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정법어 -창조적인 인생을 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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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가람지기 작성일14-02-14 16:11 조회3,764회 댓글0건본문
창조적인 인생을 삽시다.
무여 큰스님
1
존경하는 축서사 신도 여러분! 불기 2558(2014)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다사다난했던 지난해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희망찬 갑오년 새 날이 밝았습니다.
12간지로 말띠의 새해를 맞이하여 신도 여러분의 가정에 부처님의 자비광명이 가득하여, 말이 호쾌한 기상으로 생동감 있게 달리듯이 온 가족이 건강하고 하시는 일이 잘 돼서, ‘쾌주’하고 ‘도약’하는 뜻 깊은 해가 되기를 빌겠습니다.
금년은 청마(靑馬)의 해라고 합니다. 힘과 속도를 상징하는 말 중에서 가장 진취적이고 활달한 말이라고 합니다. 새해 인등을 환하게 밝히시고 가정의 안위를 위한 산림기도를 지극하고 간절하게 하셔서 말처럼 달려 보십시오. 말이 탄탄한 몸매에 탄력있는 근육을 자랑하며 쩌렁쩌렁한 포효(咆哮)를 내며 광활한 들판을 달리듯이 열심히 뛰고 힘껏 노력하여 알차고 보람있는 한 해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2
존경하는 축서사 신남신녀 여러분!
이번 호의 법문은 ‘창조적인 인생을 삽시다’라는 제목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옛날에 어떤 노스님이 사미승을 데리고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마침 도살장 앞을 지나는데, 한 사람이 큰 황소를 몰고 도살장을 들어가려고 하니 소가 버티고 안 가려고 하였습니다. 소 임자가 코를 잡고 끌어당겨도 오히려 소는 뒷걸음질만 쳤습니다. 얼마 뒤에 백정 몇 사람이 나와 앞에서 코를 당기고 뒤에서 몽둥이로 때리면서 날카로운 칼로 엉덩이를 찌르니 소는 눈물을 철철 흘리면서 골짜기가 떠나갈 듯 소리를 지르면서 끌려 들어갔습니다.
이 광경을 본 노스님이 사미승에게 말합니다.
“사미야, 저 소가 스님의 후신이다. 출가하여 수행은 않고 놀기만 하며 온갖 불평만 늘어놓으며 악업만 짓더니 황소 몸을 받아 죗값을 톡톡히 하는구나. 일생동안 죽을 고생을 하며 전생의 빚을 갚더니, 그것도 모자라서 몸뚱이까지 바치는 신세가 되었구나. 그 업 은 누구도 어찌할 수가 없단다. 너도 공부가 안 되고 게으른 생각이 날때는 저 끌려가는 불쌍한 소를 생각하여라.”
젊은 시절 어떤 선사로부터 이 이야기를 듣고 콧등이 시큰했던 기억이 납니다.
부처님께서는 “모든 중생의 지은 바 업은 비록 백천겁을 지날지라도 또한 없어지지 않나니 인연이 일시에 화합하면 과보가 따라 응해서 스스로 마땅히 받는다.”고 했습니다.
인과는 철칙입니다. 한 치의 어긋남도 없는 것입니다. 화엄경에서 말씀하시기를 “온갖 중생들은 제 번뇌로 지어진 업에 의해 그 몸과 사는 세계를 스스로 만들어간다. 하나하나 제 몸과 사는 세계와 수용해지니는 것을 스스로 이루는 것이 업을 제쳐놓고는 다른 무엇이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3
중생들이 살아가는 업의 바다에는 삼계와 육도라는 광활한 세계가 펼쳐져 있습니다. 이 삼계육도는 진리를 깨치지 못한 미혹한 중생들이 윤회하는 괴로운 세상입니다.
우리 인간을 비롯한 중생들은 과연 어떤 원인에 의해서, 어떤 힘에 의해서 삼계육도를 윤회하면서 갖은 고통을 다 받게 되고, 또 극락정토에 태어나 즐거운 삶을 살게 되는 것일까? 또 같은 인간으로 태어나서도 어떤 사람은 행복한 삶을 사는가 하면, 어떤 이는 불행한 삶을 살아가고, 또 어떤 사람은 건강한데 그렇지 못한 사람이 존재하는 등 이와 같은 차별현상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요?
모든 중생들은 자기의 업으로 인하여 자기의 몸뚱이와 사는 세계까지 만들어 갑니다. 업 이외에 그 어떤 것도 중생의 세계를 만들 수 없습니다. 그리하여 [숫타니파타]에서는 “세계는 업에 따라 존재하고 사람 또한 업에 따라 존재한다. 수레바퀴가 쒜기에 얽혀져 굴러가듯이 생존하는 모든 것은 업에 속받당하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세계나 존재는 업을 떠날 수 없습니다. 생존하는 모든 것은 업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것이 중생계입니다.
그럼 업이란 무엇인가?
업은 범어 카르마를 뜻으로 번역한 말인데 말과 행동, 뜻으로 행하는 일체의 행위가 업입니다.
