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불교전파의 특징
불교는 인도에서 발생하여
동방의 여러 나라로 전파되어 갔다. 인도 최초의 통일국가를 이룩한
아쇼카왕이 전쟁에 염증을 느껴 불교에 귀의하고 전도사를 전세계로
파견하여 불교의 세계종교화를 이룩하였다.
그 가운데 특히 중국은
인류 문명의 발생지 가운데 하나로 주변 나라에 지대한 영향을 주고
있었는데 불교 사상과 자신의 전통 사상과 문화를 융합, 수용하면서
한국과 일본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이렇듯 불교가 각 지역에
전파될 수 있었던 요인은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불교 내적 요인으로는
불교가 갖고 있는 보편 타당한 교리, 즉 만민 평등사상(萬民平等思想)과
보편적 구원신앙, 숭고한 일상적 생활덕목을 들 수 있으며, 불교 외적
요인으로는 피전래지가 직면한 사상 종교적 공백과 그 공백을 채워줄
새로운 사상과 종교의 출현이 역사의 필연으로 제기되었다 할 수 있다.
이러한 불교전래의
특징을 보면 첫째, 처음부터 분파적으로 진행되었다는 점이다. 기원전
3세기 실론을 비롯한 동남아 지역의 불교는 시종 상좌부(上座部)불교(Theravada)이고,
서기 1세기를 전후하여 서역과 동북아 일대에 전파되기 시작하여 정착한
불교는 대승불교(Mahayana)이다. 이러한 초전 단계에서의 분파적인 전파로
인하여 오늘날까지 불교권은 남방불교권과 북방불교권으로 나누어졌다.
둘째, 강한 변용성을
들 수 있다. 불교는 인도문화와 함께 전파되어 전래지의 사회문화에
융합ㆍ순응하면서 스스로 변화시키는 변용성과 융통성을 발휘하였다.
따라서 불교는 타 지역에 전파되는 과정에서 새롭고 종합적인 불교문화를
창출하여 토착화된 양상을 보여주었다.
셋째, 전래방법에서
평화성(平和性)을 택하였다. 불살생(不殺生)을 종교적 계율과 덕목으로
삼는 불교에 있어서 처음부터 살상이나 전쟁에 의한 전파는 엄격히 금하는
것이었다. 이른바 성전(聖戰) 같은 실례는 없었다. 따라서 불교의 전래는
대개가 전법승(傳法僧)들에 의한 경전의 전래나 역경(譯經), 사찰의
건립 등에 의해 평화적 방법으로 진행되었다.
2. 인도불교
초기불교 경전을 가리키는
아함(阿含)이라는 말은 산스크리트어 아가마(Agama)를 소리대로 옮겨
쓴 말로 ‘전해 내려온 것’이라는 뜻이다. 불멸 후 교단의 분열이 일어난
당시의 수행자들은 자기 견해의 옮음을 입증하려고 아함의 교설에 대하여
깊은 연구를 하였는데 이를 아비달마(阿毘達磨, Abhidharma)교학이라고
한다.
아비달마 교학은 부처님의
교설을 체계화하는데 크게 기여하였지만, 다른 한편 문헌에 매인 해석과
이해의 어려움으로 인해 불교를 대중들로부터 멀어지게 하였다. 또한
불교의 궁극적 목적을 무위열반(無爲涅槃)에 있는 것으로 해석하고 이상적인
인간상은 이러한 열반을 증득하는 아라한(阿羅漢)으로 상정하였다. 이상적
인간상인 아라한의 경지는 교학을 전문적으로 연구하고 철저하게 수행하는
출가수행자가 아니고는 성취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이리하여 당시의
불교는 자리(自利) 위주의 불교, 출가주의의 불교, 사변적인 불교가
된 것이다.
불교가 이렇게 대중으로부터
멀어지고 있을 때 교단 한편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돌아가자’는
사상운동이 발생하였다. 이들은 자신만의 깨달음을 구하는 아비달마
불교의 입장을 소승(小乘, Hinayana)이라 비판하고, 중생을 구제하면서
깨달음을 구하는 자리이타(自利利他)의 인간상으로 보살(菩薩, Bodhisattva)을
제시하였다. 그들은 스스로 대승(大乘, Mahayana)이라 불렀다.
백의
관음
‘보살’은 원래 부처님의
전생과 미래불인 미륵보살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러나 불탑을 중심으로
부처님의 생애를 설명하던 사람들에게 성불을 목적으로 수행하고 남을
위해 헌신한다면 그가 바로 보살이라는 자각이 싹트게 되었다. 이것은
획기적인 전환이라 할 수 있다.
이전에 수행자가 지향하는
최고의 경지는 아라한이었다. 성불이란 이룰 수 없는 것이라 여겨졌고
자신만을 위한 수행이 주가 되었다. 그러나 대승불교는 자리 위주의
불교에서 자리와 이타행이 조화로운 불교로, 출가 중심의 불교에서 출가와
재가가 함께 하는 불교로 전환을 모색하였다.
