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에 있어서 믿음은
중요하지만 그 믿음을 실제로 생활에 적용하여 행하는 것 또한 중요하다.
그래서 불교를 믿음과 실천을 겸비한 종교라고 하는 것이다.부처님과
진리(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믿음만 있고 실천이 없는 이론적인 배움은
한갖 허공 중에 그림을 그리려는 것과 마찬가지다. 또한 자신의 참성품을
깨달아 세상을 널리 이롭게 하고자 하는 원력이 없다면, 그 행은 동력이
없는 배와 같아서 노력은 진부하게 되어 크게 나아가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님의
가르침에 의거해서 자신과 현실을 돌아보고, 깊은 신심을 내어 큰 원력을
세우며, 부지런한 실천행이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 자신을 잘 알고
현실에 대한 바른 이해를 통해 나쁜 습관을 바꾸어 바른 삶을 살려고
노력하는 것이 불자의 올바른 신행생활이라 할 수 있다.이번 호에는
참회와 발원과 기도에 대해서 살펴보고, 다음 호에는 불교의 대표적인
수행법인 참선과 염불 수행법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1. 참회(懺悔)
우리는 생활 속에서
의식적, 또는 무의식적으로 많은 죄악과 허물을 짓게 된다. 이러한 죄악과
허물은 대부분 세속적 욕망과 이기심에 의해 생겨난다. 이러한 잘못을
뉘우치고 정화하지 않는다면 불자의 삶은 결코 진리에 다가설 수 없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참회할 것인가?참된 참회는 자기
성품 속에서 죄의 반연을 없애는 것이다. 죄의 반연이란 삼독의 나쁜
인연을 가리킨다. 본래의 청정한 법신을 찾고자 한다면 바로 이 삼독의
악연을 마음 속에서 씻어버려야 하는 것이다.
『육조단경』에서 육조
혜능 스님은 참회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선지식이여, 이것이
무상참회(無上懺悔)이니라.
참(懺)이란 무엇인가.
참이란 지나간 허물을 뉘우침이니, 지금까지 지은 모든 죄를 뉘우쳐서
영원히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회(悔)란 무엇인가. 회란
이후에 짓기 쉬운 허물을 조심하여 다음부터 있을 모든 죄를 미리 깨닫고
영원히 끊어서 다시는 짓지 않도록 하는 것이니 이것을 합하여 참회라
하는 것이니라. 범부들은 어리석어서 지나간 허물을 뉘우칠 줄 모르고
앞으로 있을 허물은 조심할 줄 모르므로, 지나간 죄도 없어지지 않고
새로운 죄가 잇달아 일어나니, 이러고야 어찌 참회라고 할 수 있으랴.”이처럼
참회는 과거의 진실하지 못한 마음으로 알게 모르게 지은 모든 죄업과
잘못을 진심으로 뉘우치고 반성하여 마음 속에 뿌리 깊은 업의 씨앗을
소멸시키는 것이다.
참회에는 이참(理懺)과
사참(事懺)이 있다.
이참은 과거와 현재에
지은 모든 죄업은 마음에서 생긴 것이며, 마음 바깥에서 일어나는 것은
하나도 없음을 관하는 것이다. 즉 자신의 마음이 본래 공적(空寂)한
줄을 알아서 모든 죄의 모습도 공적함을 보는 것을 말한다.우리가 매일
독송하는 『천수경』 가운데 이런 대목이 있다.죄무자성종심기(罪無自性從心起)심약멸시죄역망(心若滅時罪亦亡)죄망심멸양구공(罪亡心滅兩俱空)시즉명위진참회(是卽名爲眞懺悔)‘죄는
자성이 없으니 마음 따라 생길 뿐, 마음이 멸할 때 죄도 없어지네. 죄와
마음이 함께 없어져 모두 공하면, 이것을 일러 참다운 참회라 하네
’이참 수행법으로는
염불, 참선, 간경, 주력 등이 있다.
