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비하신 부처님!"
아침마다 자리에서
눈을 뜨면 일심으로 부른다.
그리고 지금이 중요하니
만나는 사람, 하는 일에 지혜로운 불자가 되자고 늘 스스로 다짐하며
하루를 시작한다. 마음이 산란할 때나 몸이 조금 피곤해도 일심으로
부처님을 부르면 알 수 없는 힘과 용기가 생긴다.
결혼 후 처음으로 양주에
있는 회암사라는 절을 갔다. 내 생애 처음 가본 절이었는데 웬지 낯설지가
않았다. 인연이 많아서인지 오랜만에 찾아온 고향같은 느낌이었다.
결혼을 일찍 한 후
남편의 술 버릇 때문에 마음 고생을 하면서 자주 절을 찾게 되었다.
작은 아이는 등에 업고 큰 아이는 손에 잡고 부처님께 엎드려 남편이
술 먹지 않게 해달라고 빌고 또 빌었다.
그러나 남편은 절에
다녀오는 날이면 더욱 더 나를 힘들게 했고, 그럴 때마다 같이 살지
않으려는 마음도 여러 번 냈다. 이런 불안한 생활속에서 내 유일한 위안처는
절이었다.
그러던 중 봉은사와
인연이 되었다. 공무원인 남편이 강남구청으로 발령을 받아 강남으로
이사 오고 나서부터 봉은사를 다니게 됐다. 낮에는 아이들 때문에 힘들어
새벽에 기도를 다니기로 결심하고 열심히 다녔다. 새벽 기도를 마치고
도량을 한 바퀴 돌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 갈수록 심각해지는 남편의
술 버릇이 너무 견디기 힘들었지만 모든 것을 내 나름대로 생각하고
마음을 돌렸다.
'그래, 전생에 내가
남편을 많이 힘들게 해서 금생에 빚 갚으려고 다시 만났을 거야. 나를
일깨워 주는 일이라고 여겨야지.' 이런 생각을 하자 오히려 남편에게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집에 와서 남편에게 정중히 삼배를
올렸다. 처음에는 의아해 하던 남편이 너무나 정중한 내 태도에 조금씩
달라져 갔다. 그리고 새벽 기도를 같이 다니겠다고 했다. 나는 법당에서
기도했고, 남편은 참배한 후 도량에서 운동을 했다. 그리고 기도가 끝나면
같이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그런 행복도 잠시,
시골에 계시던 시어머님이 많이 편찮으셔서 병원에 입원을 하셨다. 남편이
종가의 외아들이니 병 수발 들 사람은 당연히 나밖에 없었다. 집안 살림하랴,
어머님 병간호 하랴,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두 달 가량 대소변을
받아내며 간호한 보람도 없이 어머님은 세상을 떠나셨다. 내가 힘들
때 경제적으로 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 많은 의지를 했는데 날개 잃어버린
새처럼 막막하기만 했다.
칠순이 되신 시아버님은
서울 생활에 적응하기가 힘드신지 한사코 함께 살기를 거절하셨다. 하루
건너 한번씩 아버님을 찾아 뵈었고 가족들도 주말엔 시골을 찾았다.
아버님도 몸이 좋지 않으셔서 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힘든
날이 계속되면서 남편도 많이 힘들었는지 자주 술을 마시고 가족들을
못살게 굴었다. 나는 그럴수록 자주 절을 찾게 되었는데 그즈음에 봉은사
사태가 발생하여 새벽 기도를 다닐 수가 없어서 구룡사에서 기도를 했다.
그런데 3,4개월 쯤
됐을 때였다. 하루는 봉은사 법당에서 절을 하고 있는데 주지 스님이
내게 오셔서 "보살님, 돌아오는 토요일 날 봉은사에 철야기도가
있으니 꼭 참석하세요."하시는 것이었다. 깜짝 놀라 깨어보니 꿈이었다.
그래서 봉은사에 전화를 걸어 보니 정말 토요일에 철야 정진기도가 있다고
했다. 그때부터 다시 봉은사로 새벽 기도를 다니고 한 달에 한 번 철야
기도 때는 삼천배를 했다.
