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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호및지난호

부처님 가피 온몸에 감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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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글|이귀인·삽화|정동훈 작성일06-01-23 11:56 조회4,33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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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불로 팔뚝을 태우는
연비의식에서 지난날 죄업을 참회하며 이젠 베푸는 삶을 살것을 다짐했다


47세의 직장인으로서,
1남 1녀의 자녀를 둔 평범한 가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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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집안에 태어나
어려서 어머니 손을 잡고 사찰을 찾아갔던 기억이 새롭다. 어머니께서는
불공드릴 날이 정해지면 육류나 비린 음식은 상에 올리지 않으셨고 불공날은
새벽 일찍 깨끗한 나들이옷에 흰 고무신 차림으로 공양드릴 쌀자루를
소중히 머리에 이고 절에 가시곤 하였으며, 그러한 공덕 인연으로 우리
육남매는 모두 착하고 건강하게 자랐다.


삶의 큰 굴곡없이 청년기를
보내고 군대를 제대한 후 공무원에 복직하고 6년동안 교제해온 아내와
1978년 봄 결혼했다.처 외할머니는 장모님을 낳은 후 출가하여 조그만
사찰을 창건하고 주지로 계셨으니 불교와의 인연은 겹겹으로 깊은 셈이다.


결혼 전보다 절을 찾는
횟수가 잦아지게 되었고 이때마다 부처님께 “잘 살게 해 주십시오.
아이들 건강히 자라게 해 주십시오. 복많이 주십시오” 하며 내 욕심채우기
위해 기복신앙으로 빠져들었다.


주지스님(처 외할머니)의
배경만 믿고 그 절에서 감투라도 쓴 양 거들먹거릴 때마다 얼마나 다른
불자들이 눈총을 주었을까를 생각하면 그분들께 죄송스럽기만 하다.
오만과 무지가 얼마나 무서운 독인지 뼈저리게 느끼며 그때를 참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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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이 성장함에
따라 1988년, 고향에서의 공무원 생활을 청산하고 서울로 이사했다.
일반회사에 근무하며 낚시에 재미를 붙여 토요일 오후는 으례 낚시가방을
챙겨 밤샘을 하고 일요일 늦게야 집으로 돌아오는 생활이 계속되었다.
물고기로 회를 뜨거나 매운탕을 끓여먹으며 차츰 도시생활과 낚시가
인생의 전부인 양 보냈다.


솔직히 이때는 물고기의
목숨을 앗는 행위가 종교적으로 살생이다 죄업이다 하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았다. 어느해 초여름, 새벽잠을 깨어 밖을 보니 보슬비가 내리며
안개가 짙게 드리워 몇미터 앞도 분간하기 어려운 날씨였다. ‘이런
날 낚시를 하면 입질도 잘하고 고기도 많이 잡힐 텐데...’하는 생각이
떠오름과 동시에 출근하기가 싫어졌다.


‘그래, 낚시를 가자.
평일이니까 사람도 별로 없겠지. 지난주에 어떤 사람이 메기를 많이
잡던데 나도 메기를 잡자. 몸이 아프다고 거짓말 하고 하루만 결근하자.’
이렇게 결심하니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후다닥 낚시가방을 챙기고 아내에게
“이따 8시쯤 회사에 전화해서 밤새도록 앓다가 지금 잠들었는데 회사
못갈 것 같다고 해요. 그리고 나중에 전화오면 병원에 갔다고 하구료.”하자
아내가 펄쩍 뛰며 “난 그런 거짓말 못하니까 당신이 전화하든지 알아서
해요. 회사를 속이면서까지 낚시를 가는 사람이 정신 멀쩡한 사람이예요?”하고
쏘아붙였다.


비내리는 새벽길을
자동차 헤드라이트로 가르며 신당동 중앙시장에서 메기낚시 미끼로 최고라는
닭간을 챙겨 포천에 도착하니 어둠이 채 가시지 않았다. 평일에 더구나
비오는 저수지에 혼자 있으니 기분이 상쾌했다. 두칸반대와 세칸대 등
두대의 낚시대를 들이우자마자 입질이 왔다. 굉장한 놈들이었다.


