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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호및지난호

보이지 않는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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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글/ 허명길,삽화 /정동훈 작성일06-01-23 11:09 조회3,05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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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석굴암으로 가는
계단을 오릅니다. 돌계단 모서리 하나하나 그리고 모퉁이 돌 때마다
나타나는 회색 기와를 얹은 지붕의 휘어진 곡선. 이 모든 것이 눈 감고도
그려낼 것같이 친숙하기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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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로 직장 발령이
나면서 인사를 드리러 이 계단을 오르던 것이 5년 전. 경주 토함산 석굴암을
그대로 본따 지었다는 도심 속 석굴암. 철 나기 전부터 할머니와 어머니를
따라 오르내리던 이곳은 세상살이가 버거울 때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곳이었습니다.


summer22-si1.jpg


계단 끝 반쯤 열린
문 사이로 석굴암 부처님의 모습이 보입니다. 바닥에 깔아놓은 양탄자가
뒤집혀질 만큼 매서운 겨울 바람 속에서도 애타게 부르던 석가모니불.
‘부처님, 무상행이 왔습니다.’ 그러나 이 소리는 저만치 앞쪽에 등을
보이고 앉아계신 중년의 보살님의 기도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 목구멍
속으로 가라앉혀야만 했습니다


.석가모니불 석가모니불.
얼마를 그렇게 나직히 부르고 있었을까, 석가모니불 사이로 여자의 흐느끼는
소리가 끼어 들어왔습니다. 앞의 보살님이 울고 계셨습니다. 흘러내리는
눈물을 손으로 주체 못해 손수건까지 꺼내 닦더니 다른 사람이 뒤에
있는 줄 알텐데도 체면 불구하고 어깨까지 들먹이며 소리내 울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저에게는 그런 보살님의 모습이 전혀 낯설게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그 모습은 바로 십 년 전의 제 모습이었으니까요.


제가 불교를 믿게 된
것은 특별한 계기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할아버지 대부터 불사를
많이 한 집안이라 자연스레 불교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불교 교리를
모르던 어릴 때는 할머니와 어머니가 절에 가는 날에는 노량진에서 한강
건너 보문동까지 먼 길을 다녀오는 두 분 걱정보다는 어머니 손에 들려
올 떡이며 과일을 더 기다리는 편이었습니다.


두 분은 당시 대부분의
보살님들이 그러하였듯 마음공부 하기보다는 가족들의 안위를 기원하는
편이었고, 이런 분위기 속에서 저 역시 대학교 불교 학생회에 가입하기
전까지도 부처님을 그저 신통력이 있으시고 그 분께 정성을 다하면 소원을
들어주시는 신으로만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어리석은 습(習)의 뿌리는
참으로 깊어 대학 4년 간 여러 절에 수련회를 다니며 법 높으신 스님
말씀도 들어보았으며 밑줄까지 그어가며 많은 불교 서적을 탐독했으나
마음은 여전히 어둠 속에서 방황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저는 유복하게
자라났기 때문에 삶에 대해 크게 회의를 느낄 일도 없었습니다. 그저
더운 여름날 냉방장치된 택시를 타고 가며 옆으로 지나가는 만원 버스에
통조림 속 생선처럼 끼여 가는 사람들의 고통스런 얼굴과 사나운 눈빛을
보면서 과연 내가 저 사람들보다 복이 많은 걸까?


나에게 그런 자격이
있을까?


하는 의문과 함께 웬지
이런 행복을 오래 향유하지 못할 것 같다는 불안감을 떨쳐버리지 못했습니다.
불행히도 그 예감은 맞아들었습니다.


대학 졸업 후 저는
과를 바꿔 대학원에 진학하는 바람에 남들보다 두 배로 공부를 해야
했고 더군다나 공부 많이 시키기로 유명한 사학과로 옮기고 보니 학교
생활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힘이 들었습니다. 잠은 많이 자야 4시간이
고작이었고, 레포트가 밀릴 때는 30분 눈붙이고는 양치질만 한 채로
뛰어나간 적도 있었습니다.


대학 때부터 신장이
안 좋았던 저는 결국 쓰러지고야 말았습니다.