사참은 몸으로는 부처님께
예배를 드리고, 입으로는 부처님을 찬탄하며, 마음으로는 부처님의 성스러운
모습을 그리면서 과거와 현재에 지은 모든 죄를 참회하는 행법이다.사참의
방법은 부처님 전에서 절을 하는 것이 있고, 봉사활동을 통하여 어려움에
처해 있는 다른 사람들을 도움을 주는 것도 사참의 하나이다.
참회할 때 외우는 것을
참회문이라 하며, 대표적으로 『천수경』과 『화엄경』 〈보현행원품〉에서
볼 수 있다.아석소조제악업(我昔所造諸惡業)개유무시탐진치(皆由無始貪瞋痴)종신구의지소생(從身口意之所生)일체아금개참회(一切我今皆懺悔)‘지난
날 지은 모든 악업은 무시이래 탐욕, 성냄, 어리석음으로 말미암아 몸과
말과 마음으로 지었아오니, 제가 이제 그 모든 것을 다 참회합니다’또,
서산대사는 『선가귀감』에서 참회를 이렇게 정리하고 있다.“허물이
있으면 참회하고 잘못된 일이 있으면 부끄러워할 줄 아는 데에 대장부의
기상이 있다. 그리고 허물을 고쳐 새롭게 되면 그 죄업도 마음 따라
없어질 것이다.
<
백팔 참회 >
즉 참회란 먼저 지은
허물을 뉘우치고, 다시는 짓지 않겠다고 맹세하는 일이다. … 마음이
본래 비어 고요한 것이므로 죄업도 붙어 있을 곳이 없다.”참회란 그렇게
해서 마음에서 모든 죄업의 근원인 삼독을 없애나가는 것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본다면
십악업에 대한 참회를 하는 것이다. 즉, 몸으로 지은 세 가지 악업과,
입으로 지은 네 가지 악업, 그리고 생각으로 지은 세 가지 악업에 대해
참회하는 것이다.그 요령은 108배를 하되, 부처님이 실제로 앞에 계시다고
가정하고, 한 번의 절을 할 때마다 한 가지씩 참회를 해나가는 것이다.
십악업이란 살생, 투도,
사음, 망어, 기어, 양설, 악구, 탐, 진, 치를 말한다.위의 십악업에
대해 한 가지씩 떠올려서 스스로의 성품에 되뇌인다.
“이러 이러한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진심으로 참회하며 다시는 그러한 잘못을 짓지 않겠습니다.”하고
마음속으로 다짐해나가는 것이다. 이렇게 모든 악행들을 참회해나가는데
더 이상 기억이 나지 않을 때까지 계속해 나간다.십악업 중에 가장 무거운
것이라 한다면 진리를 모르는 어리석음이다. 어리석음 가운데 가장 어리석은
것은 스스로 잘났다는 생각이다. 자기가 한껏 못났다고 생각해야 참회가
된다.
우리의 본성이야 잘나고
못나고를 초월해 있는 것이지만, 다만 분별의식이 못났다는 것이다.
보잘것 없는 나를 잘났다고 착각하여 남과 비교해 잘 잘못을 따지는
것, 이것이 정말 못난 것이다.또한 인과를 믿지 않는 것이 어리석은
것이다. 베푼 만큼 돌아오고, 지은 만큼 받는 것이다. 이를 확신하지
않는 까닭에, 은덕은 조금 베풀고서 대가를 많이 받지 못해서 안달하고,
허물은 많이 짓고서 과보는 피해보려고 전전긍긍하는 것이다.
이상과 같이 참회를
할 때는 십악을 나누어서 한 가지씩 참회하는 방법이 있고, ‘과거에
알게 모르게 지은 악업을 모두 진심으로 참회합니다’하고 모든 죄업을
통털어 참회하는 방법이 있다.여기에서 명심해야할 것은 참회를 할 때는
무조건적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조건부 참회가 되어서는 안되고, 자신의
성품 가운데 남긴 자취가 없도록 해야 한다. 참회를 하면서 다른 것을
기대하는 조건부 참회는 다만 자신의 그릇 안에서 맴도는 것이므로 인식의
궁극적인 변화는 기대할 수가 없다.이처럼 스스로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어
자신을 흠뻑 사랑할 수 있을 때 다른 모든 존재를 한없이 사랑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참회를 통해 얻어지는 귀중한 결실이다.