순식간에 찬넬메기
5마리를 낚았다. 오전 10시경 입질이 뜸해졌다. 그런데 저만치서 할아버지
한분이 열 너댓살 정도의 남자아이와 함게 우산을 받쳐들고 이쪽으로
걸어오면서 “재미 좀 봤수? 구경 좀 합시다. 손자가 낚시터엔 처음이라...”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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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와 손자가
함께 끌어올린 살림망에서 메기가 물방울을 튕기며 모습을 드러내자
할아버지는 눈이 휘둥그레지며 “이건 메기같은데 이렇게 큰 메기는
난생 처음보네. 너도 자세히 봐라”하며 손자에게 내밀었다. 나는 “그건
찬넬 메기라고 합니다. 얼마나 힘이 센지 손맛이 그만이랍니다. 메기는
닭간을 좋아해요.


거기 닭간이 많이 있으니
쓸만큼 가져가세요.” 그들은 고맙다며 20m 정도의 거리를 두고 자리를
잡았다. 약 한 시간 가량 낚시찌는 움직일 줄 몰랐다. 아이가 따분했던지
이쪽으로 와서는 “아저씨, 한번 더 보여주세요”하며 물속에 잠겨있는
살림망의 끈을 잡아올리니 힘없이 쭈욱 딸려 나오는데 메기가 한마리도
없었다.


아까 구경한다고 무리하게
들다가 밑아구리의 끈이 풀려서 사람도 빠져나갈 정도의 구멍이 나 있었던
것이다. 나는 망치로 얻어맞은 사람모양 얼굴이 벌겋게 상기되며 화가
났다. 할아버지가 미웠다. 그 노인은 사태를 알아차리고는 단숨에 달려와
“젊은 양반, 정말 미안하게 됐소. 우리가 억지로 끌어올리지만 않았어도
이런 일이 없었을 텐데...” 안절부절을 못하였다.


기분이 나빴지만 나는
“할 수 없죠 뭐.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 다시 잡지요.”하며 다시
낚시를 던지는데 그 노인은 자리로 돌아가 낚시대를 걷기 시작했다.
“왜 벌써 걷으세요?” 물으니 “젊은 양반 보기가 민망스러워 더이상
이곳에 앉아있을 수가 없구료. 정말 미안해요.” 했다. 그러자 내 마음이
좀 누그러지며 그 노인께 오히려 측은함과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닭간을
더 드리며 관찮다고 하자 얼굴이 밝아지며 낚시를 계속하셨다.


2시간동안 3마리의
메기를 다시 잡았다. 오후 5시쯤 낚시대를 거두고 고기를 담기위해 망태기를
찾으니 없었다. 집에서 도망치듯 바삐 나오느라 챙기지 못한 것이 분명했다.
살림망에서 메기가 요동치는 것을 확인하고 200m쯤 떨어진 가게에서
망태기를 사온 후 살림망을 걷어올리는 순간 깜짝 놀랐다. 메기가 한
마리도 없이 텅 비어 있었다. 이럴 수가... 살펴보니 이음새 3개 정도가
끊어져 소주병이 들락거릴 정도의 틈이 생겼는데 덩치 큰 메기는 그
작은 틈새를 통해 유유히 물속으로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걸 보니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허전한 마음으로 돌아오며 곰곰히 생각에 잠겼다. 아프다고
둘러대고 결근한 행위,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유유히 잠적해 버린
메기... 이런 것들이 어우러져 그동안 내손에 잡혀 희생된 수많은 물고기들을
생각하니 식은 땀이 났다. 오늘의 일은 틀림없이 부처님께서 “더이상
살생하지 말라” 고 하시는 엄중한 경고처럼 받아들여졌다.