간신히 논문은 써서
졸업은 했지만 이미 저는 정상적인 생활을 포기해야 할 지경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신장이 나빠지면서
우선 몸이 붓기 시작했습니다. 손가락으로 누르면 자국이 남으면서 한참
있어야 원래 모양대로 올라왔고, 다리는 왜 그리도 무거운지 질질 끌고
다녀야만 했고 온 몸이 철근을 매단 듯 무거웠으며 무기력증에 빠진
듯 밥 숟가락 들 기운조차 없었습니다.


하지만 병원이란 병원은
다 찾아가도 그 때만 반짝할 뿐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는 것이었습니다.
몸이 이러니 취직 생각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결혼 생각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친구들은 유학을 간다, 좋은 곳에 취직되었다, 발전을 해가고 결혼한
친구들은 곧 학부모가 된다고 자랑인데, 저는 풍선처럼 퉁퉁 부은 몸에
누렇게 뜬 얼굴을 해 가지고 천정만 쳐다보고 있어야 했으니 생각나는
것은 죽음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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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조각으로 팔도
그어보았고 몇 분인지 기억은 안 나지만 아주 긴 시간 동안 숨을 참고
버티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인가 한참을 울다 보니


불경책이 눈에 들어오기에
불경과 염주를 내던지며 울부짖었습니다. 절망은 이렇게 사나운 기세로
저의 지혜를 무력하게 만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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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자비로우신
부처님은 저를 버리지 않으셨으니, 다음 날 저는 제가 집어던진 불경책을
제자리에 갖다 놓다가 책을 펼치게 되었고 전에는 그냥 지나쳤던 이산혜연선사
발원문이라는 것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저희들이 참된 성품
등지옵고 무명 속에 뛰어들어 나고 죽는 물결 따라 빛과 소리 물이 들고
심술궂고 욕심내어 온갖 번뇌 쌓았으며 보고 듣고 맛봄으로 한량없는
죄를 지어 잘못된 길 갈팡질팡 생사고해 헤매면서 나와 남을 집착하고
그른 길만 찾아다녀 여러 생에 지은 업장 크고 작은 많은 허물 삼보
전에 원력 빌어 일심참회 하옵나니 . . .” 여기까지 읽는데 ‘흑’
하고 울음이 터져 더 이상 읽을 수가 없었습니다.


바로 제 얘기였습니다.
이산혜연 선사께서 제 마음 속에 들어가 제 대신 참회를 하시는 것만
같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에는 원인 없는 결과 없는 법, 제가 겪고
있는 고통은 제가 지은 업장의 결과입니다.


그런데도 저는 자신을
돌이켜볼 생각은 않고 부처님에게 잘 되게 해달라고 졸라대고 행패까지
부렸으니 어리석음의 뿌리가 점점 더 깊었던 겁니다.


그동안 적지 않은 불교서적을
읽었으나 마음이 아닌 머리로 읽었으니 깨닫지를 못했던 겁니다. 그날
밤 이 발원문을 108번 읽었습니다. 몇 시간이 걸렸는지 모릅니다. 한
번 두 번 읽어갈수록 환희심이 생기며 졸음도 잊게 되었고 새벽 무렵
108번을 다 읽었을 때는 내 마음 속 거울에 덕지덕지 묻어있던 때가
벗겨지는 느낌으로 몸까지 가벼워지는 것만 같았습니다.


그리고 몇 년 만에
처음으로 상쾌한 기분으로 잠이 들었던 나는 흰옷을 입은 수십 명의
사람들이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는데 얼굴은 희미해서 기억이 나지
않으나 이 때의 꿈은 제 마음의 번뇌가 어느 정도 없어진 것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일단 마음이
열리고 나니까 생활이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걸핏하면 식구들을 들들
볶고 못살게 하던 성격도 누그러졌고 하나부터 열까지 주위 사람들에게
의존하던 버릇도 없어졌습니다. 무엇보다도 성격이 적극적으로 변하게
된 것이 고마웠습니다.