이렇게 해서, 참다운
자기사랑에 점차 눈이 떠가면 남의 허물을 돌아볼 겨를이 없다. 스스로에게
부족한 점이 많은 사람일수록 남의 허물을 잘 끄집어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남의 허물을 말하기 전에 먼저 나를 돌아보고 마음을 바로 잡을 일이다.한
걸음 더 나아가 모든 존재에 대해 감사를 하도록 한다. 그것은 108배를
하거나, 108염주를 돌리면서 낱낱이 감사의 생각을 하는 것이다. 주위에서
감사할 일을 찾아내는 연습을 하면 좋다. 나중에는 심지어 자신에 대해
불평불만인 사항까지도 감사한 마음이 들 수 있을 때까지 감사하고 또
감사한다. 이와 같이 있는 그대로의 현실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은 긍정적인
사고를 불러와서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지고 인생의 전환을 시킬
수 있는 출발점이 된다.
2. 발원(發願)
많은 사람들이 불교에
관하여 갖는 의문 가운데 하나는, ‘불교에서는 욕심을 버려야 한다고
강조하는데, 욕심이 없이 어떻게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가?’하는
것이다. 이것은 당연한, 그리고 누구나 한 번쯤은 가져봄직한 의문이다.치열한
생존경쟁의 험난한 세상을 살아나가면서 상대방을 짓누르기보다는 무조건
양보하고 욕심을 내지 않으려 하다가는 얼마 안가 도태되고 말 것이
아니냐는 주장이다. 심지어 일부 불자들이 무기력해 보이며, 세상에
대하여 염세적이고 피동적인 자세를 견지하는 것도 이러한 불교관에
근거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이다
.불교 특히 대승불교에서는
발원(發願)을 수행의 첫걸음으로 삼고 있음에 유의하여야 한다.
원(願)을 발(發)한다는
것, 이것은 일반적으로 말하는 욕심과는 다르다. 욕심과 발원의 차이는
크게 세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첫째로, 욕심은 다분히
개인적이고 이기적인 바램이지만, 발원은 공통적 바램을 염두에 두고
있다. 그것은 오직 나만을 위한 원이 아니라, 우리 모두, 인류 전체,
나아가서는 일체 중생에 대한 기원을 담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나와
남은 구분되지 않는다. 남의 행복이 곧 나의 행복이며, 남이 잘되는
것이 곧 내가 잘되는 것이다.
둘째로, 욕심은 본능적인
것이지만, 발원은 능동적인 것이다. 잘 먹고 잘 살고, 부와 명예를 바라는
것은 누구나 본능적으로 타고난 것이다. 하지만, 발원은 없는 것을 만들어나가는
것이다. 우리는 본래 꿈에도 남에게 주고자하는 마음이 없다고 한다.
그러나 일부러 원을 발하여 나의 것을 자꾸 베푸는 마음을 연습함으로써,
아상(我相)의 소멸에 접근하게 되는 것이다.
셋째로, 욕심은 결과를
중시하지만 발원은 과정 그 자체를 중시한다. 한마디로, 발원은 결과에
대한 집착이 없는 것이다. 욕심은 미래에 중점이 두어져 있기 때문에,
그러한 욕망 달성을 위해서 때로는 현재를 희생할 것을 강요한다. 하지만
발원은 현재에 중점이 두어져 있다. 물론 스스로가 세운 원을 달성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노력하기는 하지만, 결과에 대한 집착이 없이 바로
지금 여기에서 노력하는 자체가 즐거운 것이다.이상과 같은 의미에서
보건대, 발원은 참다운 자기전환의 시작이라 말할 수 있다.
업생(業生)이 아니라
원생(願生)으로 나아가는 첫 단추인 것이다.