처음 삼천배를 시작할
때는 힘들기도 하고, 내가 여지껏 무얼 하며 살았나 생각하니 설움이
복받쳐서 흐르는 눈물을 걷잡을 수가 없었다. 절을 하면서 내가 부처님
가르침에 얼마나 성실했는가를 반성하게 됐고 병들어 버린 양심을 조금씩
되찾게 됐다. 내 가족, 나 자신만을 위해 했던 기도가 어느덧 변해갔다.
이웃을 위해, 어려운 이들과 함께 하는 기도로 바뀌어 가고 아주 작은
것부터 배려하는 마음이 조금씩 생기기 시작했다. 그런 마음을 내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그런데 남편이 2년에
한 번 받는 건강 종합검사를 받았는데 재검사를 받으라는 통지가 왔다.
남편과 같이 초음파, 피 검사 등을 받고 며칠 후에 결과를 보러 갔는데
아무래도 의심스러우니 CT촬영을 해보자고 했다.
나 혼자 검사 결과를
보러 갔는데 의사 선생님 말씀이 "이 사람 이런 상태에서 어떻게
움직이느냐"면서 간암 말기라고 했다. 이미 간이 굳어버려 5%만으로
견디고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다.
온몸에 힘이 다 빠져나갔다. 아픈 데 하나 없이 건강하던 사람이 간암이라니
. . . 어떤 방법을 써도 두 달밖에 살지 못하니 직장 다니면 그냥 다니게
하고 잘 해주라는 것뿐이었다.
집에 돌아온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그냥 울기만 했다. 퇴근해서 돌아온 남편은 검사 결과가
어떻게 됐느냐고 물었지만 나는 괜찮으니까 술 마시지 말고 휴식을 취하라고
했다고 거짓말을 했다. 그리고는 민간요법으로 간에 좋다는 것은 다
해주기 시작했다. 편찮으신 아버님, 고3 큰아들과 중학생인 작은 아들,
게다가 엄마 아빠 없는 네 살짜리 친정조카까지 정말 벼랑 끝에 서있는
기분이었다. 막막한 삶 속에서 기댈 곳은 오직 부처님 뿐이었다. 새벽에
절에 가면 부처님께 엎드려 울기도 여러 번, 수없이 절을 하며 참회
기도를 했다.
그러던 어느날, 스님
법문 한 마디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삶 자체가 고통이니 어떤 고통이라도
대처해 나가는 마음을 키우는 것이 기도이고 불자의 삶이어야 한다는
말씀이었다.
'그래 고통을 없애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어리석다. 삶에 끌려 다니지 말고 삶을 이끌어가는 주인이
되자.'고 다시 몸을 추스리고 불교 공부를 시작했다. 내가 힘을 잃어버리면
나를 바라보고 있는 우리 가족들은 어떡하나, 마냥 슬퍼하고만 있을
수가 없었다.
어린 조카를 데리고
다니며 불교대학 공부를 시작했다. 졸업 후 다시 경전학교에 등록해서
<금강경> 공부를 했다. 평소에도 독송은 하고 있었지만 <금강경>
강의를 들을 때마다 절절이 와 닿지 않는 말이 없었다. 공부할 때마다
환희심이 생겼고 공부가 끝나면 집에 가서 출근하지 못하고 있는 남편에게
배운 그대로를 전해줬다. 세상에는 참으로 영원한 것이 없으니 우리의
인연이 다한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자고 했다.
정신력이 강한 남편은
서서히 죽음을 준비하는 것 같았다. 내가 절로 공부하러 가고 없을 때는
전화로 주문해서 집안 살림살이를 하나씩 바꾸기 시작했고 아버님과
자신의 영정 사진도 만들어 놓았다.
평소에 등산을 좋아했던
남편은 같이 산엘 가도 혼자만 올라가 버리곤 했다.
힘들게 뒤따라
올라가면 중간 쯤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화가 나서 이 험한 산에서
혼자만 가면 어떡하냐고 따지면, "인생은 늘 홀로서기야. 언제까지
내가 당신 곁에 함께 할 줄 알아!"하곤 했다. 그렇게 빨리 금생
인연이 다해가는 것을 알았나 보다.