즉, 몸과 마음의 일체 행동이 업입니다. 단지 육체적으로 표현된 행동만이 아니라 우리가 마음속으로 어떤 생각만 해도, 그것만으로도 업이 되는 것입니다. 이를 크게 셋으로 나누면 몸과 입과 뜻의 업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이를 신업, 구업, 의업이라고 하여 신구의 삼업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행하는 업이 도덕적으로 선이냐, 악이냐에 따라서 선업과 악업으로 구분하기도 하고, 또 그 행위의 주체나 과보가 개인에게만 한정되는 경우와 여럿인 경우에 따라서 별업과 공업으로 구분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들 모든 업은 몸과 입과 뜻의 삼업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습니다. 이 삼업을 세분하면 열 가지가 되고 십업이라고 하는데, 이 업시 선한 업이면 십선업, 악한 방향으로 나가면 십악업이 되는 것입니다.
사후의 세계도 삼악도냐, 아니면 삼선도냐 하는 것은 어떤 주재자가 있거나 교통정리 하는 사람이 있어서가 아니라 바로 이 열가지 업이 선업쪽에 기울어져 있느냐, 아니면 그 반대로 속하느냐에 따라 이정표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인생이란 스스로 만들어 가는 줄 알아서 스스로 창조하는 인생이 되도록 해야겠습니다.
옛날 어느 나라에 선광이라는 공주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총명하고 용모가 단정하여 부모들이 귀여워하고 궁중에서도 다들 사랑스럽게 여겼습니다.
어느 날 왕이 공주에게 말했습니다.
“공주는 이 아버지의 힘을 입어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과 귀염을 받는구나.”
공주는 의외의 대답을 합니다.
“저는 아버지의 힘을 입어서가 아니라 내게 그럴 만한 복의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
왕은 이 말을 듣고 화를 벌컥 내면서 말합니다.
“너한테 그럴 만한 복업의 힘이 있는지를 어디 한번 시험해 보자.”
그리고는 신하들에게 명령했습니다.
“ 이 성안에서 가장 헐벗고 굶주리는 거지를 한 사람 데려 오너라.”
신하들은 왕명을 받고 가장 가난한 거지 한 사람을 데리고 왔습니다. 왕은 딸 선광을 거지에게 주면서 말했습니다.
“어디 네 복업의 힘 때문인지 아닌지 두고 보면 알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선광은 “제가 지어놓은 복업 때문이죠”하며 거지를 따라 왕궁을 떠났습니다.
그녀는 왕궁을 나와 거지 남편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에게 부모님이 계세요?”
거지는 대답합니다.
“우리 아버지는 전에 이 성안에서 손꼽히는 부자였는데, 양친이 모두다 돌아가시고 나서는 의지할 곳이 없어 이렇게 거지 신세가 되었소.”
그녀는 다시 물었습니다.
“당신은 예전의 그 집터를 아시나요?”
“터야 알지만 지금은 집도 담장도 다 허물어져 빈터만 남아 있지요.”
그녀는 남편을 데리고 옛 집터를 찾아가 여기 저기 살펴보았습니다, 이때 구석진 흙더미 속에서 반짝거리는 것이 있었습니다. 흙을 헤치고 보니 그것은 보물 상자였습니다.
그녀는 그것을 팔아 그 터에 집을 새로 짓고 세간에 하인과 종들을 두루 갖추고 호화롭게 살았습니다.
왕은 어느 날 딸 선광이 문득 생각났습니다.
“내 딸은 그 동안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하구나.”
곁에 있던 신하가 아뢰었습니다.
“집과 재물이 왕궁 못지 않습니다.”
왕은 감탄하여 말했습니다.
“과연 세존 말씀에는 거짓이 없구나. 제가 선악을 지어 스스로 그 갚음을 받는다더니.”
딸은 남편을 궁중으로 보내어 왕을 자기 집으로 초대하였습니다.
왕은 딸이 사는 집에 가보고 선광의 말이 옳은 줄 새삼스럽게 느끼게 되었습니다. 왕은 부처님을 찾아가 물었습니다.
“제 딸은 전생에 무슨 복업을 지었기에 왕가에 태어나 몸에서 빛이 납니까?
부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과거 비바시부처님이 계실 때 반두라는 왕이 있었고, 비바시부처님이 열반에 든 뒤 그 왕은 탑을 세워 부처님의 사리를 공양했고, 왕비는 비바시부처님의 동상을 조성하고 이렇게 발원했었소. ‘이 다음 세상에 내 몸에서는 금빛 광명이 나고 부귀를 누리면서 삼도와 팔난을 만나지 않게 하여지이다.’
왕이여, 그때의 왕비가 바로 오늘의 선광입니다. 그리고 가섭 부처님때에 부처님과 제자들에게 맛있는 음식을 공양하는데 남편이 들어와 그것을 만류하려 하였소. 그 때의 그 남편이 오늘의 저 남편입니다. 남편은 아내의 공양을 만류한 인연으로 항상 가난하게 살다가 다시 공양을 허락했기 때문에 그 인연으로 아내 덕으로 부유하게 된 것이오. 그러나 아내가 떠나면 다시 가난해질 것입니다.“
이와 같이 선악의 업이 몸에 그림자처럼 따라 다시는 것은 조금도 어긋남이 없습니다.
4
존경하는 선남선녀 여러분!
지은 바 업은 이렇게 분명하게 확실하게 다가옵니다. 업이 인과 연이 모여 성숙하면 그 때는 떨어지는 폭포수처럼, 도도하게 흐르는 강물처럼 막을 수가 없습니다.