우선 건강을 회복하는
일이 우선이라고 생각하고는 수지침을 사다가 공부했습니다. 의사들이
못 고친다면 내 손으로 고치리라 그런 각오로 매일 두 번씩 양손에 수지침을
놓기 시작한 1달 후 풍선 같던 얼굴의 부기가 빠지고 걷기도 수월해졌고
1년 뒤에는 완전 정상으로 돌아오게 되었고 건강이 회복되자 절에 나가
백일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처음엔 아직 마음에
때가 남아 어서 취직이 되어 부모님 부담 덜어드리게 해달라고 빌었습니다.
백일이 지나고 반년이 지나도 아무런 변화가 없었습니다. 다시 백일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세 번째 백일 기도를 시작할 무렵 제 나이 서른다섯
살이 되었습니다. 세상은 너무 빨리 변해갔고 취직하기엔 너무 많은
나이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마음은 조급하지 않았습니다. 세 번째 백일 기도가 끝나갈 무렵에는
모든 욕심이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모든 것은 인과응보로 이루어지는
것 어차피 내가 받아야 할 벌이라면 기꺼이 받으리라 이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그렇게 편할 수가 없었습니다.


드디어 백일 기도가
끝나는 날, 저는 부처님께 염원 대신 감사의 기도를 올렸습니다. 부처님은
가장 훌륭한 의사처럼 고통 속에 허덕이는 저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시고
세상에 둘도 없는 명약인 긍정적인 생각과 희망을 주셨습니다.


그 후에도 시련은 그치지
않았습니다.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신 아버지께서 주식투자와 보증으로
많은 돈을 잃게 되었고 우리 식구는 지방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습니다.
38년간을 서울에서만 살아온 저로서는 참으로 힘든 나날이 시작되었습니다.


서울 사람들의 가로
세로 반듯하게 줄그어진 생활태도로 보면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을
하루에도 몇 번씩 겪게 되었습니다.


슈퍼에서 계산하려고
줄서 있다가 잠깐 한눈 팔면 물건이 하나씩 없어졌습니다. 주인은 앞
손님이 집어들고 계산하고 갔다고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며 가게 문을
나서는 내 뒤통수에 대고 서울 사람은 빡빡하다고 해댔습니다. 이에
맞장구치듯 웃어대는 동네 사람들의 웃음 소리는 오랫동안 내 머리 속에서
웅웅거렸습니다.


또 창문을 마주한 앞집
젊은이들은 아침 먹기가 무섭게 라디오 볼륨을 최고로 틀어댔습니다.
조용히 해달라는 요구에 처음에는 5분 정도는 줄여주더니 그나마 나중에는
나의 간절한 부탁에 아예 귀머거리 시늉으로 일관했으니 처음 두세 달은
지옥 같은 나날이 계속되었습니다.


동네 사람들이 사나우니
저도 거칠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부모님이 원망스러웠고 밥 먹는 것조차
싫었습니다. 차츰 얼굴에서 생기가 사라졌고 다시 자리에 눕는 날이
많아졌습니다.


얼마를 그렇게 지냈을까,
하루는 라디오 소리 때문에 동생 방으로 옮겨가 누워있는데 열린 창문으로
파란 하늘이 보였습니다.


서울에서 볼 때처럼
시리도록 파란 하늘이었습니다. 문득 반야심경의 색즉시공 공즉시색
구절이 생각났습니다. 사물의 본체는 공(空) 그대로인데 보는 눈에 따라
색(色)을 만들어낸다라는 것 말입니다. 저 하늘은 어디에서나 변함없이
똑같은 것이듯 사람들도 이곳 저곳의 사람 마음이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날부터 저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습니다.


수퍼에서 또 그런 일을
당해도 느긋한 마음으로 다시 물건을 들고 올 줄도 알게 되었고 라디오
크게 틀고 듣는 것이 유일한 취미인 사람들을 위해 방을 비워주는 아량도
생겼습니다. 제가 이 동네로 이사온 것이 첫 번째 피할 수 없는 화살이었다면
이웃과의 불화는 피할 수 있는 두 번째 화살이었습니다. 부처님의 말씀을
배워가며 저는 이렇듯 정신적으로 성장해가고 있었던 겁니다.


마음 속 번뇌를 치우고
나니 다시 그 자리에 지혜가 찾아 왔습니다. 어느 날 신문을 보던 나는
완전히 포기하고 있던 교사 임용고시에 도전해 보고싶다는 생각을 한
것입니다. 사실 제 전공인 중국어는 교육부 담당자와의 직접통화에서
확인했듯 선발 전례도 없고 가능성도 없는 과목이었습니다. 그런데 94년
당시 신문을 보니 중국과의 교류가 상당히 진전되어 중국어 하는 사람이
필요할 것 같았습니다.


