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불
왕생자들이 부처님의 설법을 듣는 모습 (동화사 염불암 극락 회상도)
염불(念佛)
불교에는 염불, 참선,
주력 등 중생의 능력과 근기에 맞는 다양한 수행법이 있다.
염불이란 일반적으로
마음 속으로 부처님을 항상 생각하는 것을 말한다. 흔히 주위에서 ‘나무
관세음보살’, ‘나무 아미타불’, ‘나무 석가모니불’ 등 부처님을
부르는 소리를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이처럼 부처님께 귀의하고
모든 것을 부처님의 뜻에 따라 수행하는 것이 염불이다. 염불에는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진리를 생각하는 법신염불(실상염불)과 부처님의 공덕이나
모습을 마음에 그려보는 관상(觀像) 염불, 그리고 부처님의 명호를 부르는
칭명(稱名) 염불이 있다.
『아함경』에서는 세
가지, 여섯 가지, 열 가지로 염불의 종류를 구분하고 있다. 즉 염불을
지극 정성으로 하면 번뇌가 사라져 하늘에 태어나거나 열반을 얻을 수
있다고 한다.
대승경전에서는 삼매에
들어 염불하는 염불삼매를 설한다. 이에 따르면 염불은 죄를 없애고
삼매 중에 부처님을 친견하는 것은 물론, 부처님의 나라에 태어나기를
발원하면 반드시 태어난다(念佛往生)고 한다. 그래서 『아미타경』에서는
깨달음을 이루지 못한 사람이라도 임종할 때 일념으로 아미타불을 열
번만 부르면 서방정토에 왕생한다고 하였다.
염불은 중국에 와서
그 방법과 내용이 더욱 발전하였다. 모든 부처님을 마음 속에 떠올리는
‘통(通) 염불’과 특정한 부처님만을 마음에 떠올리는 ‘별(別) 염불’로
구별하기도 하였는데, 이런 구분보다는 어떤 형태로든 부처님의 이름을
부르고 신앙하는 일이 일반인들이 실행하기가 쉬우므로 나중에는 아미타부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만을 염불이라 했던 것이다.
염불은 누구나 쉽게
행할 수 있는 수행법으로서 대중의 호응이 높았다. 어려운 교리를 공부를
하지 않아도 극락왕생할 수 있다는 점 때문에 일반대중이 선호한다.
신라시대의 원효스님이 무애박을 두드리며 ‘나무아미타불’을 지성으로
부르면 극락에 왕생할 수 있다고 가르치신 이래 염불은 지금까지 불교인의
수행법의 대명사가 되었다.
염불하는 방법은 부처님을
그리워하면서 명호를 지극히 부르는 것이다. 즉 언제나 부처님과 함께
하며 살기를 발원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염불을 하면서 자신의
소리를 언제나 생생하게 들을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마음이
산란해져 입으로는 염불을 하면서 속으로는 잡생각을 하게 된다. 부처님을
부르는 동작 하나에도 정신을 모아 흐트러짐이 없는 상태가 진정한 염불이다.
지극 정성으로 염불하면서 부처님을 친견했다는 사람도 있고, 몸에서
빛을 발하는 방광(放光)을 얻었다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그 결과보다
진심으로 부처님을 그리워하고 생각하는 과정에서 마음에 사심이나 탐욕
등 번뇌망상이 사라지는 경지를 체험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염불을 할 때 반드시
갖추어야 할 세 가지가 있다. 첫째, 믿음(信)을 가져야 한다. 부처님과
가르침에 대한 굳은 믿음이 있어야 하며 흔들리지 않아야 한다. 또한
염불을 함으로써 나도 부처님처럼 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믿음이 없으면 어떤 소원도 헛되게 될 것이다. 둘째, 원력(願)이 있어야
한다. 작게는 일상적인 소원에서 크게는 불도를 이루고 중생을 제도하고자
하는 원력이 있어야 한다. 원력이 없으면 엔진이 없는 배와 같아 힘차게
나아감이 없이 그냥 물결에 떠다니듯 될 것이다. 셋째, 실천(行)이 따라야
한다. 실천행이 없는 믿음과 원력은 그것이 아무리 크고 위대하더라도
뜻을 성취하지 못할 것이다. 실천행이란 일상 중에 항상 염불과 십선업을
닦는 것을 말한다. 십선업이란, 살생하지 않는 것, 훔치지 않는 것,
삿된 음행을 않는 것, 헛된 말 하지 않는 것, 아첨하지 않는 것, 이간질
하지 않는 것, 악담하지 않는 것, 탐내지 않는 것, 성내지 않는 것,
어리석지 않는 것 등이다.