달마대사
아울러 대승은 ‘큰수레’라는
이름에 걸맞게 다양한 수행 방편을 제시하였다. 소승의 수행도 어려운
것이지만 세세생생 이타행을 서원하고 실천하는 것 역시 일반인에게는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자력수행(自力修行)을 주된
특징으로 하는 불교에 아미타불의 원력에 의지하여 구제되고자 하는
타력이행(他力易行)적인 요소가 부각되기 시작하였다. 불교를 어렵게
느끼던 대중에게 타력 신앙은 매우 반가운 소식으로 불교가 널리 확산되는데
도움이 되었다.
출가와 재가의 수행자가
함께 일으킨 대승사상은 중기로 접어들면서 다시 출가 수행자 중심으로
체계화되어 교단으로 발전하였다. 교학 연구도 심화되어 아비달마 교학에
못지않은 발전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 때의 교학 연구는 대중을 다양하게
섭수하는 방편 연구를 포함한 것이었다.
3. 중국불교
불교가 처음
중국에 전래된 것은 불기 611(67)년, 후한(後漢)시대 대월지국으로부터
가섭마등과 축법란에 의해 전해졌다고 한다. 그런데 당시 중국인들은
불교의 가르침을 노자와 장자의 사상에 대비시켜 이해하였는데 이를
격의(格義)불교라 한다. 이런 격의불교는 언어의 장벽으로 불교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기 때문에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경전이 중국어로 번역되고 사상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자 점차 독자적인
사상체계를 이루게 된다.
구마라집
이러한 작업은 대체로
경전 번역과정에서 나왔다. 이미 초기부터 안세고, 지루가참, 진제와
같은 역경승들이 있었지만 중국불교의 한 획을 그은 인물이 바로 구마라집(鳩摩羅什,
344∼413)이다. 그는 수많은 대승경전과 율장, 논서를 번역하였는데
그의 번역은 정확성과 문장의 미려함, 그리고 번역 자체가 불교를 강술하는
성격을 띠어 중국불교의 일대 전기를 마련하였다. 구마라집에 의해 중국인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올바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고 동시에 격의불교를
극복할 수 있었다.
구마라집 이후 경전번역의
가장 큰 성과는 삼장법사 현장(玄?, 600∼664)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는
17년에 걸친 구법여행 끝에 인도로부터 범어경전 657부를 가지고 돌아와
무려 75부 1,335권의 경전을 번역 편찬하였다. 그의 번역을 구마라집의
전역과 비교하여 신역(新譯)이라 부른다.
중국불교의 또 다른
특징은 교상판석(敎相判釋)이다. 인도에서는 근본불교 시대를 거쳐 소승과
대승불교라는 불교의 역사를 거쳐왔다. 그러나 중국에 불교가 전래된
시기는 인도에서 대승불교가 흥성하던 때였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적
전개 과정을 알 수 없는 중국인들은 경전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대승과
소승의 구분없이 경전을 번역하였다. 이에 따라 중국인들은 같은 불교
경전이 서로 다른 입장을 보이는 것을 보면서 다소 혼란스러웠다.
또한 천차만별의 중생을
위해 다양하게 설해진 방대한 경전을 일정한 기준에 따라 정리하고 체계화할
필요성이 제기 되었다. 이에 따라 각자 판단의 기준에 따라 부처님의
교설을 통일, 정리하여 이해하려는 경향이 일어나니 이것을 교상판석이라
하고 줄여서 교판이라고 한다. 이 기준에 따라 새로운 종지(宗旨)가
성립되고 이것이 발전하여 각각의 종(宗)을 형성하게 된다. 이에 따라
13개 종파가 생겨나니 교판에 따른 종파의 형성은 중국불교사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대표적인 종파로는 삼론종(三論宗)과 천태종(天台宗), 법상종(法相宗),
화엄종(華嚴宗), 정토종(淨土宗) 및 선종(禪宗)등이 있다.
천대지자
대사
이 가운데 선종과 정토종은
가장 중국적인 불교라고 할 수 있다. 선종은 부처님의 깨달음에 직접
대면하려는 직관직각(直觀直覺)의 방식을 취하고 있다. 선종은 당대에
교학이 문자에 얽매여 있는 현실을 비판하고 참선 수행을 통하여 부처님의
깨달음으로 바로 나아가는 접근법을 제시하였다. 혜능대사는 이를 가리켜
‘가르침 외에 별도로 전한 교의이며 따로 문자를 세우지 않는다(敎外別傳
不立文字)’고 하였다. 문자에 의하지 않고 곧바로 진심(眞心)에 계합하기에
직지인심(直指人心)이라 하였고 견성성불(見性成佛)을 목표로 하였다.
선종의 성립은 중국에서
불교가 이루어 낸 또 하나의 발전이다. 복잡한 교학 연구와 현학으로
인해 부처님의 참 뜻인 성불에서 멀어진 풍토를 일거에 혁신하고 성불을
지향하는 불교, 새로운 불교로 탈바꿈한 것이다.