오래전에 불탑을 조성하고 사리를 공양하며 발원한 공덕으로 오늘의 선광이 되었고, 남편은 부처님과 대중께 드리는 공양을 만류한 결과로 가난뱅이 거지 신세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인생을 참으로 심각하게 생각하고 미래지향적이며 창조적인 인생을 살아가려면 일상생활 속에서도 말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까지도 예사롭게 않게 십선업을 닦아야 합니다.
첫째, 신업을 잘 닦아야 합니다. 신업은 우리가 몸으로 짓는 일체의 행위를 말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살생하지 말고 도둑질하지 말고, 삿된 음행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산목숨을 죽이지 말아야 합니다. 스스로 죽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남을 시켜서 죽이지고 말고 죽이는 인연도 만들지 않아야 합니다. 살생을 금하는 것은, 생명은 무엇보다 고귀하고 소중한 것이기 때문에 죽이는 것은 큰 죄악이 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사람의 목숨만 귀중하게 여기지만 어떤 생명체라고 내 몸처럼 존중하고 보호해야 합니다.
살생은 자비종자를 없애기 때문입니다. 불살생을 강조하는 것은 남을 사랑하고 도와주는 자비심을 일깨우기 위함입니다. 그리하여 [법구경]에서는 “보살은 어머니가 목숨을 걸고 외아들을 아끼고 보호하듯이 모든 생명있는 것에 대하여 한량없는 자비심을 내야 한다.”고 하였으며, “자비한 눈으로 중생을 본다면 복덩어리는 바다와 같이 무량하다.”고 하였습니다.
남의 것은 훔치지 말고, 남을 시켜 훔치거나 수단을 써서 훔치지도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바늘 하나 풀 한포기라도 남이 주지 않는 것은 가지지 않아야 합니다. 불자는 항상 깨끗하고 공경하는 마음으로 보시하기를 좋아할지언정 옳지 못한 물건을 갖지 말아야 합니다.
훔친 물건은 자연스럽게 떠나게 되고, 훔친 사람은 가난하게 됩니다.
훔치는 것을 끊지 않고 마음을 닦는 것은 새는 항아리에 물을 부으면서 가득차기를 바라는 것과 같습니다.
삿된 음행을 말아야 합니다. 출가자에게는 성행위 자체를 금하고, 재가자에게는 자기의 처첩이 아닌 다른 여성과 삿된 음사를 하는 등 문란한 성관계를 말라는 것입니다.
삿된 음행을 강조하는 것은 중생의 음행은 모든 기멸심(起滅心을) 조장하고 번뇌의 뿌리가 되어 해탈을 방해하기 때문입니다. 청정하지 못한 행위는 밝은 마음을 어둡게 만들고, 어둡고 탁한 마음은 결국 생사윤회의 씨앗이 됩니다.
둘째, 구업을 짓지 말아야 합니다. 구업에는 망어, 악구, 양설, 기어 등 네 가지가 있습니다.
망어란 거짓말입니다. 거짓말이란 거짓이 말 속에 들어있고 허황된 말을 일컫습니다. 실제로 있는 것을 없다하고 없는 것을 있다고 말하는 것과 같이, 바른 법을 그른 법이라하고 그른 법을 바른 법이라 설명하는 등 마음을 어겨서 하는 말입니다.
입을 열었다 하면 바른 말을 하고 진실한 말을 할 것이지 허황되고 거짓된 말은 말아야 합니다.
악구란 악한 말, 험한 말로써 남을 욕하고 분노케 하며 저주하는 말로써 상대로 하여금 견디기 어렵게 하는 등의 폭언이 여기에 속합니다. 양설슨 두 가지 말을 하는 것입니다. 양쪽에 다니며 서로 다른 말로 다투게 하고 이간시키는 말입니다.
기어는 교묘하게 잘 꾸며대는 말입니다. 묘하게 수식하여 비단결처럼 번지르르하게 겉과 속이 다른 말로써 남이 듣기 좋게 화사하게 하는 말입니다.
구업은 짓지 말아야 합니다. 입에서 악취가 나고, 바른 말을 하더라도 믿지 않으며, 항상 비방을 당하고 더러운 소문이 퍼집니다. 뿐만아니라 사람들의 공경을 받지 못하며, 언제나 근심 걱정이 많고, 죽으면 나쁜 세상에 태어나게 됩니다.
셋째, 의업은 뜻으로 짓는 업으로서 탐욕, 성냄, 어리석음 등 세 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의업은 생각으로 짓는 업이라고 해서 사업이라 하고, 눈에 보이지 않으므로 무표업이라고도 하지만 삼업 중에서 가장 중요한 업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지혜를 어둡게 하는 가장 기본적인 번뇌로서 중생을 해치는 것이 마치 독사나 독룡과 같다고 하여 삼독심이라고 합니다.
탐욕은 자기의 분수에 넘치게 외경을 욕심내어 만족할 줄 모르고 탐애하고 탐착하며 욕망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성냄은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에 대하여 미워하고 분한 마음을 내는 것입니다. 무명 또는 무지와도 통하는 말입니다.
어리석음은 삼라만상의 이치와 도리에 대하여 어두운 것을 말합니다. 사물의 진상을 알지 못하고, 연기의 도리에 대하여 어두운 것을 말합니다. 사물의 진상을 알지 못하고, 연기의 도리에 대하여 알지 못한다면서 답답하게 온갖 잘못을 저지르는 것을 말합니다.