정근(精勤)
정근은 선법(善法)을
더욱 자라게 하고, 악법(惡法)을 멀리 여의려고 부지런히 쉬지 않고
수행한다는 뜻이다. 이는 염불과 같이 한마음 한 뜻으로 불보살님의
지혜와 공덕을 찬탄하면서 그 명호를 부르며 정진하는 것을 말한다.
이는 산만한 마음을 안정시켜 편안하게 하며 어떤 환경에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맑고 밝아지게 하는데 그 의의가 있다.
정근을 할 때에는 다른
생각을 다 놓아 버리고 오직 평온한 마음으로 부처님의 한량없는 공덕을
믿고 일념으로 정진해야 한다. 불보살님의 명호를 부르면서 그 명호에
집착하거나, 무엇인가 얻으려고 하면 오히려 정근에 장애가 된다. 항상
자세를 바르게 하고 기운을 안정시켜 몸을 흔들거나 경거망동하지 말아야
하며,
염불
정근(축서사 대웅전)
음성은 너무 크게도
작게도 하지 말고 기운을 적당하게 하여 고르게 해야 한다. 정근할 때
마음을 안정시키는 방법의 하나로 염주를 돌리거나 절을 하면서 하는
방법도 있다. 그리고 정근은 대상과 일정한 시간을 정하여 할 수도 있다.
대개 아침과 저녁으로 예불을 모실 때에 석가모니불 또는 관세음보살의
명호를 부르며 정근을 하고, 부처님의 위신력에 의해서 서방정토 극락세계에
왕생하기를 발원할 때는 나무 아미타불 또는 지장보살의 명호를 부르며
정근을 한다. 하지만 어느 염불이든 하나를 정해서 일상 중에 꾸준히
해나가는 것이 좋다.
참선(參禪)
불교의 수행법하면
누구나 참선을 떠올린다. 참선은 염불과 함께 한국 불교의 대표적인
수행법이다.
참선은 익숙하면서도
왠지 어렵게 느껴지기도 한다. 이러한 참선은 앞서 공부해온 참회나
발원 그리고 기도 등과는 차이점이 있다. 앞의 것들이 다소 외부 지향적인
요소를 지니고 있다고 한다면, 참선은 철저히 내부지향적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밖을 향해서 무언가를 간구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돌이켜 비춘다는데 참선의 특징이 있다.
이것은 가장 불교다운
수행법이라 할 수 있다. 초기 경전에 의거해 보건대, 부처님의 제자들은
다만 법문을 듣고 각자 나무 밑이나 한가한 곳에 가서 사유한 것으로
되어 있다. 부처님은 외부의 어떠한 신과 같은 대상을 향하여 복을 빌거나
현실적 문제의 해결을 바라도록 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다만 스스로의
마음을 비추어 보아 지혜를 발현시켜, 자비심으로써 세상을 살아나가도록
가르치셨던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참선은
가장 불교적 수행이라 할 수 있으며, 지금까지 해온 참회나 발원 혹은
기도 등도 결국은 참선을 제대로 하기 위한 준비과정 내지는 적응단계라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다. 참회를 통해서 비워진 마음자리에 발원을 채움으로써
자기변화가 시작되었고, 기도를 통하여 강력한 변화를 체험하였다면,
이제 그 마음자리 자체를 밝히는 것이 바로 참선이다.
참선으로 대표되는
수행법의 종류에는 여러 가지가 전해진다. 태국, 스리랑카, 미얀마 등
동남 아시아의 남방 불교권에서는 비파사나(vipassana)라는 수행법이
전해지고, 한국을 비롯한 중국, 일본등 북방 불교권에서는 선종의 화두(話頭)나
공안(公案)의 의미를 추구하는 간화선과 조용히 자신의 본성을 비추어보는
묵조선(默照禪)등의 수행법이 전해지고 있다.