그 무렵 봉은사에는
강의도 잘 하고 염불도 잘 하시는 스님이 계셨다. 그때 입시 백일 기도를
하시는 중이었는데 염불 소리가 얼마나 맑고 청아한지 기도 마치고 집에
와도 그 기운이 늘 함께 하는 듯 했다. 그날도 새벽 기도를 마치고 잠이
들었는데 비몽사몽간에 그 스님이 우리 집엘 오신 것이었다. 스님은
집을 한 바퀴 도시면서 정성껏 기도를 해주시고는 공양 상을 올리자
사시 기도를 하러 가야 한다며 "일주일간 보살님 집에 하루 세
번씩 기도를 해드리기로 했습니다."라고 하시며 가셨다.
그런데 다시 기도를
오신 스님께서 내게 돈이 25만원 필요하다고 하셨다. 우선 있는 돈 20만원만
드리고 나머지는 다음 기도하러 오시면 드리겠다고 하고 나서 꿈을 깼다.
꿈이 얼마나 생시같이
생생한지 윗집 보살에게 말했더니, "네 꿈이 잘 맞으니까 스님을
찾아 뵙고 상의 드려 보자."고 하셨다.처음 스님을 뵙는 자리라
떨리기도 하고 어렵기도 했지만 정중히 삼배를 올리고 꿈 얘기를 말씀드렸다.
스님은 눈을 지그시 감으시더니 말씀하셨다.
"봉은사 판전
전각이 너무 낡아서 보수를 하기로 했는데, 내게 50만원의 화주가 들어와
한 보살님께 25만원의 화주를 부탁하고는 어젯밤에 조용히 앉아서 나머지
공덕을 어느 분께 짓게 하나 하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보살님께 갔군요."
그러면서 내 집안 사정을
들으시고는 좋은 말씀으로 위로해주셨다. 그 후로 두 달밖에 살 수 없다던
남편은 2년 동안 투병생활을 하면서 틈나는 대로 불교 공부를 했다.
무심히 보아오던 앞
마당의 단풍나무 잎이 유난히도 아름답던 그 해 가을, 다 떨쳐버리고
앙상한 가지만 남은 나무도 아름다웠고 뒹구는 낙엽도 나름대로 다 의미있는
삶이었다. 나무가 인연따라 과감히 잎새를 떨어버리듯 그렇게 남편은
말 없이 떠났다. 죽음이란 작은 바람 앞에도 힘 없이 꺼지는 촛불이었다.
그런데 나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나는 담담했다. 사실 그때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보다는
어떻게 일을 치러야 할까가 더욱 걱정이었다. 봉은사 구역법회에 연락을
했더니 여러 스님들과 신도들이 오셔서 장례를 의논하셨다. 나는 주지
스님과 여러 스님들이 결정하는 대로 따르기로 했고, 하루 종일 스님들의
염불 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3일 째 되던 날, 봉은사에서
노제를 지낸 후 스님들과 신도들이 함께 영정을 모시고 법성게를 독송하며
탑을 세 바퀴 돌고 화장터로 갔다. 화장을 마친 남편의 유골은 밥을
섞어서 3일간 명부전에 모셨다가 스님의 독경 속에 아이들 손에 의해
뒷산에 뿌려졌다. 비록 몸은 떠났지만 한줌의 재라도 공양물이 되고
싶어했던 남편의 뜻이기도 했다. 그때 큰 일을 함께 치러주신 스님들과
신도님들의 은혜는 평생 잊을 수 없다.
그 후로 난 구역법회
일을 조금씩 시작하면서 시아버님 병간호를 했다. 중풍에다 치매까지
걸리신 아버님은 대소변을 아무 곳에나 보거나 벽에 칠하기도 하고 불을
땐다고 책을 쌓아 놓고 성냥불을 긋고는 하셨다. 때로는 며느리인 나를
당신 아내로 착각하시는 등 잠시도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큰 아이는 군에 입대했고
작은 아이는 고등학교에 들어갔다. 나 혼자 매일 목욕시키고 냄새 때문에
집안을 대청소해야 하는 힘에 겨운 나날들이었다. 작은 아이가 학교에서
돌아오면 아버님을 맡기고 저녁예불을 갔다. 가도가도 끝이 안 보이는
길, 울고 싶도록 힘겨웠던 것을 염불로 대신했다.
그 무렵 꿈을 꾸는데
윗집 사는 그림 그리는 처녀가 내게 관세음보살도라고 하면서 그림 한
장을 건네 줬다. 그런데 백의 관음보살상이 아니라 시골 아줌마처럼
평범한 모습이었다. 그림이 얼마나 선명한지 늘 눈 앞에서 아른거렸다.