4. 한국불교
1) 삼국시대의 불교
우리나라에 불교가
처음 전해진 공식 기록은 불기 915(372)년 고구려 소수림왕이 중국 전진왕으로부터
불상을 받은 것이다. 그러나 학계 일각에서는 그 이전에 인도 출신으로
가야국의 수로왕비가 된 허씨 부인이 인도로부터 직접 불교를 가져 왔다고
주장하고 있다. 확실한 것은 서기 372년 이전에 이미 불교가 광범하게
뿌리내리고 있었다는 것이다.
고구려가 받아들인
시기의 불교는 격의불교였다. 이후 인도의 중관사상을 계승한 삼론종에
대한 연구가 발달하였고 유식학과 중국의 천태종, 열반종이 유입되어
교학의 발전이 이루어졌다.
한국
불교 전래도
백제는 불기 928(384)년
침류왕 때에 동진의 마라난타에 의해 불교가 전래되었다. 백제불교의
특징은 율종 중심의 교학에 있는데 그밖에 열반종, 삼론종, 성실종 등의
연구도 활발하여 교학 연구에서 선구적 역할을 하였다. 특히 백제는
일본에 불교와 선진문물을 전해줌으로써 일본 고대사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신라에는 고구려의
묵호자에 의해 불기 961(417)년에 불교가 전해되었으나, 불기 1071(527)년
이차돈의 순교로 공인되었다. 신라불교의 고승대덕들은 『삼국유사』등의
기록을 통해 그 행적이 전해지는데 원광-안함-자장-보덕-낭지-혜숙-혜공-대안-원효-의상-태현
스님 등으로 이어지는 일대 사상가들이 배출되면서 7∼8세기에 화려한
황금기를 맞이하였다.
신라인들은 특히 삼국통일을
전후하여 ‘신라 땅이 바로 불국토’라는 신념으로 가득 차게 되는데
이를 불국토 사상(佛國土思想)이라 하며, 호국불교사상이라고도 한다.
신라인들의 불교를 매개로 한 정신적 통일과 힘의 결집이 작은 나라
신라가 삼국통일을 선도하게 되는 배경이 되었다. 신라인들이
심혈을 기울여 만들어낸 문화적 걸작은 불교에 대한 깊은 믿음에서 우러나온
것이었으며, 그것은 백제와 고구려의 문화적인 발전을 포괄한 삼국의
성취였다.
삼국시대에 이땅에
전래된 불교는 각 나라와 지역마다 독특한 특성을 지닌 채 발전하면서
우리의 전통 사상과 문화로 깊이 뿌리 내렸다. 불교는 특유의 사상적
포괄성으로 민속 신앙을 섭수하여 큰 마찰 없이 우리 민족의 전통 사상과
문화로 자리잡았다. 특히 원효, 의상, 원광과 같은 고승들의 정신적인
역할은 삼국통일의 원동력이 되었고, 교학에 대한 독창적인 연구 성과는
불교뿐만 아니라 한국 사상사의 근원이 되었다.
2) 통일신라와 불교
① 통일전후의 신라불교
신라는 역대 왕들의
불교진흥으로 적지 않은 고승이 배출되고 많은 구법 유학승이 중국으로
왕래하여 그 위치를 확고히 하였다. 그 가운데 통일을 전후하여 교단발전에
크게 기여한 고승으로는 원광(圓光)ㆍ자장(慈藏)ㆍ의상(義湘) 스님 등을
빼놓을 수 없다.
원광 법사는 진평왕
11년(589)에 중국에 유학하고 22년(600)에 귀국하여 왕으로부터 성인처럼
공경을 받았다. 그는 특히 대승경을 강설하여 이 땅에 대승법문을 펼쳤다.
세속오계(世俗五戒)는 불교의 사회 지도적 위치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의상대사
원효
대사
자장율사는 출가하여
깊은 산에 들어가 백골관(白骨觀)을 수행하였는데 그 때 조정에서 불렀으나
응하지 않자 왕이 목을 베겠다 하니 ‘차라리 계(戒)를 지키며 하루를
살더라도 계를 버리고 살지 않겠다’는 수행자 상을 보였다.
의상(625∼702)법사는
당에 들어가 화엄학(華嚴學)을 공부한 후, 그 곳에서 『화엄일승법계도(華嚴一乘法界圖)』를
지어 인가를 받고 스승 지엄(智儼)의 뒤를 이어 교학을 강의하다가 문무왕
11년(671)에 급히 귀국하였다. 이는 당나라가 신라를 응징하기 위하여
군사를 일으킨다는 소식을 듣고 고국에 알리기 위해 서둘러 신라에 돌아왔던
것이다.
왕실을 무대로 활동한
스님들 외에 혜숙(惠宿)과 혜공(惠空), 대안(大安)과 원효 등은 대중
속에 들어가 일반 서민에까지 교화를 미쳤다.
이러한 고승들의 행적은
불교 대중화의 모범적인 사례이며, 선구적 실천운동으로 보살행의 방편이었다.