업생이란, 어디서 왔는지도
모르고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채, 그저 과거의 지은 바 업에 이끌려
살다 가는 것이다.
원생이란, 스스로의
삶을 갈무리해나가는 것이다. 의도적으로 방향을 설정해서 과거의 업을
벗어나 창조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이러한 원생을 살아나가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발원이 필요하다. 걸림만 없다면 무엇이든 마음에 그리는
대로 되어지는 것이다. 그렇지만, 마음 속 어딘가에 걸림이 있기 때문에,
즉 ‘못한다’는 생각이 있기 때문에 마음먹은 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무슨 일을 하든지, 의욕이나 선입관을 가지고 할 것이
아니라, 원을 세워 해야 하는 것이다
.특히 초심자에게는
반드시 발원이 필요하다. 발원이란 탐·진·치라는 속성에너지의
방향전환이다. 그것은 욕심을 완전히 부정하여 억제하고자 하는 노력을
하기보다는, 오히려 그 욕심을 일단 인정하되 다만 방향을 바꾸어 도심(道心)으로
인도하자는 것이다. 이것은 다름아닌 탐·진·치의 대전환이다.
탐심을 돌이켜 대신심으로, 진심을 돌이켜 대분심으로, 치심을 돌이켜
대의심으로 만들어 수행의 방해물을 오히려 수행의 자량(資量)으로 삼도록
하는 것이다.
이야말로 번뇌가 곧
보리라고 하는 대승불교의 진수이다. 돌은 그저 돌일 뿐이다. 그것에
걸려 넘어지면 걸림돌이요, 딛고 넘어가면 디딤돌이 된다.이것은 존재의
속성인 탐·진·치 자체를 완전히 부정하여 이에 역류하고자
인위적 노력을 가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에너지, 즉 끊임없는 향상성들을
오히려 도를 깨치기 위한 방편으로 사용하는 것이며, 이것이 발원의
참된 가치이다.
그러면 실제 발원에는
어떤 것이 있는가? 우선 발원 가운데 가장 보편적인 것으로 사홍서원이
있다.
중생을 다 건지오리다.(衆生無邊
誓願度)
번뇌를 다 끊으오리다.(煩惱無盡
誓願斷)
법문을 다 배우오리다.(法門無量
誓願學)
불도를 다 이루오리다.(佛道無上
誓願成)
이 사홍서원은 대승보살들이
보리 성취(上求菩提)와 중생구제(下化衆生)를 위한 보편적인 실천덕목으로
제시된 것이다. 보리심을 일으킨 보살은 어떠한 곤란에도 물러서지 않는
견고한 결의를 일으켜야 한다. 이 결의가 바로 서원이다. 그리고 이타행을
통해 무량 무수의 중생을 깨달음으로 이끌어 제도하면서도 누구를 제도한다거나
누가 제도한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는 것, 그래서 아무런 공덕도 구하지
않는 것이 바로 보살의 서원이다.
따라서 이 보살의 서원은
어떤 공격도 물리칠 수 있는 갑옷을 입은 것과 같이 견고하다 하여 ‘큰
서원(弘誓)의 갑옷(大鎧)을 입는다’고 표현한다.이러한 서원은 발원이
바로 업에 이끌려 사는 삶, 남의 짐이 되는 삶에서 스스로 창조해가는
삶, 남의 짐을 덜어주는 삶으로의 전환이라는 것을 잘 표현해 준다.
결국 사홍서원이란 자신의 업력을 이겨내는 원력을 행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마음을 낮추고 일체의 중생을 부처님과 같이
공경하여야 한다. 밖의 중생을 공경한다는 것은 물론, 자신의 마음속의
중생도 공경하여야 한다. 여기에서 공경한다는 것은 인정한다는 것이다.
인정하고 관심을 보여줌으로써 모두 함께 이웃이 되는 것이다.
서원은 클수록 좋겠지만,
가급적이면 자신의 현재 상황과 부합하는 것으로 하는 것도 괜찮다.