‘그래. 이제 낚시는
끝이다. 그동안 많은 물고기를 낚았으니 살생의 죄 무겁구나. 부처님!
다시는 낚시를 하지 않겠습니다.’하며 맹세하니 다소 마음이 가벼워졌다.


그때의 결심이 지금까지
흔들림없이 잘 지켜지고 있으니 그때 도망친 메기나 할아버지와 손자가
무명중생을 일깨우기 위해 화현한 불보살님의 화신처럼 여겨졌다.


본격적인 불교신행은
정말 우연히 이루어졌다. 내가 다니는 직장이 강남구 포이동에 위치하고
있는데 회사 사장님은 착실한 기독교인으로서 교회의 장로였다. 어느
월요일 아침 사장께서 “이이사, 어제 구룡산 산행하고 능인선원에 들어가
보았는데 건물의 형태도 아름답지만 내부도 짜임새있게 잘 지었더라.
내가 보기엔 그린벨트에다 건물을 지었으니 그 과정을 자세히 알아보게나.
강북구 그린벨트 안에 교회 땅이 있어 종교건물이나 교회 등으로 건축허가가
가능하다면 지으려고 하네. 자네가 불자라서 어려운 부탁을 하네” 하였다.


능인선원이라는 말은
그때 처음 들었다. 며칠후 능인선원 사무실을 찾아가 알아보니 잡종지이므로
건축이 가능했다는 설명이었다. 이 일로 능인선원을 처음 찾은 날, 부처님께
예배하기 위해 법당에 들어서는 순간 규모에 놀라고 불보살님의 화려하고
웅대하며 자비로우신 모습에 그만 넙죽 엎드렸다. 그날로 능인불교교양대학(4개월
과정)에 등록하였고, 입학하는 날부터 졸업할 때까지 불교의 이해와
교리공부가 깊어갈수록 매일 다시 태어나는 느낌이었으며, 알음알이로
자리잡았던 기복신앙으로서의 불교가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지금까지
악업종자를 잉태하며 살아왔다면 이제부터는 참회하며 베푸는 삶으로
살아갈 것을 수없이 다짐하였다.


4개월 과정을 수료하고
가족 4명이 모두 수계를 받았을 때의 기쁨이란 필설로는 부족하다. ‘월천’이라는
법명과 향불로 팔뚝을 태우는 연비의식에서 지난날의 죄업을 참회하며
이제 대지를 갓 뚫고 올라온 새싹 인양 비로소 불제자로서의 첫발을
내딛게 되었으니 능인선원 지광스님을 비롯한 우주법계에 감사할 따름이다.
솔직히 그 전까지는 <반야심경>이나 <천수경> 한번 읽어보지
않았으며, 법회에 참석하거나 큰스님의 법문 등은 들을 기회조차 없었던
암흑의 세계였다. 그런데 교양대학을 수료할 무렵에는 이 두 경을 모두
암송함은 물론 그 의미까지도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었다. 일요법회도
꼭 참석하여 여러 스님들의 법문도 경청하며 심신을 키우는 걸음마 불자로
거듭나 있었다. <천수경>의 다음구절을 좋아하다보니 하루에도
수회씩 전체를 독송하는 <천수경>팬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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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罪無自性從心起


心若滅時罪亦忘


罪忘心滅兩具空


是卽名爲眞懺悔”