현대인은 탐진치 삼독심이 치성하게 살아납니다.
어떤 사람은 탐욕과 야망을 혼돈하여 탐욕 없이는 성공도 출세도 할수 없다는 주장도 서슴지 않습니다. 탐진치를 다스리지 못하면 바른 생각도 할수 없고 올바르게 살아갈 수도 없습니다. 욕심이 없는 상태에서 분노가 일지 않는 고요한 마음에서 어리석음이 가신 지혜에 의해서 현실에 일어나는 갖가지 일을 판단하고 결정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매우 훌륭하다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불교에서 탐진치를 멸하고자 출가를 권유하고 수행을 하는 것은 그런 인격의 경지를 소유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세 가지를 마음대로 조절 할 수 있는 자만이 인간의 제반 문제를 판단할 수 있는 훌륭한 인격자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5
존경하는 축서사 신도 여러분!
이상의 열 가지를 십업이라 합니다. 이 열 가지를 선하게 행하여 보시하며 부드러운 말로 대중의 화합을 도모하고 넉넉한 마음과 바른 소견을 가지고 살아가면 십선업이 됩니다.
그러나 반대로 산 생명을 예사롭게 죽이고 남의 것을 부끄러움도 없이 가지며 이성관계가 복잡하며 불자답지 않게 막말과 거짓말을 하며 어리석게도 탐욕에 빠져 있으면 십악업이 됩니다.
이처럼 우리가 평소에 살면서 무심히 행하는 행동이나 생각들이 결국근 업이 되어 생사윤회의 원동력이 됩니다. 마치 자동차가 휘발유를 연료로 하여 굴러가듯이 중생은 업의 원인으로 생사윤회의 고통을 받는 것입니다.
이 업에는 반드시 과보가 따릅니다. 지난 세월에 지은 업의 과보가 오늘의 현실이요, 오늘 지은 업의 과보가 미래에 맞이할 새로운 환경이 됩니다.
그래서 업을 업인이라고도 하는데, 아무리 사소한 업이라도 결코 아무런 결과를 짓지 않고 저절로 없어져 버리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비록 현세에서는 아무런 과보를 받지 않고 무사히 넘어가는 경우라 하더라도 다음 생에는 반드시 그 과보를 받는 것입니다. 또한 금생에 우리가 현실적으로 받는 과보는 단지 금생에 지은 업의 결과만이 아니라 과거생의 것도 많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열반경]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온갖 중생이 받은 고락의 과보 모두가 현세의 업 때문인 것은 아니며, 그 원인이 과거에도 있었음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현세에 있어서 인을 짓지 않는다면 미래에 받아야 할 과도 없을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아무런 업도 짓지 않고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진리를 깨달아 법답게 사는 경우에 불보살의 삶이 아니고는 업을 짓게 되고 이에는 필연적으로 과보가 따릅니다.
내생에 잘 태어나고 보다 나은 삶을 누리고자 한다면 가능한 한 악업을 짓지 않고 선업을 짓는 도리밖에 없습니다.
극락세계 지옥세계도 분명히 존재합니다. 그러나 그 지옥도 극락도 부처님이나 어느 신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니요, 바로 우리들의 업력이 만든 것이고, 그 누구의 힘으로 극락행과 지옥행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지은 업의 과보에 의해 스스로 가서 태어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업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이 업은 단지 이승과 저승, 생사윤회에만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생활 모든 분야에서 작용하고 있습니다.
존경하는 불자 여러분!
우리는 매일 하루하루를 주인공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스스로 일하고 벌어서 스스로 먹고 생활하고 있습니다. 잘 살아도 내 탓이요, 못 살아도 내 탓입니다. 우리 삶의 모습이 차등이 있는 것은 결코 그 누구의 탓도 아닙니다. 오직 자신이 지은 업력에 의한 과보일 뿐입니다.
일체 만물이 갖가지 모습으로 생성하고 괴멸하는 데는 인과관계에 말미암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속담에도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난다.’하였으며,
‘덕은 닦은 대로 가고 죄는 지은 대로 간가.’고 했습니다. 어떠한 일에도 일어난 원인이 있으며 그 원인에 따라 결과가 생깁니다.
우리의 행위에 따라 좋은 업인을 뿌리면 좋은 열매가 맺어지고 나쁜 업인에는 악의 과보가 따릅니다.
사람이 어질고 착한 일을 하면 자연스럽게 복을 받게되고 나쁜 짓을 하면 상당한 죄과를 받게 됩니다. 인과는 조금도 어김이 없는 철칙입니다.
우리 다 같이 내 자신이 내 인생의 주인공이요, 행복과 불생, 삶과 죽음까지도 내가 지은 업 때문이며, 일상의 삶 속에서도 인과 법칙이 항상 존재한다는 사실을 다시한번 상기합시다.
그리하여 스스로 자기 인생의 주재자가 되어 괴로운 삶을 과감히 단절하고 즐겁고 보람된 생활을 하여 영원을 살아갈 수 있는 올바른 불자가 됩시다.