예컨대 깨달음을 구하는 마음이 간절할 경우에는 ‘일체중생이 모두
다 깨달음을 얻어지이다.’하고, 병고에서 벗어나고자 하거든 ‘일체중생이
모두 다 병고에서 벗어나 지이다.’하며, 마음 편안함을 성취하고자
하거든 ‘일체중생이 모두다 마음이 편안하여 지이다’하는 식으로 발원해나가는
것이다.얼핏 생각하면 ‘내가 어서 깨쳐서 중생들을 제도하겠습니다’
해야 할 것 같지만, 여기에는 나라는 생각과 남이라는 생각, 그리고
제도한다는 생각과 제도된다는 생각이 전제되어 있다. 깨친 이의 특징이
이러한 네 가지 상(相)의 소멸이라고 할진대, 내가 수행해서 내가 깨치고
제도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히면 오히려 네 가지 상이 증장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3. 기도(祈禱)
1)기도란
보통 때에는 전혀 종교적
성향이 없던 사람이라도 위기에 처하거나 심각한 상황에 부딪히면 종교에
의지하곤 하는 일을 자주 목격할 수 있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
되면 무언가 의지하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일 것이다.
기도란 일반적으로
인간이 자신의 한계를 느낄 때 신이나 그 밖에 신비한 힘에 의지하여
그것을 이겨내고자 간절하게 비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불교에서 기도는
다른 종교에서 말하는 기도와는 다르다. 권청(勸請) 즉, 일체 중생들이
어리석은 마음을 떨쳐버리고 하루 속히 지혜의 눈이 열리도록 부처님께
청하는 의식으로서 모든 중생을 제도하겠다는 원력과 바른 깨달음을
성취하여 모든 이웃들에게 기쁜 마음으로 회향하겠다는 서원의 뜻이
더 크다. 즉 불교의 기도는 불·보살님의 위신력을 찬탄하고 다생에
지은 모든 업장을 참회하며 감사한 마음으로 일체중생과 함께 하기를
발원하고 회향하는 것이다.
<기도하는
티베트의 불자 >
그 기도발원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고 의지하며 이 생명 다하도록 실천하겠다는 성스러운
마음에서부터 생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도를 통해서 나와 이웃 그리고
모든 중생들에게 불·보살님의 공덕이 함께 하기를 서원하고 또한
작은 나의 편협한 마음을 큰 나의, 즉 부처님 마음으로 변환시키는 것이다.따라서
기도의 마음가짐은 우선적으로 간절한 마음이 앞서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작고 편협한 중생으로서의 나를 버리는 것이 전제되어야
한다. 즉 내 힘으로 어떻게 해 보겠다는 생각이 적을수록 기도는 오히려
잘 된다고 하는 것이다. 오직 모든 것을 부처님께 맡겨버리는 것, 그것이
중요한 관건이다. 심지어 잘 되고 못 되고 까지도 부처님께 맡겨버릴
수 있다면 이미 성취한 기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결국 불교의 기도는
자기 개발의 한 형태이며 수행의 한 방법이다.
기도의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천수다라니나 능엄주
혹은 관세음보살 육자대명왕진언, 광명진언 등을 지송하는 것을 주력(呪力)이라고
한다. 금강경이나 지장경, 혹은 『화엄경』 〈보현행원품〉, 『법화경』
〈관세음보살보문품〉, 『원각경』 〈보안보살장〉등 경전을 읽고 지송하는
것을 간경(看經), 혹은 독경(讀經)이라고 한다. ‘석가모니불’이나
‘아미타불’, 혹은 ‘관세음보살’, ‘지장보살’, ‘미륵보살’ 등과
같이 불보살님의 명호를 지속해서 염하는 것을 염불(念佛)혹은 정근(精勤)이라고
한다. 이외에도 백팔배, 삼천배 등과 같이 절을 하는 방법을 비롯해서
다양한 방법이 있을 수 있다.
기도는 가능한 한 매일
같은 장소에서 같은 시간에 같은 요령으로 해나가는 것이 좋다. 부드러운
물방울이 바위를 뚫을 수 있는 것은 지속적으로 같은 자리에 떨어지기
때문이다. 기도 또한 마찬가지다. 오늘은 여기, 내일은 저기에서, 이
시간에도 했다가 저 시간에도 했다가 해서는 성취를 보기가 어렵다.