악업에 억눌려 자포자기하는
무명중생들에게 이보다 필요한 말씀이 또 있겠는가? 어두운 과거나 죄의식에
억눌려 움추린 삶을 살기보다는 지은 죄 한탄말고 지심참회로 툭 털어버리고
현재에 충실한 바른 삶을 살아갈 수 있는 비전을 제시한 대목이라고
생각한다. 새벽 3시에 시작되는 백일기도에 동참하여 오체투지 일심으로
300배씩 절하고 나면 온몸은 땀범벅이 되지만 마음은 날아갈 듯이 상쾌하고
맑아짐을 체험해보지 않고 어찌 알 수 있으리오. 그래서 불교는 실천하는
행을 강조하는가 보다. 이렇게 정근하고 기도드린 공덕으로 아들은 수능시험
잘 치러 원하는 대학 학과에 특차로 무난히 합격하였으니 천수천안으로
중생의 원 들어주시는 불보살님의 가피력 아니겠는가. 목요경전반에
등록하여 아함경, 금강경, 법화경 등 경전을 접하며 머리만 무거워지는
지식불자가 아니라 보살행을 겸비한 대승불자로 새로 태어나고 있음에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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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불교신행에
재미를 붙이고 있을 무렵 어느날 초등학교 1학년 담임선생님의 꿈을
꾸었다. 안개인지 수증기인지 구름같은 모양이 땅에서 뭉게 뭉게 피어나는
깊은 산속인데 선생님은 하얀저고리 검정치마에 머리는 쪽을 찌어 올리신
단정한 모습으로 나를 향해 미끄러지듯 가깝게 오시는가 싶더니 한마디
말씀도 없이 어느덧 멀어지다가 사라지셨다.


은사이신 김선생님에
대하여 간단히 소개하면 이렇다. 당시 초등학교는 6.25동란의 상흔이
아직도 남아있어 학교시설은 미흡하기만 했다. 초가지붕의 엉성한 임시교실
흙바닥에 가마니를 깔고 공부해야 했지만 그래도 선생님은 어머니같이
항상 자상하셨고 깔끔하셨다. 흰색 저고리와 까만 치마, 머리를 곱게
빗어 쪽을 찌신 모습은 선생님의 트레이드마크였으며 연세는 50대로
기억된다. 조용하시면서도 숙제를 안해오면 회초리로 손바닥을 때리시는
엄한 분이셨다. 우리 6남매중 나와 남동생, 여동생 등 3남매의 은사이시니
그 인연이 가볍다고 말할 수 없다.


30여년이 지난 어느날
갑자기 내 꿈속에 나타나신 선생님은 무언가 하실 말씀이 있는 것 같았는데
그냥 사라지시니 안타까웠다. 꿈의 선명함과 의문점을 간직한 채 열흘
정도 지난 어느날 부부가 함께 참석하는 모임이 있었다. 이 모임은 초등학교
동창중 마음이 잘 맞는 7명의 친구가 부부동반으로 2개월에 한번씩 만나는
모임으로서 선생님의 아들도 회원이었다. 그 친구옆에 앉아 담소하던
중 이런 말이 튀어나왔다. “00아, 몇월 며칠이 혹시 선생님 제사날
아니었니? 제사는 잘 지내드렸지?”하니 그 친구는 네가 어떻게 어머니
제삿날을 아느냐고 깜짝 놀라며 한편 당황해했다.


내가 말을 이으려 하자
옆에 있던 다른 친구가 내옆구리를 쿡 찌름과 동시에 큰 소리로 대화를
바꿨다. 모임이 끝나고 말문을 막은 친구와 같이 오면서 선생님의 집안사정을
들을 수 있었는데 정말 뜻밖이었다. 친구아버지는 선생님과의 사이에서
자녀가 없자 작은부인을 들여 5남매를 두었고 그 자녀중 한명이 언급한
친구였다. 선생님은 홀홀단신으로 말년까지 외롭게 사시다 돌아가셨으니
제사인들 누가 신경써서 모시겠냐며, 그래서 화제를 바꾸었다는 것이다.
이야기를 마친 친구가 어떻게 선생님 기일을 알고 있냐고 묻길래 꿈
이야기를 하니 그 친구도 의아해했다. 이제야 꿈에 나타나신 선생님의
뜻을 알것 같았다.