업, 인과, 인연, 응보도 넘어야 할 산
자신을 던져 산 정상을 쳐부수고
광명으로 세상사를 쓸어버리고 나니
달빛은 희게 비치고 바람은 차갑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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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여 큰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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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경하는 축서사 신도 여러분! 불기 2558(2014)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다사다난했던 지난해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희망찬 갑오년 새 날이 밝았습니다.
12간지로 말띠의 새해를 맞이하여 신도 여러분의 가정에 부처님의 자비광명이 가득하여, 말이 호쾌한 기상으로 생동감 있게 달리듯이 온 가족이 건강하고 하시는 일이 잘 돼서, ‘쾌주’하고 ‘도약’하는 뜻 깊은 해가 되기를 빌겠습니다.
금년은 청마(靑馬)의 해라고 합니다. 힘과 속도를 상징하는 말 중에서 가장 진취적이고 활달한 말이라고 합니다. 새해 인등을 환하게 밝히시고 가정의 안위를 위한 산림기도를 지극하고 간절하게 하셔서 말처럼 달려 보십시오. 말이 탄탄한 몸매에 탄력있는 근육을 자랑하며 쩌렁쩌렁한 포효(咆哮)를 내며 광활한 들판을 달리듯이 열심히 뛰고 힘껏 노력하여 알차고 보람있는 한 해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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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경하는 축서사 신남신녀 여러분!
이번 호의 법문은 ‘창조적인 인생을 삽시다’라는 제목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옛날에 어떤 노스님이 사미승을 데리고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마침 도살장 앞을 지나는데, 한 사람이 큰 황소를 몰고 도살장을 들어가려고 하니 소가 버티고 안 가려고 하였습니다. 소 임자가 코를 잡고 끌어당겨도 오히려 소는 뒷걸음질만 쳤습니다. 얼마 뒤에 백정 몇 사람이 나와 앞에서 코를 당기고 뒤에서 몽둥이로 때리면서 날카로운 칼로 엉덩이를 찌르니 소는 눈물을 철철 흘리면서 골짜기가 떠나갈 듯 소리를 지르면서 끌려 들어갔습니다.
이 광경을 본 노스님이 사미승에게 말합니다.
“사미야, 저 소가 스님의 후신이다. 출가하여 수행은 않고 놀기만 하며 온갖 불평만 늘어놓으며 악업만 짓더니 황소 몸을 받아 죗값을 톡톡히 하는구나. 일생동안 죽을 고생을 하며 전생의 빚을 갚더니, 그것도 모자라서 몸뚱이까지 바치는 신세가 되었구나. 그 업 은 누구도 어찌할 수가 없단다. 너도 공부가 안 되고 게으른 생각이 날때는 저 끌려가는 불쌍한 소를 생각하여라.”
젊은 시절 어떤 선사로부터 이 이야기를 듣고 콧등이 시큰했던 기억이 납니다.
부처님께서는 “모든 중생의 지은 바 업은 비록 백천겁을 지날지라도 또한 없어지지 않나니 인연이 일시에 화합하면 과보가 따라 응해서 스스로 마땅히 받는다.”고 했습니다.
인과는 철칙입니다. 한 치의 어긋남도 없는 것입니다. 화엄경에서 말씀하시기를 “온갖 중생들은 제 번뇌로 지어진 업에 의해 그 몸과 사는 세계를 스스로 만들어간다. 하나하나 제 몸과 사는 세계와 수용해지니는 것을 스스로 이루는 것이 업을 제쳐놓고는 다른 무엇이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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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생들이 살아가는 업의 바다에는 삼계와 육도라는 광활한 세계가 펼쳐져 있습니다. 이 삼계육도는 진리를 깨치지 못한 미혹한 중생들이 윤회하는 괴로운 세상입니다.
우리 인간을 비롯한 중생들은 과연 어떤 원인에 의해서, 어떤 힘에 의해서 삼계육도를 윤회하면서 갖은 고통을 다 받게 되고, 또 극락정토에 태어나 즐거운 삶을 살게 되는 것일까? 또 같은 인간으로 태어나서도 어떤 사람은 행복한 삶을 사는가 하면, 어떤 이는 불행한 삶을 살아가고, 또 어떤 사람은 건강한데 그렇지 못한 사람이 존재하는 등 이와 같은 차별현상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요?
모든 중생들은 자기의 업으로 인하여 자기의 몸뚱이와 사는 세계까지 만들어 갑니다. 업 이외에 그 어떤 것도 중생의 세계를 만들 수 없습니다. 그리하여 [숫타니파타]에서는 “세계는 업에 따라 존재하고 사람 또한 업에 따라 존재한다. 수레바퀴가 쒜기에 얽혀져 굴러가듯이 생존하는 모든 것은 업에 속받당하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세계나 존재는 업을 떠날 수 없습니다. 생존하는 모든 것은 업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것이 중생계입니다.
그럼 업이란 무엇인가?
업은 범어 카르마를 뜻으로 번역한 말인데 말과 행동, 뜻으로 행하는 일체의 행위가 업입니다.