이에 저는 만용에 가까운
용기를 내었습니다. 당시 제 나이 39세 대학을 졸업한 지 15년 만에
저는 다시 전공 책을 들었습니다.


그 해 8월의 더위는
참으로 지독했습니다. 라디오 소리를 피해 이 방 저 방으로 옮겨가면서도
얼음 그릇과 타올은 항상 갖고 다녔습니다. 낮과 밤을 이어 공부하다
창 밖이 훤해지면 식구들 몰래 현관문을 열고 옥상에 올라가 해가 뜨는
것을 지켜 보았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불 속에 있는데 제대로
드러누울 시간조차 없는 나, 나는 왜 다른 사람들처럼 살 수 없는가요?
물론 부처님은 대답해주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해가 솟아오르고
나면 저도 마음을 추스리고 책상을 마주하고 있으리라는 것을 알고 계셨을
것입니다.


그렇게 공부해서 교단에
선 지 벌써 5년이 다 되어갑니다. 많은 사람들이 제 이야기를 듣고는
물어봅니다. 그 과목이 나올지 어떻게 알고 준비하셨어요? 제 대답은
간단합니다.


“신심 깊은 사람은
바위도 옮길 수 있답니다.”저는 매일 아침 4시 반에 일어납니다. 일어나
제일 먼저 하는 일은 창문을 열고 신선한 공기 속에서 금강경을 읽고
나서 마음을 가다듬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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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 어제 하루
지혜롭게 보내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도 저의 귀엽고 착한 학생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지켜봐 주시옵소서.”


제 얘기를 아는 사람들은
기적 같다고들 말합니다. 그러나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기적이야
안 될 것을 되게 하는 것이지만 부처님의 법 안에서는 처음부터 모든
것이 구족하여 안 되는 것이 없으니까요.


만약 그 때 백일 기도
중에 부처님께서 제 하소연을 들어주셨다면 저는 아마 조그만 일에도
쪼르르 달려와 백일 기도를 올리는 백일 기도 중독자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제가 업으로 지어놓은 일을 제 힘으로 해결할 생각은 않고 엉뚱하게
부처님에게 해결시켜 달라고 조르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부처님 법 근처에도
못 간 채 생을 마감하게 되었을 것을 생각하니 다시금 부처님의 은혜에
고개가 숙여집니다.


가끔 지하철에서 걸인을
봅니다. 많은 사람들이 걸인들 바구니에 돈을 던져줍니다. 구걸하는
그들에게 돈을 쥐어주는 것이 과연 그들을 위한 것이까요? 아닙니다.
그것은 그 걸인들로 하여금 평생토록 거지로 살아가라고 교육하는 거나
다름없습니다. 진정으로 그들을 사랑한다면 그들에게 우선 당장은 힘이
들더라도 보다 나은 미래를 꾸려나갈 수 있도록 평생 동안 쓸 수 있는
가치있는 기술을 가르쳐 주어야만 합니다.


부처님은 저에게 평생
쓸 수 있는 기술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인욕과 지혜, 그리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 인생 항로에 있어 이보다 더 훌륭한 기술이 또 있을까요?앞자리
보살님의 흐느낌이 잦아들었습니다. 그 얄팍한 어깨를 향해 나지막히
말해 봅니다.


보살님, 그 어떠한
번뇌도 부처님의 진리 밭에 뿌리를 내릴 수 없듯이 제 아무리 큰 슬픔이라도
마음 속 지혜의 거울에는 모습을 비출 수 없답니다. 눈물이 나고 큰
소리로 울고 싶을 때는 옆에서 같이 눈물을 흘리고 계시는 부처님을
상상해보세요. 당신이 슬퍼하면 부처님은 더 슬퍼하신답니다. 왜냐구요?
보살님을 사랑하시니까요. 저는 확신합니다. 부처님의 보이지 않는 사랑
속에서 보살님도 곧 슬픔의 눈물이 아닌 감사의 눈물을 흘리게 되리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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