평생을 교단에 서시면서
배출한 많은 제자중에 선생님을 위해 지극한 마음으로 영가를 모실 수
있는 제자라는 생각에 꿈에 나타나셨구나 생각하니 가슴이 뭉클하였다.
즉시 고향 면사무소 호적계에 전화를 걸어 선생님의 제적등본 1통을
팩스로 전송받아 조상님들의 영가가 안치된 법당에 같이 모시고 일심정성으로
기도드렸다. 그해 늦가을 생지장도량인 심원사에서 봉행하는 ‘조상령천도
49재 지장기도법회’에 동참, 토요일마다 철야정진으로 원만히 회향해
드린 며칠 후, 꿈속에서 밝은 미소로 편안히 앉아계신 선생님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조상님도 선생님도 다같이 받들고 섬겨야 할 대상이니
이 목숨 다하는 날까지 지심으로 서방정토 극락왕생 발원하리라 굳게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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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년 2월, 2년과정인
동산불교대학에 입학하여 열심히 수행정진과 경전공부에 매진하고 있다.
동산법당을 가득 메운 재가불자들의 열기는 불교의 미래를 걱정하지
않아도 좋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나무아미타불 십만팔천번
사경, 교과목 이수후 원고지 30~40매의 리포트 작성제출, 조별로 운영되는
팀워크의 중요성, 나태해진 신심을 재충전 시켜주는 성지순례, 북한동포와
아프리카 기아난민돕기 운동, 지진참사국 돕기, 만일염불회 동참 등등.
이렇게 열심히 배우고 실천한다면 학생의 대부분이


기성불자로 진정 불교가
무엇인가를 배워 실천하기 위한 수행자로서 사찰에서 신행단체를 이끌거나
모범적인 불자로 자리매김 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또한 조계종에서
매년 실시하고 있는 포교사 시험에도 높은 합격률로 단연 두각을 나타내고
있으며, 이렇게 배출된 포교사들은 음지를 양지로 바꾸는 부처님 사업에
동참하는 숨은 보살들이 될것이라 믿는다.


99년 6월 19일 토요일
불교대학 수업을 마친 후 오후 10시, 불자산악인 모임인 금강메아리의
정기산행인 지리산 천왕봉을 등정하기 위해 대절버스에 몸을 실었다.
산악대장은 몇 개월전부터 천왕봉은 민족의 영봉이요, 남한에서 두 번째로
높은 봉우리니까 모두 함께 올라가자며 도봉산을 오르게 하는 등 체력단련에
심혈을 기울였다.


나는 체중 90kg의 비만이므로
체중감량과 지리산 천왕봉 오르기 등 두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해 비장한
각오로 4월부터 매일 새벽 3시에 일어나 4.19탑에서 북한산 대동문까지를
왕복하는 2시간의 등산을 하는 것이 출근전의 중요한 일과가 되었다.
그 결과 체중이 4kg 줄어 천왕봉 등산도 가볍게 오를 수 있다는 기분으로
버스에 몸을 실으니 어찌 마음이 설레지 않을까?그러나 잘 달리던 버스가
새벽 3시쯤 덜커덩 하는 소리와 함께 경상도 함안의 도로위에 멈춘 후
몇시간동안 꼼짝하지 않았다.


긴급조치로 함안에서
달려온 버스가 일행을 싣고 지리산을 향해 출발한 시간은 새벽 5시경,
지리산 입구에 도착하니 6시가 훨씬 넘었다. 몇시간의 등정으로 법계사에
도착한 일행은 사리탑에 모여 지도법사님의 집전으로 산상법회를 봉행한
다음, 등산에 자신이 없는 몇 명의 회원을 뒤로하고, 천왕봉을 향해
한걸음 한걸음 옮겨 가기 두시간후 마침내 정상(해발 1,915m)에 올라서니
그 기쁨이 얼마나 크리오.