또 한꺼번에 여러 시간을 했다고 며칠은 쉬고 해서는 곤란하다. 규칙적인
식사 습관을 지닌 사람은 식사 시간이 가까워지면 몸에서 먼저 알고
준비를 하는 것처럼, 기도도 항상 같은 시간에 같은 장소에서 같은 요령으로
꾸준히 하다보면 몸과 마음에 분위기 조성이 잘 되어져 기도삼매를 쉽게
성취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이
남들의 방해를 받지 않고 규칙적으로 낼 수 있는 시간을 정해놓고 하는
것이 좋다. 장소도 가급적이면 가까운 법당을 정하여 동일한 자리에서
하는 것이 좋다. 그렇다고 자리에 집착하라는 의미는 아니다. 또한 기도의
요령도 한 가지를 정해놓고 일정기간 동안은 같은 요령으로 지속하는
것이 좋다. 예를 들면, 매일 천수다라니 108독 이상을 한다거나, 금강경을
7독 이상 한다거나 염불을 삼천 번 이상 한다거나 하는 등이 그것이다.만약
가정에서 정기적으로 기도하기 위해서는 먼저 일상생활에 지장을 받지
않고 기도할 수 있는 편한 시간과 공간을 정해 놓은 다음, 절에서 기도하는
것과 같이 봉행하면 된다
.어쨌든 외부를 향한
기도가 점차적으로 내부지향적으로 바뀌어져가고, 궁극적으로는 ‘일념에서
무념으로’ 진전되어 나아가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기도를 하는데도
몸과 마음의 자세와 호흡이 중요하다. 즉 기도와 참회를 하고자 할 때는
앉는 자세부터 바르게 해야한다. 일반적으로 앉는 자세는 두 무릎을
꿇고 앉는 방법을 취하며, 그 밖에는 결가부좌(結跏趺坐)나 반가부좌(半跏趺坐)를
해서 앉으면 된다. 두 발은 모으고 똑바로 선채 합장을 하고 해도 된다.
옷차림은 좀 헐렁하고 편안한 복장이 좋을 것이다.기도할 때에 앉는
법을 강조하는 것은 바른 자세에서 바른 호흡이 나오기 때문이다. 바른
호흡이 중요한 것은 호흡이 안정되어 있을 때 자연히 정신도 안정되어
쉽게 기도에 몰입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제 부처님의 명호를
부르면서 기도를 하다보면 호흡은 자연스레 안정이 되기 때문에 너무
호흡에 의식할 필요는 없다.
<선재동자>
기도할 때 마음은
첫째 믿음이 중요하다. 즉 이 기도가 결코 헛된 것이 아니며 부처님의
가피가 분명히 나와 함께 함을 깊이 믿어야 하고, 둘째로는 참회하는
마음이 중요하다. 평소 우리 자신의 잘못된 생활에 대해 반성하고 기도에
앞서 자신의 마음을 참회하고 비우는 것이다. 셋째로는 주변의 모든
이웃에게 자비로운 마음을 내는 것이 중요하다.
세상의 모든 중생이
나와 한 몸임을 깨닫고 그들 모두에게 평화와 안락이 깃들기를 바라며
누구에게도 원망이나 미움을 갖지 않는 마음이다. 이와 같은 마음가짐으로
기도에 임할 때 기도는 참다운 공덕을 쌓게 된다.
기도할 때 독송하는
경전은 기도의 내용에 따라 각기 다르다. 먼저 경전을 독송하는 것은
경전을 통해서 불·보살님의 서원과 나의 정성이 하나가 되게
하는데 있다.기도 방법에는 예로부터 전해오는 다섯 가지 덕목이 있는데
그 첫째는 불·보살님께
귀의하여야 하고, 둘째는 향과 꽃 등으로 공양하고 보시하여야 하며,
셋째는 3배 또는 108배 등으로 예배하고, 넷째는 업장을 소멸하고 복덕을
성취하기 위하여 참회 발원하여야 하며, 다섯째는 불·보살님의
명호를 부르며 정근하는 염송이 있어야 한다고 하였다.