특히 원효는 200여 권이 넘는 많은 불교 관계의 저술을 남겨 당시 중국인들로부터
‘해동보살(海東菩薩)’이라고 불리웠다. 그러나 원효는 저술하던 붓을
던지고 속복(俗服)을 입고 스스로 소성거사(小姓居士 )라 이름하고,
무애(無碍)박을 들고 전국 방방곡곡을 노래하고 춤을 추면서 ‘나무불(南無佛)’을
불러 널리 불법을 알리니 모두 불교를 알게 되었다 한다. 이리하여 왕실과
귀족중심이었던 신라불교는 귀족, 서민 차별없이 온 국민이 다같이 신봉하고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② 통일신라시대의
불교
통일신라의 불교는
고구려ㆍ백제 두 나라를 병합하여 그들의 훌륭한 문화를 그대로 받아들여
삼국시대 불교의 연장이었으면서도 다시금 융합, 총화하여 창의적인
민족불교를 이루었다. 즉 통일신라 불교는 안정된 여건 하에서 외적인
발전과 내적인 면을 더 심화시켜 우리나라 최초로 가장 중요한 민족불교를
형성하였고, 우리 역사상 가장 찬란한 불교 문화의 황금기를 맞게 되었다.
통일기의 대승 교학은
통일을 전후한 시대의 원효와 의상을 비롯하여 신문왕대 경흥(景興),
경덕왕 때의 태현(太賢) 등 많은 고승들이 배출되어 연구와 저술로써
국내외에 이름을 떨쳤고 ms 영향을 주었다.
불국사
또한 이 시대에 이룩된
찬란하고 완숙한 경지의 불교 문화 예술은 불국사(佛國寺)와 석굴암(石窟庵)을
통해서 대변되고 있다. 이렇듯 불교문화는 탑ㆍ종ㆍ불상 등과 불교 문학의
정수인 향가(鄕歌)에 이르기까지 오늘에도 민족의 자랑으로서 더욱 찬란히
빛을 발하고 있다.
석굴암
보존불
한편, 통일 이후 국력의
신장과 함께 신라 불교는 해외로 뻗어나가 큰 활동을 전개하였다. 중국과의
교역이 활발해지면서 산동반도나 강소성(江蘇省)등에 신라인이 많이
살게 되자, 그곳에 신라원(新羅院)이라는 사찰을 세우고 불교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것은 신라 불교의 대륙 진출이라고 할 만하다. 또한 혜초(慧超)가
일찍이 당에 들어갔다가 인도 및 서역의 불적지를 두루 순례하고 돌아와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을 저술한 것은 8세기 불교의 상황을
알 수 있게 한 것으로써 신라 불교의 저력을 잘 보여주는 것이다.
신라 전반기에 당에서
가장 융성하였던 법상ㆍ화엄ㆍ밀교 등 대승불교가 전래되어 만개를 보았으나
후기에 들어와서는 중국선의 발흥에 영향을 입어 선법이 전래되어 침체된
불교에 새로운 선풍을 일으키게 되었다. 도의(道義)가 헌덕왕 13년(821)
선법을 한반도에 전래하기 시작하여 염거와 체징의 전승을 가져온 것을
시초로 고려초에 이르기까지 구산선문(九山禪門)을 이루게 되었다.
3) 고려시대의 불교
고려불교의 성격은
태조의 불교 신앙에서 이미 그 방향이 정해졌다 볼 수 있다. 태조 왕건(王建)은
고려의 건국이 부처님의 가호에 힘입었다고 믿어 불교에 깊이 귀의하였다.
태조는 친히 훈요(訓要) 10조를 지어 후대 왕들에게 본보기가
되도록 하였는데, 제 1조, 2조, 6조에서 불법을 신봉하고 불사를 일으킬
것을 강조하였다. 왕은 국운의 융창을 위해 더욱 불교 옹호에 힘쓰는
한편 많은 절과 탑을 세워 불사를 크게 일으켰다. 고려 불교는 태조의
이같은 숭불사상과 그가 마련해 놓은 기틀 위에서 전개되었다.
불교 사상면에 있어
고려는 신라의 불교를 그대로 계승하여 발전시켰으며 국사ㆍ왕사제도를
두었고 승과고시(僧科考試)의 실시로 교단의 부흥과 질적 향상을 꾀하기도
하였다. 한편, 신라 하대(下代)부터 전해지기 시작한 선이 고려 시대에
들어와서 더욱 유행하여 초기에 구산선문(九山禪門)의 완성을 가져왔다.
또한, 화엄(華嚴)ㆍ유식(唯識)ㆍ천태(天台)
등 교학 또한 여전히 활발하게 계승되었다. 그 가운데 균여의 화엄학
연구와 의천(義天)의 천태종 개창, 그리고 중기 이후 지눌(知訥)의 선
부흥을 위한 정혜결사(定慧結社)와 이와 쌍벽을 이루는 백련결사(白蓮結社)는
모두 고려 불교의 사상적 특징을 짓는 대표적인 예이다.