구름은 발아래서 노닐었고
순식간에 안개가 끼고 걷히는 자연의 조화속에 신선이 된 기분이었다.
정상에서 사방을 둘러보니 역시 지리산은 명산이었다. 정상을 알리는
석주(石柱)를 배경으로 기념촬영과 잠시의 휴식을 취한 후, 장터목산장에서
점심식사를 하자며 급히 하산을 서둘렀다. 호사다마인가? 경관을 감상하며
하산중 돌부리에 오른발이 걸려 넘어지며 오른쪽 무릎 연골부위 아래가
도끼날 같이 날카로운 돌에 찍혔고, 순식간에 울컥울컥하는 소리를 내며
피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가로 10cm, 깊이 2cm
정도 벌어진 상처는 하마입을 연상케 할 정도로 깊이 패였다. 누군가가
서둘러 담배 두 개피를 상처에 넣고 압박붕대로 동여매니 피가 멈추었다.
응급조치를 한 후 배낭을 둘러멘 채 하산하여 20여분만에 장터목산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산장 관리요원에게 상처를 보여주자 깜짝 놀라며
이렇게 깊은 상처를 당하고 걷는 사람이 어디 있냐며 담배부스러기를
모두 꺼낸 후 소독하고 부목을 대어 상처를 고정시켜 주었다.


산장관리 요원들의
투철한 봉사정신이 고마웠다. 헬기가 있느니 없느니 하는 우여곡절 끝에
전라남도 소속 119헬기에 탑승하여 순천에 위치한 한국병원 응급실로
후송되었다. X-RAY촬영결과 인대가 으스러져 끊어지고 무릎뼈의 일부가
파손됐다며 수술하고 6주의 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설명이었다. 보호자로
따라온 회원이 수술서류에 서명하자 3층에 있는 수술실로 옮겨졌다.
전신마취를 위하여 척추에 꽂혀지는 주사바늘의 따끔함만 기억될 뿐,
눈을 뜨니 수술실 천정에 있는 수많은 전구가 시야에 들어왔다. 내입은
무어라고 중얼거리는데 다름아닌 ‘신묘장구대다라니’를 나도 모르게
염송하고 있었다.


잠시후 의사가 들어와
4시간 반동안 수술하였는데 정말 잘됐다고 하면서 참 건강하시네요 한다.
순천은 연고지가 아니므로 다음날 서울에 있는 종합병원으로 옮겨 입원치료를
받는데 담당의사도 놀랄 정도의 빠른 회복을 보여 2주일만에 퇴원하고
제자리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렇게 세세하게 경과를 말하는 이유는
부상을 통하여 경험한 불보살님의 불가사의한 가피력을 말씀드리려 함이다.


넘어진 당시나, 붕대를
동여매고 20여분을 혼자 걸어내려 올 때나 수술전후나 치료기간중에
고통이나 아픔이 전혀 없어서 오히려 이상하게 생각할 정도였으며, 퇴원
후 바로 정상 생활로 복귀하였으니 부처님의 크신 가피력이 아니면 설명할
방법이 없다고 하겠다. 어떤 사람은 운동을 하다가 인대가 조금 늘어나도
6개월씩 치료를 받는다고 하는데... 퇴원 며칠 후 군불교진흥회 부회장으로
계신 법사님의 권유로 전방 군부대 대법당 부처님 점안식에 참석한 것이
계기가 되어 그 군법당의 지도법사를 요청받았다. 두려움이 앞서고 망설여졌으나
사양한다고 될 문제도 아니요, 거리가 멀어서 싫다고 한다면 이곳 전방을
지키는 병사들이 부처님법 만나기란 더욱 어려운 것 아닌가, 또한 군대가
포교의 황금어장이라고 들었으므로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였다.


강의 주제를 정하고
밤을 새워 정리한 경전내용을 일요법회 시간에 전달하며 씩씩한 병사들을
대할 때면 환희심이 절로 나니 이 어찌 부처님의 크신 은혜 아니겠는가!인신난득(人身難得)이요,
불법난봉(佛法難逢)이라. 받기 어려운 사람몸 받고, 만나기 어려운 부처님법
만난 지금 용맹정진 멀리하고 게으르고 방일하면 억만겁 윤회로다. 앞으로
계속 탁마하여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이 있다면 그 무엇을 주저하리. 자신을
태우는 양초가 수천만년 어둠을 일시에 거두어 가듯, 이 한몸 불 법
승 삼보 위해 그렇게 쓰인다면 이 세상 태어난 소명이리라. 나무아미타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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