2) 기도의 종류
① 관음기도
<수월관음보살도>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중국, 일본에 가장 뿌리 깊게 내린 것이 관음신앙이다. 이 관음신앙과
연관된 경전은 『반야심경』, 『천수경』, 『법화경』 등이다.관세음(觀世音)보살은
산스크리트어 아발로키떼슈바라(Avalokitesvara)를 뜻으로 옮긴 말이다.
관자재, 관세음, 관음 등으로 번역하기도 한다.
관세음이란 세상의
모든 소리를 다 관찰한다는 뜻이며, 사바세계의 중생들이 괴로움에 허덕일
때 관세음보살의 이름을 불러 구원을 청하면 32응신(應身)으로 몸을
나타내어 구원해주신다.관음보살상은 어머니같이 인자하시고 자비로우시며
후덕한 모습으로 왼손에 연꽃을 들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 연꽃은
중생이 본래부터 구비하고 있는 불성을 표현한 것이다. 중생이 관세음보살님께
귀의하고 그 명호를 부르거나 찬탄, 공양하면 다음과 같은 공덕이 있다고
한다
.불에도 타지 않고
물에도 떠내려가지 않으며, 바람에도 날리지 않고 칼과 몽둥이에 잘리거나
다치지 않으며, 귀신에게 시달리지 않고 쇠고랑을 차지 않으며 도적의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주신다. 또 항상 관세음보살을 생각하고
공경하면 욕심 많은 사람은 욕심을 여의게 하고 …… 아들을 원하면
아들을 낳고, 딸을 원하면 어여쁜 딸을 낳을 것이다.『법화경』〈보문품〉
② 지장기도
우리나라의 지장신앙은
삼국시대부터 성행하였다. 지장보살님은 부처님의 부촉을 받아 도리천에서
중생의 근기를 관찰하고 무불세계(無佛世界)의 육도중생을 교화하는
대비(大悲)보살이다. 지장보살님은 지혜와 자비를 구족하고 있으며 특히
자비의 실천을 강조하신 분이다. 지장보살님은 지옥에서 고통받는 중생들이
모두 성불하기 전에는 결코 깨달음을 이루지 않겠다는 서원을 세우신
대비원력의 보살이시다. 이 보살님은 오늘도 육도(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 인간, 천상)를 윤회하는 중생들을 구제하고 계신다.『지장보살본원경』에
의하면 지장보살을 예배하고 공경하면 다음과 같은 공덕이 있다고 한다.
풍년이 들며, 집안이
편안하고, 죽은 조상이 천상에 태어나고, 부모가 장수하며, 원하는 것을
얻으며, 수재나 화재가 없고, 헛되이 허비하는 것이 없으며, 나쁜 꿈이
없고, 출입시 신장이 보호하며, 훌륭한 인연을 많이 만날 것이다.
지장 신앙은 우리나라를
비롯해서 중국, 일본 등 여러 나라에서 봉행되고 있는 것은 『지장보살
본원경』에서 나타난 바와 같이 ‘부모가 장수하고’, ‘조상이 천상에
태어난다’는 효 사상의 영향이다.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선망부모와
일가친척, 그리고 제반 천도의식을 봉행할 때 지장기도를 많이 봉행하고
있다.
③ 약사기도
인간이 한평생을 살아가면서
몸이 아프고 병이 들고 늙고 죽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인간은 아픈 몸을 다스리기 위하여 여러 가지 처방을 쓰기도 한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일찍이 만가지 모든 병은 마음에서부터 생긴다고 하는
것을 깨달으시고 모든 중생들에게 마음을 먼저 다스릴 것을 강조하셨다.