1) 참선이란
참선(參禪)이란 ‘선(禪)에
참입(參入)한다’는 뜻이다. 참입이란 마치 물과 우유처럼 혼연일체가
된다는 의미이며, 선은 산스크리트어 드야나(dhyana)를 음사한 것으로
‘고요히 생각한다’ 또는 ‘사유하여 닦는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그래서 옛 문헌에서는 사유수(思惟修)로 번역하였다. 따라서 참선이란
‘깊이 사유함’이라 정의할 수 있다.
사찰수련회때
참선하는모습(송광사)
참선의 진정한 의미는
‘본마음·참나’인 자성자리를 밝히는 데 있다. ‘본마음·참나’는
어느 누구에게나 본래부터 갖추어져 있으며, 청정무구하여 일찍이 티끌
세간 속에 있으면서도 물든 일이 없이 완전하다. 이러한 청정무구심에
관해서는 사실상 말로써 표현할수 없기 때문에 다만 비유를 통해서 그
일단을 엿볼 수밖에 없다. 그 일례를 들어보자면, 『금강경』에 관한
다섯 스님의 주석을 함께 모은 〈금강경오가해〉에 다음과 같은 야부스님의
게송이 있다.
‘대나무
그림자 섬돌을 쓸어도 티끌하나 일지 않고,
달빛이
연못을 꿰뚫어도 물에는 흔적하나 남지 않네.’
‘竹影掃階塵不動,
月穿潭底水無痕.’
대나무 숲 사이로 바람이
훑고 지나가면 대나무가 움직일 때마다 마당에 비친 대나무 그림자도
함께 움직인다. 그러나 아무리 대나무 그림자가 마당과 섬돌을 쓸어내려도
마당 위의 띠끌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 그림자가 아무리 움직인들 마당이
쓸어질리 있겠는가? 이와 마찬가지로 보름밤의 교교한 달빛이 저 맑은
연못 밑바닥까지 환하게 비추어준다고 하더라도 물에는 달빛이 뚫고
지나간 자취가 남을 까닭이 없다.
이것은 비록 세파에
찌들고 시달려 살아가는 인생이라 할지라도 본래의 성품은 조금의 이지러짐도
없다는 것을 말해 준다. 이것을 ‘본마음’이라고도 하고 ‘참나’라고도
하며, ‘자성청정심’이라고도 한다.
참선은 이러한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에
관한 확고한 믿음 내지는 인식 상에서 출발하여야 한다. 즉 내가 본래
완벽하다는 데서 출발하는 수행인 것이다. 따라서 완벽을 향해서 나아가는
수행, 즉 불완전한 나를 완전한 나로 만들어 가는 것이 아니라, 본래
완전한 나를 확인해 나갈 따름이라고 하는 것이다.
2) 참선의 자세
참선수행을 한다고
하면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궁금해하지 않을 수 없다.
얼핏 좌선의 자세를 연상하기도 한다. 하지만 참선수행은 ‘아무 생각도
안 하는 것’에서 시작된다고 말할 수 있다. 다시 말하자면, 지금까지
해오던 일체의 사량 분별을 쉬는데서 참다운 수행이 시작된다고 하는
것이다.
좌선
그러기에 선종가람의
입구에는 ‘이 문안에 들어와서는 알음알이를 두지 말라. 알음알이가
없는 텅 빈 그릇에 큰 도가 충만하리라.(入此門內 莫存知解 無解空器
大道充滿)’ 라는 글귀가 붙어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알음알이를 쉰다고
하는데, 그러면 알음알이라는 것이 무엇일까? 그것은 지금까지 머릿속에
간직해온 온갖 지식과 분별심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옳고 저것은
그르다던가, 이것은 맞고 저것은 틀리다던가, 이것은 이익이 되고 저것은
손해가 된다는 등의 판단분별이 모두 알음알이에 불과한 것이다.
참선을 하는데는 시간과
공간에 구애받지 않아야 하겠지만, 처음 시작하는 사람은 환경이 조용한
곳이 좋겠다. 예를 들면 절에서는 부처님이 모셔진 법당이나 선방 등의
정해진 공간에서 하고, 집이나 직장에서는 특별히 참선을 할 수 있는
장소가 없기 때문에 일정한 곳을 선택해서 하면 될 것이다.
참선의 자세도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에 걸림없이 자세를 취해도 되겠지만 전통 수행법인
결가부좌(結跏趺坐)나 반가부좌(半跏趺坐)를 하는 것이 좋다. 결가부좌와
반가부좌 방법은 다음과 같다.
① 주위를 정리 정돈한
다음 좌복을 깔고 그 자리에 편하게 앉는다.