청혜결사문
한편, 고려불교에 있어서
그 특색의 하나는 각종의 법회(法會)ㆍ법석(法席)ㆍ도량(道場)ㆍ설재(設齋)
등의 행사가 많았다는 점이다. 이것은 국가가 어지럽고 외란이 잦았던
당시의 난국을 불덕(佛德)과 신력(神力)으로 해결하려고 한 행사가 잦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상은 복을 구하고 재앙을 물리치려는 당시 불교의
성격을 잘 나타내 보이고 있는 것이다. 전후 두 차례에 걸쳐서 이루어진
대장경(大藏經) 판각 사업은 바로 그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4) 조선시대의 불교
① 조선전기의 불교
원각사탑
유교를 정치이념으로
삼아 불교를 배척했던 조선 시대의 불교는 극심한 억압과 핍박 속에서
어렵게 그 명맥을 유지해 나갔다. 태조(太祖)는 국가 창업 초부터 불교를
배척할 수 없다 하여 조정 유생들의 뜻에 따르지 않았다. 그는 무학
자초(無學自超)대사를 왕사로 삼았으며 흥천사(興天寺)를 세우는 등
각종 불사를 실행하였다.
그러나 태종(太宗)대에
들어오면서 억불정책은 본격화되었다. 태종은 불교의 종파를 통폐합하고
사찰의 토지와 노비 등 사원의 재산을 몰수하였다. 또한 사찰의 수와
승니(僧尼)를 감축하는 한편, 국사ㆍ왕사제도를 폐지하는 등 억불정책을
단행하였다. 이런 정책은 세종(世宗) 때에도 계속되어 불교 종파는 선(禪)ㆍ교(敎)
양종으로 축소되고, 승려의 도성(都城) 출입마저 금지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가운데에서도
억불에 대한 저항이나 불교 부흥의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태종
6년에 성민(省敏)은 훼불의 즉각 중지를 상소하고, 함허(涵虛, 1376∼1433)
스님은 『현정론(顯正論)』1권을 지어 유학자들의 척불론을 정연한 논리와
유려한 필치로 논박하였다.
석보
상철
월인석보
한편, 처음에는 억불책을
강행했던 세종도 그 말년에 이르러서는 궁내에 내불당(內佛堂)을 짓고,
특히 훈민정음 반포 이후부터는 한글로 불서를 편찬하는 등 태도를 바꾸어
호불(護佛)에 나섰다. 그는 수양대군을 시켜 한글로 『석보상절(釋譜詳節)』을
짓게 하고 스스로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을 지었다. 이것은
당시의 척불 분위기에 비추어 놀라운 일이다. 이러한 활동은 훈민저음
창제 초기에 한문 숭상의 유교보다는 중생 제도의 평등사상을 간직한
불교를 통하여 한글을 보급하기 위한 정책과 더불어 일어난 것이다.
이러한 노력은 특히
세조(世祖)에 이르러 더욱 본격화하였다. 대군(大君) 시절부터 세종의
뜻을 받들어 한글 불서를 편찬하는 등 공공연히 불교를 옹호해 온 그는
왕위에 오르자 호불 정책을 펴기 시작하였다. 세조는 원각사(圓覺寺)를
비롯한 전국의 여러 사원을 중흥하고 불사를 크게 일으키는 한편, 스님의
권익 옹호와 불교의 지위 보장에 힘썼다. 또한 영산회상곡(靈山會上曲)과
연화대무(蓮花臺舞)를 창제하고 불교음악과 무용을 국악화하였다. 그의
흥불 노력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것은 간경도감(刊經都監)을 설치하고,
중요한 불교경전을 한글로 번역ㆍ간행한 일이다.
세조의 이와같은 흥불
정책이 있은 뒤, 성종·연산·중종을 지나는 동안 불교는
다시 말할 수 없는 박해를 받았다. 성종은 도첩제(度牒制)를 정지하고
승과제도를 폐지하였으며 선종의 도회소인 흥천사(興天寺)와 교종의
도회소인 흥덕사(興德寺)를 폐하여 관청으로 삼았다. 중종 때에 승과는
완전히 폐지됨으로써 선·교 양종 마저 없어지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나 명종이 즉위한
뒤 문정왕후(文定王后)가 섭정하고서부터 불교는 다시 부흥의 기운을
맞이하게 되었다. 문정왕후는 보우(普雨) 스님을 맞아들여 명종 5년(1550)
유생들의 맹렬한 반대에도 굽히지 않고 선·교 양종을 부활시키고,
봉은사(奉恩寺)를 선종의 수사찰로 봉선사(奉先寺)를 교종 수사찰로
삼았다. 또한 연산군에 의하여 폐지되었던 승과(僧科)를 다시 실시하는
등 불교 중흥을 꾀하였다. 이 때 부활된 승과에서 뒷날 조선 불교계를
이끌어간 서산(西山)·사명(四溟)과 같은 걸출한 인재들이 배출된
것은 조선불교로서는 참으로 다행한 일이었다. 그러나 명종 21년(1566)
문정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또 다시 가혹한 척불정책이 계속되었다.