즉, 몸과 마음의 일체 행동이 업입니다. 단지 육체적으로 표현된 행동만이 아니라 우리가 마음속으로 어떤 생각만 해도, 그것만으로도 업이 되는 것입니다. 이를 크게 셋으로 나누면 몸과 입과 뜻의 업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이를 신업, 구업, 의업이라고 하여 신구의 삼업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행하는 업이 도덕적으로 선이냐, 악이냐에 따라서 선업과 악업으로 구분하기도 하고, 또 그 행위의 주체나 과보가 개인에게만 한정되는 경우와 여럿인 경우에 따라서 별업과 공업으로 구분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들 모든 업은 몸과 입과 뜻의 삼업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습니다. 이 삼업을 세분하면 열 가지가 되고 십업이라고 하는데, 이 업시 선한 업이면 십선업, 악한 방향으로 나가면 십악업이 되는 것입니다.
사후의 세계도 삼악도냐, 아니면 삼선도냐 하는 것은 어떤 주재자가 있거나 교통정리 하는 사람이 있어서가 아니라 바로 이 열가지 업이 선업쪽에 기울어져 있느냐, 아니면 그 반대로 속하느냐에 따라 이정표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인생이란 스스로 만들어 가는 줄 알아서 스스로 창조하는 인생이 되도록 해야겠습니다.
옛날 어느 나라에 선광이라는 공주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총명하고 용모가 단정하여 부모들이 귀여워하고 궁중에서도 다들 사랑스럽게 여겼습니다.
어느 날 왕이 공주에게 말했습니다.
“공주는 이 아버지의 힘을 입어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과 귀염을 받는구나.”
공주는 의외의 대답을 합니다.
“저는 아버지의 힘을 입어서가 아니라 내게 그럴 만한 복의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
왕은 이 말을 듣고 화를 벌컥 내면서 말합니다.
“너한테 그럴 만한 복업의 힘이 있는지를 어디 한번 시험해 보자.”
그리고는 신하들에게 명령했습니다.
“ 이 성안에서 가장 헐벗고 굶주리는 거지를 한 사람 데려 오너라.”
신하들은 왕명을 받고 가장 가난한 거지 한 사람을 데리고 왔습니다. 왕은 딸 선광을 거지에게 주면서 말했습니다.
“어디 네 복업의 힘 때문인지 아닌지 두고 보면 알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선광은 “제가 지어놓은 복업 때문이죠”하며 거지를 따라 왕궁을 떠났습니다.
그녀는 왕궁을 나와 거지 남편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에게 부모님이 계세요?”
거지는 대답합니다.
“우리 아버지는 전에 이 성안에서 손꼽히는 부자였는데, 양친이 모두다 돌아가시고 나서는 의지할 곳이 없어 이렇게 거지 신세가 되었소.”
그녀는 다시 물었습니다.
“당신은 예전의 그 집터를 아시나요?”
“터야 알지만 지금은 집도 담장도 다 허물어져 빈터만 남아 있지요.”
그녀는 남편을 데리고 옛 집터를 찾아가 여기 저기 살펴보았습니다, 이때 구석진 흙더미 속에서 반짝거리는 것이 있었습니다. 흙을 헤치고 보니 그것은 보물 상자였습니다.
그녀는 그것을 팔아 그 터에 집을 새로 짓고 세간에 하인과 종들을 두루 갖추고 호화롭게 살았습니다.
왕은 어느 날 딸 선광이 문득 생각났습니다.
“내 딸은 그 동안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하구나.”
곁에 있던 신하가 아뢰었습니다.
“집과 재물이 왕궁 못지 않습니다.”
왕은 감탄하여 말했습니다.
“과연 세존 말씀에는 거짓이 없구나. 제가 선악을 지어 스스로 그 갚음을 받는다더니.”
딸은 남편을 궁중으로 보내어 왕을 자기 집으로 초대하였습니다.
왕은 딸이 사는 집에 가보고 선광의 말이 옳은 줄 새삼스럽게 느끼게 되었습니다. 왕은 부처님을 찾아가 물었습니다.
“제 딸은 전생에 무슨 복업을 지었기에 왕가에 태어나 몸에서 빛이 납니까?
부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과거 비바시부처님이 계실 때 반두라는 왕이 있었고, 비바시부처님이 열반에 든 뒤 그 왕은 탑을 세워 부처님의 사리를 공양했고, 왕비는 비바시부처님의 동상을 조성하고 이렇게 발원했었소. ‘이 다음 세상에 내 몸에서는 금빛 광명이 나고 부귀를 누리면서 삼도와 팔난을 만나지 않게 하여지이다.’
왕이여, 그때의 왕비가 바로 오늘의 선광입니다. 그리고 가섭 부처님때에 부처님과 제자들에게 맛있는 음식을 공양하는데 남편이 들어와 그것을 만류하려 하였소. 그 때의 그 남편이 오늘의 저 남편입니다. 남편은 아내의 공양을 만류한 인연으로 항상 가난하게 살다가 다시 공양을 허락했기 때문에 그 인연으로 아내 덕으로 부유하게 된 것이오. 그러나 아내가 떠나면 다시 가난해질 것입니다.“
이와 같이 선악의 업이 몸에 그림자처럼 따라 다시는 것은 조금도 어긋남이 없습니다.
4
존경하는 선남선녀 여러분!
지은 바 업은 이렇게 분명하게 확실하게 다가옵니다. 업이 인과 연이 모여 성숙하면 그 때는 떨어지는 폭포수처럼, 도도하게 흐르는 강물처럼 막을 수가 없습니다.