아버님의 병세가 더욱
심해지고 잠은 제대로 자지 못해 몸과 마음이 지칠 대로 지쳤던 어느날,
그날도 부처님 앞에 엎드려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때 귀에
스치는 말이 있었다. "밖에서 나를 찾지 말고 네 안에서
나를 찾으라."는 소리였다. 마음을 가다듬고 계속 절을 하는데
처녀가 건네준 보살상이 아른거리며 순간 그 보살이 바로 나였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관음보살님은 많은
중생의 고통을 함께 하시는데 나는 아버님 한 분도 제대로 모시지 못해
힘들어 하는구나 생각하니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어떻게 하는 것이
아버님을 잘 모시는 길인가를 생각했다. 고통스럽게 사시는 것보다는
다시 몸을 바꾸어 새 삶을 사시게 하는 것이 아버님을 위하는 길이라
생각하고 아버님을 위해 간절히 기도했다.
저녁 기도가 끝나면
아버님부터 뵙고 팔다리를 주물러 드리면서 불효를 용서해달라고 했다.
아버님의 병세가 더욱더
나빠지자 아들 부대로 전화를 걸어 사정 얘기를 하면서 부탁했더니 아들을
보내주셨다. 큰 아이는 나를 보자 눈물을 글썽이며, "엄마는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길래 할머니와 아빠 병간호도 모자라 할아버지까지
대소변을 받아내며 이런 고통을 당해요."하는 것이었다. 나는 아들을
달랬다.
엄마는 절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엄마가 감당할만한 그릇이니까 엄마한테 오는 거야.
우리 이 고비만 잘 넘기자."큰 애는 엄마가 그런 생각으로 사니
한결 마음이 놓인다고 했다. 죽음을 여러 번 지켜본 나는 아버님 곁을
떠나지 말라고 아이들에게 당부하고 아미타경을 독송했다. 정근이 끊이지
않는 가운데 두 손자들과 며느리가 지켜보는 동안 아버님은 조용히 눈을
감으셨다.
아버님 장례 후 큰
아이는 아픈 몸으로 부대로 복귀했다. 아버님 초재에 맞춰 큰 아이가
외박을 나왔다. 재를 지내려고 함께 절에 갔는데 재가 끝나고 공양까지
마치고 났는데도 큰 아이가 돌아오지 않았다. 집에 돌아가 보니 군화와
군복, 속옷까지 다 벗어놓고 사복으로 갈아입고 집을 나가고 없었다.
부대에서는 그날부터
중대장님을 비롯해서 다섯 분이 우리 집으로 와서 연고가 있는 곳이면
지방이건 어디 건 가리지 않고 찾기 시작했다. 정말이지 피를 말리는
하루하루였다. 내가 지은 업은 선업이든 악업이든 어느 곳에 숨어도
피할 수가 없다는데 왜 내가 지은 업을 그 아이가 받아야 하느냐고 원망도
해보고 체념도 했다.
그렇게 찾기를 여러
날. 중대장님은 철수하면서 다음 날부터 동계훈련이 있으니 상부에 신고해야겠다고
했다. 나는 대대장님께 전화를 걸어, 여지껏 기다려 주셨는데 일주일만
더 시간을 주면 죽은 아이라도 찾아서 데려가겠다고 사정했다.
나는 그날부터 아이가
돌아올 때까지 죽는 일이 있어도 꼼짝 않고 기도하리라 결심하고 생사를
넘나드는 기도에 들어갔다. <관음경>을 펴고 독송을 시작했는데,
'도심단단괴 혹수금가쇄 수족피추계 염피관음력 석연득해탈(혹 옥에
갇혀 손에 수갑을 차고 발목에 족쇄를 차고 있어도 관음을 염하는 힘으로
모든 속박에서 풀려난다)'는 대목에서 갑자기 눈시울이 뜨거워지면서
부모자식 간이지만 그동안 지나친 기대와 집착 때문에 아들이 엄마가
인식하지 못한 사슬에 묶여 있어 큰 부담을 느낀 것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납게 몰아치던 마음이
차분히 갈아 앉으며 내 염불 소리만 낭랑하게 울렸다. 관세음보살을
찾는 소리가 온 허공에 울려 퍼지듯 하는 내 소리에 취해 있는데,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아들한테서 연락이 온 것이다. 잠깐인 듯 싶었는데
4시간이나 흐른 것이다.