② 조선후기의 불교
16세기 말에서 17세기
중엽은 조선으로서는 크나큰 외환을 겪게 되었으니 임진왜란(壬辰倭亂)·정유재란(丁酉再亂
)과 병자호란(丙子胡亂)이다. 또한 이 시기는 명·청이 교체되는
등 동아시아에 새로운 국제질서가 형성되어 가는 시기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외환 가운데에서 특이한 일은 혹독한 억불 정책에도 불구하고
구국을 위해 불교계가 적극 나서고 있다는 것이다.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 때 서산 휴정(西山休靜)·사명 유정(四溟惟政)·기허
영규(騎虛靈圭)스님 등은 의승군을 이끌고 죽음을 무릅쓰고 구국의 선봉에
나선 것이다.
불교의 구국활동은
그 뒤 병자호란(1635) 때에도 계속되었고, 그것이 다시 근세 일제 침략기의
항일 투쟁으로 이어졌다.
서산
대사
한편, 휴정과 함께
부용 영관(芙蓉靈觀)의 법을 이은 부휴 선수(浮休善修)는 문하에 7대
문파를 두는 등 많은 제자를 두었으며, 휴정은 유정·언기·태능·일선의
4대 문파를 이루었다. 휴정은 조선후기 불교의 가풍과 종풍을 확립하였다.
사교입선(捨敎入禪)을 제시하면서도 교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교외별전
격외도리를 몸소 보이면서도 염불을 권하고 때로는 송주(誦呪)와 일상행의
뜻을 풀이 하였으니 참선문(參禪門)·간경문(看經門)·염불문(念佛門)의
삼문 수업의 전통을 세우게 되었다.
또한 언제나 국가·부모·스승·시주의
사중은(四重恩)을 잊지 않는 삶이 되게 하였다. 그리고 서산 이후에는
임제(臨濟) 법통을 태고 보우(太古普愚)에 대어 확정하는 종통(宗統)을
세우게 되었다.
양대란 이후 불교의
그 위치가 크게 격상되어 새로운 기운을 맞이하게 되었다. 인악 의첨(仁岳義沾)·연담
유일(淵潭有一)과 같은 일대 강사가 배출되었으며 전국 유명사찰에서
화엄대회가 열렸다. 또한 선문도 크게 발전하였으니 백파 긍선(白坡亘璇)의
『선문수경(禪門手鏡)』을 계기로 삼종선 논쟁을 가져왔으니 우담(雨潭)과
설두(雪竇) 및 다성(茶聖)으로 불리운 초의 의순(艸衣意恂)이 이에 가담하였다.
한편, 실학의 영향으로
불교와 실학자가 교유하는 등 그 양상이 크게 변하여 나갔다. 그러나
불교의 위치가 격상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라로부터 지역(紙役) 등 각종
노역과 일용잡역 및 도성수비의 책임 등을 맞아 어려움이 매우 많았다.
이러한 시기를 맞이하여 자구책으로 보사청(補寺廳)을 만들고 계(契)
등을 조직하여 사찰 운영에 충당하는 등 법등의 전승에 노력하였다.
그리고 서민불교화하여 더욱 대중 속으로 파고 들어가면서 명맥을 유지하게
되었다.
③ 개화격동기의 불교
우리나라의 개화사상은
1870년경을 전후로 일어났다. 조선 왕조는 계속되는 세도정치와 환곡·환포·군정
등 삼정의 문란으로 국민은 도탄에 빠져 있었다. 이러한 왕권정치에
대한 반발로 새로운 문물을 도입, 전근대적(前近代的) 사고방식을 일소하고자
하는 개화사상이 꽃피우게 되었다.
특히 개혁적인 스님들은
유교지배 아래의 조선을 혁신하고자 민중과 더불어 여러 활동을 하게
되었는데 각종 민란에 스님들의 참여도 나타나게 된다. 특히 19세기
말, 안으로 빈발하는 봉건체제에 대한 민중들의 봉기와 밖으로 거대한
흐름으로 다가오던 서양 열강의 침략 위협 아래 불교사상으로 조선을
개혁하고자 이동인 스님, 유대치, 김옥균, 박영효 거사 등이 개화당을
결성하여 서기 1884년 정변을 일으켰으나 실패하여 희생되기도 했다.
이와 같이 개화 격동기
불교는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여 적극 개화운동에 참여하며 선도해 나갔다.
5) 근세의 불교
일본제국주의의 침략
아래 놓여 있던 20세기 전반은 한국불교에도 암울한 시기였다. 국가의
강력한 통제 아래에서 다양한 종파로 나뉘어 있는 일본불교는 정부의
후원 아래 각기 경쟁적으로 우리나라에 들어와 포교 활동과 동시에 식민지지배의
정당화에 가담하였다. 이것은 서양의 제국주의 열강들이 군사적인 침략에
앞서 선교사를 파견하여 식민지배의 정보 탐색과 지배 이념의 창출에
앞장섰던 것과 유사한 것이었다. 특히 1911년에 조선총독부가 제정하여
시행한 〈사찰령〉은 조선불교를 식민지총독 통제 아래 놓이게 한 법이었으며,
이것은 일본에 대한 예속을 촉진하였다.