② 앉는 자세는 먼저
왼쪽 다리를 오른쪽 다리의 허벅지 위에 올려놓고,
③ 남은 오른쪽 다리를
왼쪽 다리 허벅지 위에 올려 놓으면 된다.
④ 허리와 양어깨는
편한 상태로 쭉 펴고 두 손은 먼저 왼손 등을 오른손 위에 포개어 올려놓고
엄지를 살짝 마주 닿게 하면 된다.
이 자세는 오랫동안
앉아서 수행하는데 적합하다. 그러나 초보자는 허리가 아프고 다리에
쥐가 나는 등의 고통이 따를 수 있으므로 힘이 든다고 여길 때는 몸을
움직여서 굳은 자세를 유연하게 풀어 줄 필요가 있다. 익숙해 질 때까지는
약 30-50분 등으로 시간을 정해 놓고 단계적으로 시간을 늘여 가는 것이
좋을 것이다.
또한 참선을 한다고
억지로 오래 앉아 있다 보면 몸에 무리가 생기는 경향이 있다. 이때는
아쉬워 말고 잠시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법당이나 방안 또는 도량을
거닐면서 몸의 균형을 맞추어 조절해 주는 것이 좋다. 이것을 방선(放禪)
또는 경행(經行)이라 한다. 이 때에도 화두를 잊고 잡생각을 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방선 또한 참선의 연장이기 때문이다.
결가부좌
반가부좌는 결가부좌가
어려운 사람들에게 적합한 것으로 결가부좌 자세에서 다리를 한 쪽만
다른 다리의 허벅지에 올려 놓는 자세이다.
참선을 할 때는 호흡이
중요하다. 그냥 마음대로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는 것이 아니다. 만약
그렇게하면 마음이 답답하고 혼란스러워진다. 참선할 때 호흡을 잘하면
정신이 집중되고 마음이 편안해진다. 그래서 참선할 때 호흡은 단전호흡법을
취하되 단전호흡법에 머무르면 안된다.
다음의 순서로 따라
해보자. 먼저 자세를 바르게 하고 거친 숨을 몇 번 몰아 쉰 다음 입으로
숨을 쉬는 것이 아니라 코로 숨을 들이 마셨다가 내쉰다. 이때 주의해야
할 것은 콧구멍의 미세한 털도 움직이지 않을 만큼 조용히 숨을 쉬어야
한다. 그리고 호흡은 아랫배 즉, 단전까지 내려보냈다가 천천히 내쉬는
방법으로 계속하면 된다. 처음부터 천천히 쉬는데 너무 신경을 쓰지
않도록 한다. 호흡이 익숙해질 때까지는 들이쉬는 숨은 좀 크게 하고,
내쉴 때는 천천히 부드럽게 한다.
어떤 사람은 행주좌와
어묵동정이 모두 수행법 아님이 없다고 해서 기존의 수행법과 선지식의
가르침을 부정하고 각자 나름대로 독특한 수행법을 개발해서 공부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것은 대단히 위험한 것이다. 따라서 불교의 수행법을
배우는 사람은 전래된 수행법과 선지식의 말씀을 의지해서 수행법을
잘 익혀서 공부해야 할 것이다.
1.소를찿아나서다.
2.소의
발자취를 발견한다
3.소을
찾다
4.소를
겨우 붙잡다
5.소를길들이다
6.소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다.
7.소를
타고 집으로돌아와서 타고 온 소도 잊어 버리다
8.소도
자기도 다잊어 버리다.
9근원으로
돌아가니 소를 찾는 것도 잃은 것도 아니더라.
10.세상속으로
다시 나가 어울리며 중생을 구제하다
3) 관법수행
① 수식관(數息觀)
고요히 사유하다보면
여러 생각들이 끊임없이 생겼다가 소멸한다. 어느 때는 찰나지간에 나의
생각을 이끌고 어디론가 가버리기도 하고 또 어느 때는 과거, 현재,
미래를 넘나들며 기억을 되살리기도 한다. 때문에 처음 수행에 입문하는
사람은 자기 생각을 붙잡을 수가 없다. 정말 한 생각에 몰두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호흡을 관찰하며 공부하는 법이 나왔는데 이를 수식관(數息觀)이라
한다. 이 수행은 숨을 들이쉬면서 들숨을 관찰하고, 숨을 내쉬면서 날숨을
관찰하는 수행법이다. 이때 호흡은 무리하지 않는 범위에서 천천히 깊게
숨쉬기를 한다.
