 그것은 바로 불법의 근본이 기복에
있지 않다면 재가, 출가를 가리지 말고 수행에 임하여야 할 것을 강조합니다.
수행과 지계는 출가자의 전유물이라는 재가자의 관념이 바뀌지 않는다면
한국 불교의 발전 또한 요원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녀 교육 방법에 있어서도
학생 체벌이 여론화된 적이 있습니다만 저희 집에서는 폭력적인 방법을
지양하고 잘못의 경중에 따라 108배, 1080배 혹은 1주일, 열흘간 108배
등 다양한 메뉴가 준비되어 절과 참회문을 함께 쓰게 하여 반드시 자기의
잘못을 참회토록 합니다. 절은 운동도 되고 체벌의 효과와 정서의 순화도
되니 그야말로 일석삼조인 셈입니다.


또 한 가지는 근검
절약의 실천과 환경보호입니다. 저희집 뒤주 위엔 묘하게 생긴 통이
하나 있는데 ‘福田函(복전함)’이라는 딱지가 붙어 있습니다. 가족이
날마다 절약한 액수의 돈을 복전함에 넣습니다. 애들 몫은 특별한 일이
없으면 큰 놈 몫은 제가 그리고 작은 놈 몫은 아내가 대신 넣어줍니다.
몇 년을 하루도 거른 적이 없습니다. 혹 잊고 넣지 않으면 애들이 더
난리입니다. 그렇게 모은 돈은 1년에 한두 번 가족이 모두 복지시설을
찾아 회향의 자리를 마련하곤 합니다.


또한 나는 우리가 날마다
가장 가까이서 접하게 되는 음식물 쓰레기 문제에 대하여 애들과 아내와
함께 많은 대화를 합니다. 최고의 방생은 일체중생의 보금자리인 자연환경의
보호입니다. 흘리고 버리고 남기는 무절제한 생활습관이 우리의 마음을
병들게 하고 우리의 보금자리를 병들게 합니다. 바른 식사 예절과 감사하는
마음이 음식물 쓰레기 문제 해결의 지름길입니다. 아내와 아이들의 협조로
우리집 음식물 쓰레기의 양은 다른 집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라 자부합니다.


사정이 이러하니 시댁
식구들과 남편의 중간자인 아내의 입장에서 보면 시댁 어른들 눈치보랴
남편 눈치보랴 여간 난처한 것이 아닙니다. 물론 저도 아내의 입장을
이해하고 집안의 대소 행사 의례 때 남들 눈에 나지 않도록 기도할 때
기도하고 구태여 예배 시간을 피하고 하는 일은 없습니다. 일가 친척이
모두 모이는 자리에서는 그에 충실히 따르고 우리 가족만의 생활에는
불교 중심의 원칙을 정하고 있습니다.


나는 결혼 15년 가까이
되지만 한 번도 아내를 교화하고자 노력한 적이 없었습니다. 본인의
뜻을 존중하여 주었습니다. 아내는 결혼 후 교회는 나가지 않지만 그렇다고
개종한 것도 아닌 어정쩡한 상태입니다. 그런 아내이기에 나는 처음
나무아미타불 사불을 제안할 때에도 그렇게 큰 기대는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10만 8천 번
사불을 단기간에 끝내고 보니 그 감회가 새로웠습니다. 날마다 날아갈
듯 몸이 가볍고 기분이 그렇게 좋을 수 없었습니다. 쌀독에서 인심이
난다 하던가요. 마음에 여유가 생겼습니다. 짜증나고 싫증나는 그런
마음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내가 변하면 세계가 변한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회향한 지 며칠 후의 일입니다. 나는 이 인연
공덕으로 엄청난 불보살님의 가피를 입었습니다.


몇 해 전 여름 수도권
일대의 물난리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7월 말 지리산 일대를 휩쓸고 지나간
일명 게릴라성 장마는 끝나는 듯 하더니 8월 초 다시 수도권에 상륙하여
연일 일간 최고의 강우량 신기록이 갱신되고 TV로 생중계 되던 이곳
저곳의 피해상황은 자연 앞에 인간의 존재가 얼마나 보잘 것 없는 존재인가를
실감케 한 재난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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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장마가 막 시작되던
1998년 8월 4일 오전 7시 10분쯤 장대비가 온 세상을 휩쓸고 갈 기세로
맹렬하게 쏟아 붓고 있는 가운데 나는 한강을 끼고 달리는 경원선 한남역을
지나 옥수역을 향해 전동열차를 운전하고 있었습니다.