일제는 사찰령과 여러
조치를 통해 조선불교의 훌륭한 전통을 유린하였는데 대표적인 사례가
스님의 결혼을 허용하고 권장한 것이었다. 이리하여 일제시대에
우리나라 스님들이 대부분 결혼하여 처자식을 거느리게 되었는데 이것은
부처님의 근본정신에 위배되었고 조선불교의 전통과도 어긋난 것이었다.
한편 식민지 시대에
불가피하게 일본에 협력하면서도 조선불교의 전통을 지켜 나가기 위해
본사 주지들을 중심으로 1941년 조선불교 조계종을 결성하여 총독부의
법인 인가를 받았다. 그러나 한용운, 백용성, 박한영 등 적지 않은 스님과
재가불자들이 일제의 식민지배에 끝까지 저항하며 조선불교청년회, 만당
등을 중심으로 민족 독립운동을 벌였고, 일제의 불교정책을 거부하던
청정 비구승들도 선학원을 결성하여 자주적인 활동 거점을 유지하면서
조선불교의 전통을 지키고 있었다.
한편, 일제하에 있어서
가장 대표적인 스님으로서는 만해 용운(萬海龍雲)·석전 한영(石顚漢永)·용성
진종(龍城震鐘) 스님 등을 들 수 있다. 그 가운데 만해 스님은 『불교유신론(佛敎維新論)』을
펴, 새로운 불교운동을 주창하였다. 스님은 근대 불교의 선구자로서,
만당(卍黨)을 조직하여 승려를 중심으로 한 개혁 운동을 펼쳤다. 스님은
한일합방의 비보를 듣자 만주로 건너가 의병학교(義兵學校)의 운영을
도와 혁명가들과 독립의 길을 모색하였다. 귀국 후 스님은 천도교의
최린·손병희·이승훈 등과 함께 3·1독립선언을
위한 민족적인 봉기를 추진하였다.
불교계에서는 만해
이외에도 백용성 스님이 독립선언 33인에 참여, 서명하였다.
한편, 불교교단은 오랜
억압에서 벗어나고 새로운 시대를 자각하면서 새로운 교육기관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이에 따라 명진학교가 설립되는 등 교계에는 많은 학교가
설립되었다. 그리고 지상포교(紙上布敎)의 일환으로 잡지를 간행하는
등 문화사업을 전개하며 불법수호와 전법도생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6) 해방 후 현대불교
1945년 해방과 더불어
한국불교에는 필연적으로 일제불교의 청산과 교단의 정화가 과제로 제기되었다.
해방의 혼돈기에 불교개혁과 교단 혁신을 위한 여러 단체가 조직되어
활동하였으나 좌우이념 대립의 와중에 휩싸여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전쟁 직후 일제시대 합법화되었던 스님의 결혼제도에 반대하면서 교단
정화를 요청한 청정비구들의 운동이 시작되면서 한바탕 홍역을 치르지
않을 수 없었다.
급기야 1954년 이승만대통령이
몇 차례에 걸친 정화지지 유시문을 발표하여 정화운동이 본격화되었다.
여러 차례의 혼돈 끝에 정화운동은 성과를 보여 조계종은 청정비구 중심의
출가승려로 재편되었고 여기에 반대한 스님들은 독립하여 창종을 하였다.
이리하여 이유야 어떻든 한국불교는 여러 종단으로 나뉘어졌으나 오늘날
불교계 각 종단의 협력기구인 〈한국불교종단협의회〉를 구성하여 전불교도의
총의를 대변하고 있다.
한편 한국불교의 장자종단인
조계종은 1960∼70년대 정화운동의 후유증으로 심각한 분란이 있었으나
1970년대 후반 뜻있는 불자들의 노력으로 포교, 역경, 도제양성이라는
종단의 3대 과업이 정립되었고, 이를 중심으로 대중불교운동과 민중불교
활동이 전개되는 등의 성과가 있었다. 그리고 1994년 봄에 일어난 종단개혁운동은
많은 종도의 동참 속에 개혁회의라는 초법적인 개혁기구를 탄생시켜
〈종헌〉과 각종 〈종법〉등 제도적 개혁을 단행하고 총무원과 더불어
도제양성과 포교를 전담하는 기구로 교육원, 포교원을 독립시켜 종단
활성화의 기틀을 만들었다.
5. 조계종의 성립과
정신
한국불교의 정통을
이어받은 조계종은 근원을 가지산문을 창건한 도의(道義) 국사(國師)에
두고 있다. 즉 조계종은 달마 대사의 선법을 이어받은 6조 혜능 스님(曹溪)의
법통을 이어 받은 도의 국사가 그 첫 조상이라는 것이다. 조계라는 이름은
6조 혜능 스님이 주석하시던 중국 소주(韶州) 조계산의 이름을 따서
혜능스님을 지칭하던 이름이다. 그리고 종헌의 처음 장들에는 이와 같이
명시되어 있다.
