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다언다려
전불상응
多言多慮
轉不相應
16.
절언절려 무처불통
絶言絶慮
無處不通
17.
귀근득지 수조실종
歸根得旨
隨照失宗
18.
수유반조 승각공전
須臾返照
勝却空前
19.
전공전변 개유망견
前空轉變
皆由妄見
20.
불용구진 유수식견
不用求眞
唯須息見
21.
이견부주 신막진심
二見不住
愼莫進尋
22.
재유시비 분연실심
?有是非
粉然失心
15. 多言多慮하면 轉不相應이요,
말이
많고 생각이 많으면
더욱
더 상응치 못함이요,
지극한 도는 말로 표현할
수 없고, 마음으로 헤아릴 수 없습니다.
말이 많고 생각이 많으면
도는 점점 멀어집니다. 그것은 언어의 길이 끊어지고 마음 갈 곳이 없는
데서 발견되는 도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명 문장가라도
표현할 수 없고, 폭포수 같은 웅변가라도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유마 거사는
문수 보살의 물음에 묵묵히 말없이 계셨고, 달마 대사께서는 9년 간을
소림굴에서 면벽하였습니다.
대도가 이와 같기 때문에
말로 표현하고 마음으로 생각하려 하면 대도에서 점점 멀어지고 만다는
것입니다.
16. 絶言絶慮하면 無處不通이라.
말이
끊어지고 생각이 끊어지면
통하지
않는 곳 없느니라.
말이 끊어지고 생각이
끊어지면 통하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언어의 길이 끊어지고, 마음 갈
곳이 없어진 곳이라면 바로 구경처입니다. 본래면목(本來面目)의 경지에
도달하면, 걸릴 것도 없고, 자유자재하며, 사통팔달(四通八達)하여 어떤
곳이든 통하게 됩니다.
이를 일러 함이 없는
함이라 하고 취하고 버림이 없는 함이라 합니다. 부처님께서는 49년간
8만 4천 법문을 설하고도 ≪열반경≫에서는 일찍이 단 한마디도 설한
적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관세음보살도 그 많은
법문을 설함이 없이 설하였고, 남순동자(南巡童子)도 들음이 없이 들었습니다.
그렇다고 무정물처럼
되라는 것으로 알면 큰 착각입니다.또 말과 생각이 끊어진 곳에 집착하지
말아야 합니다. 집착하면 통하지 않아 아무 것도 모르게 됩니다.
17. 歸根得旨요 隨照失宗이니,
근본으로
돌아가면 뜻을 얻고
비춤을
따르면 종취를 잃나니,
자기의 근본자성으로
돌아가면, 종지를 얻는다고 하였습니다. 종지를 얻는다는 것은 대도를
성취한다는 것입니다.
비춤을 따른다는 것은
비추어 보는 것을 따른다는 뜻으로, 즉 마음으로 대상을 보고 식별함을
따라간다는 말입니다. 자기가 생각나는 대로 번뇌망상(煩惱妄想)이나
업식망정(業識妄情)을 따라 가면 본래면목은 볼래야 볼 수 없습니다.
왜냐, 어두워져서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18. 須臾返照하면 勝却空前이라.
잠깐
사이에 돌이켜 비춰보면
앞의
공함보다 뛰어남이라.
잠깐 동안에 돌이켜
비춰보고 자성을 바로 깨치면 앞의 공한 경계보다 수승하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공했느니, 공하지 않느니 시비하는 것은 소용없는 소리라는
것입니다.
부처도 중생도 아닌
허공처럼 적멸의 경지, 곧 생사도 열반도 아닌 전공의 경지는 우리의
안심입명처(安心立命處)가 아닙니다. 여기서도 다시 돌이켜 봄으로써
그 자리가 바로 수승한 일종이라는 구경처입니다.일종의 자리에는 공이란
말도 붙일 수도 없습니다. 이 자리는 일체 철학을 거부하는 자리입니다.
19. 前空이 轉變은
皆由妄見이니,
앞의
공함이 전변함은
모두
망견 때문이니,
앞에서 공함이 이렇게도
변하고 저렇게도 변하는 것은 모두 망령된 견해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도 아공(我孔), 법공(法空), 공공(空空) 등 18공, 20공을
설하셨지만, 중생의 근기에 맞추어 말씀하셨을 뿐입니다.
공함을 여러 가지로
표현한 것은 중생의 망령된 견해 때문이며 진공(眞空)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20. 不用求眞이요 唯須息見이라.
참됨을
구하려 하지 말고
오직
망령된 견해만 쉴지니라.
누구든지 깨치려면
진여본성(眞如本性)을 깨치려 하지 말고 망령된 견해만 쉬어버리라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쉬면 곧 깨닫는다 고 하였습니다.
달마 스님께서도 ‘모든
반연을 쉬면 한 생각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또 어떤 선사는
‘참선자는 천번 쉬고 만번 쉬라’고 하였습니다. 쉬고 쉬고 또
쉬라는 것입니다. 모든 반연을 쉬고, 생각을 쉬면 깨닫게 됩니다. 구름이
걷히면 자연적으로 태양이 밝게 빛나듯이, 태양을 따로 찾으려 하지
말고 망상의 구름만 걷어버리면 된다는 것입니다. 일체 중생은 부처님과
같은 진여자성을 다 갖추고 있는데도 보지 못하는 까닭은 망견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 망견이 쉬어 버리면 본성은 저절로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21. 二見에 不住하여
愼莫進尋하라.
두
견해에 머물지 말고
삼가
쫓아가 찾지 말라.
두 가지 견해는 양변의
변견을 말합니다. 이 변견만 버리면 모든 견해도 따라서 쉬게 됩니다.
그러므로 양변에 머물러 유(有)와 무(無), 선(善)과 악(惡), 시(是)와
비(非), 증(憎)과 애(愛) 등 무엇이든지 변견을 따르면 진여본성은 영원히
깨닫지 못합니다.
22. ?有是非하면, 粉然失心이니라.
잠깐이라도
시비를 일으키면
어지러워
본 마음을 잃으리라.
짧은 시간이라도 시비가
생기면 자성을 근본적으로 잃어버린다는 뜻입니다.
시비가 일어나면 잔잔한
호수에 돌을 던짐과 같아서 일파만파가 있게 됩니다. 그리하여 근본자성을
흐리게 합니다. 불법은 옳고, 세법은 그르다든지, 선이면 좋고, 악이면
무조건 배척한다든지 하는 시비심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으면 그것은
큰 병통이 됩니다.
진여자성을 깨쳐 대도를
성취하려면 이 시비심부터 버려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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