운전하며 집중력이
떨어질 때나, 반대로 긴장을 풀려고 할 때나 이제는 습관이 되어 버린
신묘장구 대다라니를 웅얼거리며 운전하던 중, 약 200m 전방 좌측 옹벽에서
붉은 황토물이 마치 거대한 짐승의 혀가 먹이감을 향해 날름거리는 듯하더니
수십 톤의 토사가 상하 양방향의 철로를 덮쳤습니다. 동시에 나는 비상제동을
체결하였습니다. 모든 게 한 순간의 일이었습니다. 마치 지옥으로 빨려드는
느낌이었습니다.


바로 둑 밑에는 불어난
한강물이 벌겋게 상기되어 단숨에 삼켜 버릴 듯 넘실거리고 앞에는 수십
톤의 토사가 태산처럼 턱 버티고 있었으니 수장(水葬)이든 토장(土葬)이든
면할 길이 없을 것 같았습니다. 설상가상, 뒤에는 러시아워가 막 시작되는
시간이라 천여 명의 승객이 승차하고 있었고 옥수역을 지나 반대선에는
상행 전동열차가 달려올 시간이 되었습니다. 짧은 순간 스쳐가는 여러
얼굴들, 여러 상념들, 결코 짧기만한 시간은 아니었습니다.


어느 때인가 추락하는
항공기 안에서 어느 일본인은 그 짧은 시간에 몇 마디의 유서를 남겼다는
보도를 접한 적이 있었는데 나는 ‘관세음보살’ 단 한마디뿐 그 이상의
어떠한 행위도 할 수 없었습니다. 다행히 열차는 약 180m를 진행하여
장애지점 약 20m 전방에서 기적적으로 멈추었고 나는 무전기로 상행열차에
연락은 물론 필요한 안전조치를 취할 수 있었습니다.


기초적인 물리 실력으로
어림잡아도 옹벽이 단 2초만 늦게 무너져 내렸거나, 무너지는 것을 2초만
늦게 발견하였더라면 생각하기도 싫지만 나의 목숨은 물론 천여 명의
고귀한 인명은 누구도 보장하지 못했으리라 생각됩니다. 그 2초의 시간이
나에게는 지옥과 극락을 왕복하게 한 셈입니다. 다행히 신속한 조치로
아무 피해가 없어 다음날 일간지들엔 폭우로 인하여 경원선 한남-옥수역
간 토사가 무너져 내려 12시간 동안 열차가 불통되었다는 사고 기사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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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이 지난 지금도
그 현장은 당시의 상흔이 아물지 않은 채 복구의 흔적이 역력히 남아
있어 그곳을 지날 적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을 염하곤 합니다.
나는 그 사건 후 아내에게 말했습니다.


“당신 정말 비싼 부업했소,
나무아미타불 10만 8천 번 사불에 남편 구하고 천여 명의 인명을 구했으니,
불보살님의 가피가 아니라면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겠소?” 아내도 그때의
부업 대가로 받을 미수금을 아직까지 받으려 보채지 않는 것을 보면
크게 이윤 남는 부업을 한 것을 인정하나 봅니다. 정기법회 때는 거의
참석치 않고 사찰순례 법회 때마다 법당 밖에서 혼자 서성이던 아내가
요즈음은 그래도 법당에 들어와 법회에 참석하는 모습이 고맙기만 합니다.
나는 척박한 조건이지만 아내의 불심 성장을 굳게 믿습니다.


수행자가 계율을 지키듯
나는 정해진 궤도 위를 신호 현시조건에 따라 달리는 열차의 기관사입니다.
오늘도 객실 가득 중생계의 애환을 싣고 나의 ‘바라밀 특급’ 열차는
안심입명처(安心立命處)를 향하여 힘차게 달리고 있습니다.


나무 마하반야바라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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