제1조 본종은 대한불교
조계종이라 칭한다. 본종은 신라 도의(道義) 국사가 창수(創樹)한 가지산문(迦智山門)에서
기원하여 고려 보조(普照)국사의 중천(重闡)을 거쳐 태고 보우(太古普愚)국사의
제종포섭으로서 조계종(曹溪宗)이라 공칭하여 이후 그 종풍이 면면부절한
것이다.
제2조 본종은 교주이신
석가세존(釋迦世尊)의 자각각타(自覺覺他)의 각행원만한 근본교리를
봉체하며 직지인심(直旨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 전법도생(傳法度生)함을
종지(宗旨)로 한다.
제3조 본종의 소의경전(所依經典)은
금강경(金剛經)과 전등법어(傳燈法語)로 한다. 기타 경전의 연구와 염불
지축 등은 제한치 않는다. 〈조계종 종헌〉
이러한 기술에서 알
수 있듯이 조계종은 구산 선문 가운데 가지산문의 법맥을 이은 종단이며
그 종조는 도의 국사임을 알 수 있다.이와 같이 조계종은 신라 말에
성립되어 우리 불교의 주류를 형성하며 큰 위치를 차지하여 왔다. 그러기
때문에 조계종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한국불교의 핵심이 되어 왔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조계종은 종지인
직지인심, 견성성불, 전법도생의 세 기치는 선종으로서의 선지(禪旨)와
지향을 잘 나타내 주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달마대사가 선법을 주창하면서
내세운 ‘불립문자 직지인심 견성성불’의 선지를 계승함과 동시에 널리
법을 전하여 중생을 제도한다는 이 지향은 조계종이 나아갈 바를 잘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조계종은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그 종명을 상실하고 다시 일제시대를 겪으면서 ‘조선불교
선교양종’이라는 모호한 이름으로 불려왔다. 그러나 항일 운동의 결과
그 종명을 되찾게 된다. 1929년부터 일기 시작한 총본산 건설운동의
일환으로 태고사가 1938년 10월 준공되고, 1939년 5월경 전체 주지회의를
거쳐 1940년 7월경 태고사(현 조계사)라는 사찰 이름이 결정된다.
정진에
여념이 없는 오늘날 선원의 스님들
이 때 한국불교의 종명(宗名)문제
또한 거론됐다. 당시 한국불교는 일제의 사찰령에 의해 일본인이 지은
‘조선불교 선교양종’이라는 애매한 종명에 대한 교계의 불만이 적지
않았고, 마침 총본산도 건설됐으니 한국불교의 전통에 맞게 종명을 개정하자는
의견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마침내 1940년 11월 28일 31본산주지회의에서
‘조선불교조계종’이라는 종명이 확정, 같은 해 12월 9일 종명 개정에
대한 내용을 포함한 새로운 태고사 사법을 조선총독부에 제출한다. 1941년
4월 23일 총독부령 제125호에 의거, 사찰령 시행세칙 일부가 개정되고
여기에 기초해 ‘조선불교조계종’과 ‘태고사 사법(寺法)’이 성립되며,
6월 5일 총본산 태고사 주지선거를 거쳐 조선불교 조계종이 출범한다.
그리고 8. 15광복 이후
교단의 청정과 승풍을 진작하려는 종도들의 원력에 의하여 불기 2498년(1954)
정화운동이 일어나 자정(自淨)과 혁신으로 마침내 종단의 화합이 이룩되어
불기 2506년(1962) 3월 22일 종헌을 제정하고 통합종단이 출범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종단의 청정성과 삼보 호지의 기본 틀이 다져지고, 수행납자의
가풍이 진작되었으며, 포교와 가람불사에 힘을 기울여 한국 불교는 유례없는
교세 확장을 이루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와 같이 우리 역사를
관통하며 한국 불교의 핵심을 이루어온 유일한 종단인 조계종은 오늘날
많은 과제를 안고 있다. 아직도 민족이 분열되어 대립하고 있으며, 급격한
산업화, 도시화, 서양화로 정신적인 혼돈, 물질지향적인 가치관의 횡행,
민족문화 경시 풍조 등이 만연하고 있다. 특히 산업문명의 부산물인
환경오염은 심각하여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전지구적 차원에서 새로운
문명에 대한 갈망이 높아 가고 있다.
이러한 어려운 시대에
조계종은 민족통일의 정신적 지주가 되어야 하며, 인간의 욕망을 절제하고
자연환경을 살리는 새롭고 건강한 문명 창조의 사상적 밑거름이 되어야
한다. 또한 물질과 경쟁 위주의 사회에서 지치거나 상처입은 많은 대중을
동체대비(同體大悲)사상으로 포용하고 모두가 더불어 자유롭고 편안하게
살 수 있는 불국토를 이루어야 한다. 이 모든 과제가 우리 불자의 지혜와
노력에 달려 있다. 우리 불자들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공부하고
믿으며 실행에 나간다면 언젠가 찬란한 불국토가 우리 앞에 열리게 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