오래전에 불탑을 조성하고 사리를 공양하며 발원한 공덕으로 오늘의 선광이 되었고, 남편은 부처님과 대중께 드리는 공양을 만류한 결과로 가난뱅이 거지 신세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인생을 참으로 심각하게 생각하고 미래지향적이며 창조적인 인생을 살아가려면 일상생활 속에서도 말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까지도 예사롭게 않게 십선업을 닦아야 합니다.
첫째, 신업을 잘 닦아야 합니다. 신업은 우리가 몸으로 짓는 일체의 행위를 말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살생하지 말고 도둑질하지 말고, 삿된 음행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산목숨을 죽이지 말아야 합니다. 스스로 죽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남을 시켜서 죽이지고 말고 죽이는 인연도 만들지 않아야 합니다. 살생을 금하는 것은, 생명은 무엇보다 고귀하고 소중한 것이기 때문에 죽이는 것은 큰 죄악이 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사람의 목숨만 귀중하게 여기지만 어떤 생명체라고 내 몸처럼 존중하고 보호해야 합니다.
살생은 자비종자를 없애기 때문입니다. 불살생을 강조하는 것은 남을 사랑하고 도와주는 자비심을 일깨우기 위함입니다. 그리하여 [법구경]에서는 “보살은 어머니가 목숨을 걸고 외아들을 아끼고 보호하듯이 모든 생명있는 것에 대하여 한량없는 자비심을 내야 한다.”고 하였으며, “자비한 눈으로 중생을 본다면 복덩어리는 바다와 같이 무량하다.”고 하였습니다.
남의 것은 훔치지 말고, 남을 시켜 훔치거나 수단을 써서 훔치지도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바늘 하나 풀 한포기라도 남이 주지 않는 것은 가지지 않아야 합니다. 불자는 항상 깨끗하고 공경하는 마음으로 보시하기를 좋아할지언정 옳지 못한 물건을 갖지 말아야 합니다.
훔친 물건은 자연스럽게 떠나게 되고, 훔친 사람은 가난하게 됩니다.
훔치는 것을 끊지 않고 마음을 닦는 것은 새는 항아리에 물을 부으면서 가득차기를 바라는 것과 같습니다.
삿된 음행을 말아야 합니다. 출가자에게는 성행위 자체를 금하고, 재가자에게는 자기의 처첩이 아닌 다른 여성과 삿된 음사를 하는 등 문란한 성관계를 말라는 것입니다.
삿된 음행을 강조하는 것은 중생의 음행은 모든 기멸심(起滅心을) 조장하고 번뇌의 뿌리가 되어 해탈을 방해하기 때문입니다. 청정하지 못한 행위는 밝은 마음을 어둡게 만들고, 어둡고 탁한 마음은 결국 생사윤회의 씨앗이 됩니다.
둘째, 구업을 짓지 말아야 합니다. 구업에는 망어, 악구, 양설, 기어 등 네 가지가 있습니다.
망어란 거짓말입니다. 거짓말이란 거짓이 말 속에 들어있고 허황된 말을 일컫습니다. 실제로 있는 것을 없다하고 없는 것을 있다고 말하는 것과 같이, 바른 법을 그른 법이라하고 그른 법을 바른 법이라 설명하는 등 마음을 어겨서 하는 말입니다.
입을 열었다 하면 바른 말을 하고 진실한 말을 할 것이지 허황되고 거짓된 말은 말아야 합니다.
악구란 악한 말, 험한 말로써 남을 욕하고 분노케 하며 저주하는 말로써 상대로 하여금 견디기 어렵게 하는 등의 폭언이 여기에 속합니다. 양설슨 두 가지 말을 하는 것입니다. 양쪽에 다니며 서로 다른 말로 다투게 하고 이간시키는 말입니다.
기어는 교묘하게 잘 꾸며대는 말입니다. 묘하게 수식하여 비단결처럼 번지르르하게 겉과 속이 다른 말로써 남이 듣기 좋게 화사하게 하는 말입니다.
구업은 짓지 말아야 합니다. 입에서 악취가 나고, 바른 말을 하더라도 믿지 않으며, 항상 비방을 당하고 더러운 소문이 퍼집니다. 뿐만아니라 사람들의 공경을 받지 못하며, 언제나 근심 걱정이 많고, 죽으면 나쁜 세상에 태어나게 됩니다.
셋째, 의업은 뜻으로 짓는 업으로서 탐욕, 성냄, 어리석음 등 세 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의업은 생각으로 짓는 업이라고 해서 사업이라 하고, 눈에 보이지 않으므로 무표업이라고도 하지만 삼업 중에서 가장 중요한 업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지혜를 어둡게 하는 가장 기본적인 번뇌로서 중생을 해치는 것이 마치 독사나 독룡과 같다고 하여 삼독심이라고 합니다.
탐욕은 자기의 분수에 넘치게 외경을 욕심내어 만족할 줄 모르고 탐애하고 탐착하며 욕망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성냄은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에 대하여 미워하고 분한 마음을 내는 것입니다. 무명 또는 무지와도 통하는 말입니다.
어리석음은 삼라만상의 이치와 도리에 대하여 어두운 것을 말합니다. 사물의 진상을 알지 못하고, 연기의 도리에 대하여 어두운 것을 말합니다. 사물의 진상을 알지 못하고, 연기의 도리에 대하여 알지 못한다면서 답답하게 온갖 잘못을 저지르는 것을 말합니다.