그것이 바로 병의 근원인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없애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세상 사람의 모습과 인종, 그리고 문화가 각기
다르듯이, 욕심을 버리고 건강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아프고 병든 사람도 있기 마련이다. 그와 같이 병들어 아픈 사람들이
그 병을 다스리기 위해 약사여래 부처님께 기도 정진하는 것을 약사기도라고
한다.
약사여래는 정확하게
말한다면 약사유리광여래 부처님이다. 약사여래가 계시는 세계의 이름이
동방에 있는 정유리세계이므로 동방정유리계의 교주라고 지칭되기도
한다.약사여래신앙의 모체인 『약사유리광여래본원경』에는 약사여래의
12가지 서원이 나온다. 그 중에서 여섯 번째와 일곱 번째 서원이 정신적,
육체적 병고의 해결과 회복이다. 그 다음으로 생명을 연장하는 방법을
설하고 12가지 ‘원을 성취시켜주는 신령스런 주문’을 들고 있다. 이러한
약사여래의 가피를 구하고자 하는 것이 약사여래 기도이다.
3) 간경(看經)
불교에서 경전은 부처님의
말씀이요, 교훈이요, 진리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경전은 부처님 열반
이후 정법을 전하는 보고(寶庫)로 여겨졌고, 따라서 경전을 신행의 지침으로
삼게 된 까닭이 여기 있다. 『법화경』〈법사품〉에 이런 말씀이 있다.어디서든지
이 경을 설하거나 읽거나 외우거나 쓰거나 이 경전이 있는 곳에는 마땅히
칠보로써 탑을 쌓되 지극히 높고 넓고 장엄하게 꾸밀 것이요, 또다시
사리를 봉안하지 말아라. 왜냐하면 이 가운데는 이미 여래의 전신(全身)이
있는 까닭이니라.
경전이 부처님의 진신사리와
다름 아님을 나타내는 말씀라 하겠다. 이와 같이 불교경전은 단순한
책이 아니라 부처님의 진신사리로서, 불상이나 불탑과 같이 예배의 대상이다.
뿐만 아니라 책이 귀하던 옛날에는 한 권의 경전이 갖는 의미가 각별했으며
경전을 통하여 교육이 이루어졌으니 경전은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것이었다.
예로부터 경전을 통한 수행의 한 방법으로 간경에 지극한 정성을 보인
까닭도 이 때문이다.간경은 경전을 보고 읽는 것을 말한다.
경전은 삶의 바른 길을
제시하는 지혜의 창고이다. 따라서 경전을 읽고 외우며 몸에 지님으로써
얻게 되는 공덕이 무한히 크기 때문에 간경은 수행의 한 방법으로 정착이
되었던 것이다.원래 경전을 통해 깨달음을 이해하고 그와 같이 실천하기
위해 읽었던 것이나, 나중에는 읽고 외우는 그 자체가 하나의 수행법으로
인식되었다. 또한 부처님 앞에서 경전을 읽고 부처님의 덕을 찬탄하여
원하는 일이 속히 이루어지도록 발원하기도 하고 또는 죽은 자를 위해
독경해서 그 공덕으로 극락세계에 왕생하기를 바라며 명복을 빌기도
하였다.
간경은 뒤에 경전을
읽는 모든 행위를 일컫게 되었다. 풍경(諷經), 독경(讀經)·독송(讀誦)이라
하기도 한다. 이들의 의미를 구별해 쓰는 경우도 있으나, 지금은 흔히
구별없이 하나의 뜻으로 쓰고 있다. 또한 독경·예배 등을 부지런히
한다고 하여 근행(勤行)이라고도 한다.옛부터 경전을 읽기에 앞서 먼저
몸을 깨끗이 하고 단정히 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였다. 몸을 깨끗이
하는 과정을 통해 마음을 추슬러 경전의 의미를 보다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이다.경전을 읽을 때에는 마음속으로 의미를 이해하면서 보아야
하는데 염불처럼 소리를 내어 읽기도 한다. 그리고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으면 주위의 스님이나 선지식을 찾아서 그 뜻을 물어 이해하고
넘어가는 것이 경전 읽기의 바른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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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사 장경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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