숨쉬기는 우리의 생명을
유지하는 행위이지만 숨을 깊이 의식을 집중하고 살아가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긴장하거나 불안한 마음이 있을 때 천천히 그리고 깊게
숨을 쉬면 마음의 간장과 불안이 어느새 풀어진다. 이러한 긴장이완
효과 뿐만 아니라 수식관은 분별심을 없애는 수행법이다. 경전에서는
수식관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먼저 조용한 장소를
택한다. 그리고 결가부좌 또는 반가부좌한다. 마음에서 다른 생각을
없애고 눈을 코 끝에 둔다. 그리고는 호흡에 의식을 집중한다. 즉 긴
숨이 나가면 숨이 길다고 알고, 나가는 숨이 짧으면 숨이 짧다고 알고,
나가는 숨이 차면 숨이 차다고 알며, 들어오는 숨이 차면 차다는 것을
알고, 들어오는 숨이 따뜻하면 들어오는 숨이 따뜻하다고 알며 나가는
숨이 따뜻하면 나가는 숨이 따뜻하다고 안다.
몸을 모두 관찰하여
들숨 날숨이 모두 이와 같음을 안다. 숨이 있으면 숨이 있다고 알고,
숨이 없으면 숨이 없다고 안다. 만약 숨이 마음으로부터 나가면 또한
마음으로부터 나간다고 알고, 만약 숨이 마음으로부터 들어오면 또한
마음으로부터 들어온다고 안다. 이와 같이 사유하여 욕심으로부터 해탈을
얻고, 악함이 없으며, 깨닫고 관찰함에 기쁨과 편안함을 얻으면 이를
초선(初禪)의 단계라고 한다.
이 수식관은 마음에
더 이상 분별하는 마음이 없어지는 단계를 최고의 경지로 삼는 수행법이다.
② 부정관(不淨觀)
부정관(不淨觀)이란
말 그대로 우리 몸의 부정한 모습을 보는 것을 말한다. 그 방법은 이렇다.
묘지로 가서 시체(해골)의
부정한 모습을 보고 거처로 돌아와서 발을 씻고 편안히 앉아 마음과
몸을 유연하게 가지고 모든 번뇌를 떠나 그 시체와 나의 몸을 비교하며
관한다. 즉 마음을 집중하여 발목, 정강이, 넓적다리뼈, 허리뼈, 등뼈,
옆가슴뼈, 손뼈, 어깨뼈, 목뼈, 턱뼈, 이빨, 해골 등에 마음을 집중한다.
또한 마음을 미간(眉間)에 둔다. 그 다음에는 앉은 자리, 한 방안, 한
집안, 한 가람, 한 고을, 한 나라에 가득히 썩어가는 시체가 있는 것을
관한다. 이것을 부정관이라 한다.
이 부정관은 탐욕과
애욕이 많은 사람들에게 인생이 무상함을 깨우쳐 탐욕과 애욕에서 벗어나게
하는 수행법이다.
③ 지관(止觀)과 삼매(三昧)
지(止)는 산스크리트어
사마타(samatha)의 의역으로 마음이 적정하여 온갖 번뇌를 그침을 말한다.
수행을 하면서 마음이 여러 가지로 흔들려 정신의 집중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지혜의 세계로 들어가지 못한다. 따라서 마음에 왔다갔다하는
망상의 흔들림을 보고 이들이 모두 찰나에 변화하는 무상한 것임을 알고
멈추게 하는 작업을 지(止)라고 한다.
관(觀)은 산스크리트어
비파사나(vipassana)의 의역으로 마음이 지의 상태에 이르면 자신의
마음 속에 왔다 갔다하는 마음의 움직임을 스스로 볼 수 있게 된다.
그렇게 자신의 마음을 보게 되면 현상의 세계에서 쉽게 끌려가던 마음
씀씀이를 보게 된다. 그리하여 자신이 그동안 무엇에 마음이 흔들리고
욕심을 부리고 조급해 했는지를 알게 된다. 이러한 앎은 자신을 지혜의
세계로 이끌어 간다.