현대인은 탐진치 삼독심이 치성하게 살아납니다.
어떤 사람은 탐욕과 야망을 혼돈하여 탐욕 없이는 성공도 출세도 할수 없다는 주장도 서슴지 않습니다. 탐진치를 다스리지 못하면 바른 생각도 할수 없고 올바르게 살아갈 수도 없습니다. 욕심이 없는 상태에서 분노가 일지 않는 고요한 마음에서 어리석음이 가신 지혜에 의해서 현실에 일어나는 갖가지 일을 판단하고 결정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매우 훌륭하다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불교에서 탐진치를 멸하고자 출가를 권유하고 수행을 하는 것은 그런 인격의 경지를 소유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세 가지를 마음대로 조절 할 수 있는 자만이 인간의 제반 문제를 판단할 수 있는 훌륭한 인격자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5
존경하는 축서사 신도 여러분!
이상의 열 가지를 십업이라 합니다. 이 열 가지를 선하게 행하여 보시하며 부드러운 말로 대중의 화합을 도모하고 넉넉한 마음과 바른 소견을 가지고 살아가면 십선업이 됩니다.
그러나 반대로 산 생명을 예사롭게 죽이고 남의 것을 부끄러움도 없이 가지며 이성관계가 복잡하며 불자답지 않게 막말과 거짓말을 하며 어리석게도 탐욕에 빠져 있으면 십악업이 됩니다.
이처럼 우리가 평소에 살면서 무심히 행하는 행동이나 생각들이 결국근 업이 되어 생사윤회의 원동력이 됩니다. 마치 자동차가 휘발유를 연료로 하여 굴러가듯이 중생은 업의 원인으로 생사윤회의 고통을 받는 것입니다.
이 업에는 반드시 과보가 따릅니다. 지난 세월에 지은 업의 과보가 오늘의 현실이요, 오늘 지은 업의 과보가 미래에 맞이할 새로운 환경이 됩니다.
그래서 업을 업인이라고도 하는데, 아무리 사소한 업이라도 결코 아무런 결과를 짓지 않고 저절로 없어져 버리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비록 현세에서는 아무런 과보를 받지 않고 무사히 넘어가는 경우라 하더라도 다음 생에는 반드시 그 과보를 받는 것입니다. 또한 금생에 우리가 현실적으로 받는 과보는 단지 금생에 지은 업의 결과만이 아니라 과거생의 것도 많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열반경]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온갖 중생이 받은 고락의 과보 모두가 현세의 업 때문인 것은 아니며, 그 원인이 과거에도 있었음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현세에 있어서 인을 짓지 않는다면 미래에 받아야 할 과도 없을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아무런 업도 짓지 않고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진리를 깨달아 법답게 사는 경우에 불보살의 삶이 아니고는 업을 짓게 되고 이에는 필연적으로 과보가 따릅니다.
내생에 잘 태어나고 보다 나은 삶을 누리고자 한다면 가능한 한 악업을 짓지 않고 선업을 짓는 도리밖에 없습니다.
극락세계 지옥세계도 분명히 존재합니다. 그러나 그 지옥도 극락도 부처님이나 어느 신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니요, 바로 우리들의 업력이 만든 것이고, 그 누구의 힘으로 극락행과 지옥행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지은 업의 과보에 의해 스스로 가서 태어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업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이 업은 단지 이승과 저승, 생사윤회에만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생활 모든 분야에서 작용하고 있습니다.
존경하는 불자 여러분!
우리는 매일 하루하루를 주인공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스스로 일하고 벌어서 스스로 먹고 생활하고 있습니다. 잘 살아도 내 탓이요, 못 살아도 내 탓입니다. 우리 삶의 모습이 차등이 있는 것은 결코 그 누구의 탓도 아닙니다. 오직 자신이 지은 업력에 의한 과보일 뿐입니다.
일체 만물이 갖가지 모습으로 생성하고 괴멸하는 데는 인과관계에 말미암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속담에도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난다.’하였으며,
‘덕은 닦은 대로 가고 죄는 지은 대로 간가.’고 했습니다. 어떠한 일에도 일어난 원인이 있으며 그 원인에 따라 결과가 생깁니다.
우리의 행위에 따라 좋은 업인을 뿌리면 좋은 열매가 맺어지고 나쁜 업인에는 악의 과보가 따릅니다.
사람이 어질고 착한 일을 하면 자연스럽게 복을 받게되고 나쁜 짓을 하면 상당한 죄과를 받게 됩니다. 인과는 조금도 어김이 없는 철칙입니다.
우리 다 같이 내 자신이 내 인생의 주인공이요, 행복과 불생, 삶과 죽음까지도 내가 지은 업 때문이며, 일상의 삶 속에서도 인과 법칙이 항상 존재한다는 사실을 다시한번 상기합시다.
그리하여 스스로 자기 인생의 주재자가 되어 괴로운 삶을 과감히 단절하고 즐겁고 보람된 생활을 하여 영원을 살아갈 수 있는 올바른 불자가 됩시다.
업, 인과, 인연, 응보도 넘어야 할 산
자신을 던져 산 정상을 쳐부수고
광명으로 세상사를 쓸어버리고 나니
달빛은 희게 비치고 바람은 차갑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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