아들은 그날로 부대에
복귀해 동계훈련에 참가해 모든 일이 잘 해결됐다. 얼마 후에 대대장님께
인사드리러 갔더니 불심이 깊고 인상이 좋은 불자이셨다. 군생활 25년에
이런 기적은 처음이라면서 대대장님도 큰 모험이셨다고 오히려 감사해
하셨다.
너무 숨 쉴 사이 없이
큰 일이 생기니까 하루는 비구니 스님께서 나를 부르시더니 좋은 말씀을
해주셨다. 집안 대청소를 하려면 묵은 먼지까지 털어내야 하듯이, 내가
마음 청소를 하는 사람이니까 삼생에 걸쳐 받아야 할 과보를 금생에
한꺼번에 받느라고 휘몰아쳤다는 것이었다. 나도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이들이 말을 안 들으면 야단도 치고 회초리도 드는 것처럼 불자이고
부처님 자식인 내게 올바른 불자되라고 야단 치신다고 생각하고, 그
후부터 부끄럽지 않게 살려고 더욱 노력했다.
그 무렵 재무 스님께서
봉은사 책방을 맡아 운영해 보라고 하셨다. 아무것도 모르는 처지라서
겁도 났지만 주위에서 많은 분들이 도와주신 덕분에 책방은 운영이 잘되었다.
불교 서적을 접하면서 좋은 책을 읽을 수 있는 가피를 입었다. 여러
고통으로 힘들어 하는 불자들이 찾아오면 내가 겪고 느낀 점을 토대로
상담도 해주고, 사찰 예절도 가르쳐주었다.
책방에 4년 정도 있다가
내 일을 찾기로 했다. 그때 기도하러 간 곳이 태백산 정암사였다. 일주일
기도를 갔는데 마침 절에 공양주가 없어서 공양주 일을 하면서 기도를
마쳤다. 그런데 그 절에서 한철을 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들에게는
엄마 없이 백 일 동안만 어떤 상황이든 부딪치며 해결해보라고 하고
10월 보름 결제일에 들어갔다.
공양주 일을 하면서
아만심을 꺾고 철저히 하심을 배우려는 생각이었다. 태백산 정암사는
적멸보궁이고 겨우내 하얀 눈이 평평 쏟아지는 깊은 산중이었다. 스님
다섯 분이 계셨고 기도하러 오신 객 스님과 신도 몇 분이 함께 겨울을
났다.
새벽 세시만 되면 하얀
눈 속에 도량석을 도시는 스님, 내가 혼자 일하기 힘들다고 도량과 화장실
청소 등을 맡아서 해주시던 스님, 이름 그대로 적멸보궁이었다. 기도
정진하며 공양 짓는 일이 너무나 행복했다. 정월달에는 성지순례 오신
2백~3백 명의 공양도 거뜬히 할 수 있는 힘이 생겼다.
나는 복이 많아서 정진하는
분들께 손수 공양을 지어 올리는구나 하는 생각으로 일을 하니 힘든
줄을 몰랐다. 너무 추운 곳이라 얼굴은 얼어붙고 손은 가뭄에 논바닥
갈라지듯 터지고는 했다. 이젠 어떤 어려움도 참고 이겨낼 수 있다는
각오로 백일 기도를 마치고 집에 돌아왔다. 집에 돌아와 보니 큰 아이는
취직이 돼서 직장에 잘 다니고 있었고 재수생이던 작은 아이는 대학에
합격한 상태였다. 엄마 없이 생활비도 거의 없는 상태에서 두 아이가
많이 힘들었던 것 같지만 고비를 잘 넘기고 더 어른스러워 보였다.
몸은 떨어져 있었지만
자식을 향한 어미의 마음이 아이들을 보살핀 것같다. 작년에 작은 아이가
군에 입대했다. 훈련소까지 함께 가면서 "너는 탈영하면 안 된다."며
같이 웃었다.
지금은 조계사 조금
못 미쳐서 아담한 전통찻집을 하고 있다. 오신 손님들께 차를 올릴 때는
부처님께 차 공양 올리는 정성스런 마음을 잃지 않으려고 애쓰며 하루하루를
불자로서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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