삼매는 산스크리트어
사마디(samadhi)의 음사어로 중국에서 한역을 하면서 삼매로 정리된
것이다. 삼매는 지관의 상태에서 자신의 마음을 보는 지혜가 깊어져서
외부의 어떠한 소리나 변화에도 흔들리지 않고 집중하고자 한 대상에
마음이 몰입한 상태를 말한다. 그래서 참선하는 사람은 참선삼매, 염불하는
사람은 염불삼매에 들었다고 말하고 또는 무아지경에 빠졌다고 한다.
이러한 경지에서만이 최상의 지혜인 무분별지(無分別智)를 얻게 되는
것이다.
4) 간화선(看話禪)
인도불교가 중국불교로
이어지면서 수행체계에서도 하나의 변화가 있었다. 그것이 이른바 화두(話頭)나
공안(公案)인데 이는 하나의 문제를 깊이 참구하여 그것의 본래 의미를
확실히 깨닫는 간화선으로의 전개인 것이다. 이 수행법은 공안 또는
화두를 통해서 수행자로 하여금 큰 의심을 일으키게 하고 스스로 그
의심을 해결하여 깨달음을 얻게 하는 수행법이다. 인도불교의 선정법은
사성제, 팔정도, 12연기 등의 교리의 의미를 수행자가 탐구의 대상으로
삼는데 반해, 중국의 선종에서는 언어보다는 그 이면에 숨겨져 있는
근본 내용의 정확한 의미를 곧바로 찾아 들어가 확인하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따라서 참선은 불립문자(不立文字) 교외별전(敎外別傳)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이라 하여 경전의 가르침에 매이지 말고 그 밖에
길이 있음을 강조한다.
달마대사와
혜가스님과의 안심문당 [安心問答] (해인사 퇴설당)
달마대사를 중국선종의
초조(初祖)로 삼아 6조 혜능대사에 이르기까지 선종은 중국에서 번창하였다.
초조 달마스님과 2조 혜가스님과의 만남 이야기는 극적이다. 마음이
괴로워 찾아온 혜가스님에게 달마스님은 ‘아픈 마음을 가져오라. 그러면
내가 치료해주겠다’고 일갈한다.
특히 선종에서는 극단적인
모순으로 보이는 말도 서슴치 않고 한다. 중국의 조주스님은 어떤 스님이
와서 물어보기를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하니 ‘있다’고 하였고
다른 스님이 와서 물으면 ‘없다’고 하여 앞뒤가 다른 대답을 하기도
하였는데, 이런 말이 1,700여개나 정리되어 공안이나 화두로서 후대
수행자들이 풀어야 할 문제로 남아있다. 이처럼 간화선은 초심자들에게
매우 어렵게 여겨지지만 앞의 수식관보다 훨씬 확실하고 호방한 수행법이어서
출가수행자들이 주로 몰두하는 방법이다.
5) 참선 수행의 유의점
참선수행을 하면서
수행이 제대로 되어지고 있는지 스스로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
굳이 선지식에게 묻지 않아도 점검이 어느 정도 가능한 것이다. 그것은
우선 스스로 마음이 점차 너그러워지고 있는지 좁아지고 있는지 확인하면
된다. 시간이 갈수록 세간사에 담담해지고 공부가 재미가 나면 제대로
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와는 달리 점차 남의 허물이 눈에 더욱
잘 보이고 세간사의 시비에 관심이 끊이지 않는다면 점검해볼 여지가
있다.
또한 배우자나 아이들에게서
우리 남편, 부인 혹은 어머니가 절에 다니더니 사람이 많이 달라졌다는
소리를 들으면 좋다. 그래서 주위의 다른 이에게도 우리 배우자 혹은
어머니처럼 절에 보내라고 추천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더욱 좋다.
절에 다니면 생활에 변화가 있어야 한다. 5년을 다니거나 10년을 다니는데도
전혀 변화의 조짐이 없거나, 주위에서 변화를 느끼지 못한다면 돌이켜
반성할 여지가 있다.
참선을 하는 것은 ‘나’를
없애는 연습이다. ‘작은 나’를 없애고 ‘큰 나’의 입장에서 살아가는
연습인 것이다. 그리하여 부처님 앞에서 겸허해지고 공경심을 갖듯이,
집이나 직장에서 겸허함과 공경심으로 모든 이들을 대할 수 있다면 제대로
수행하는 것이 된다. 궁극적으로 남편이나 직장 상사를 부처님이나 스님
대하듯이 더욱 공경하는 마음으로 대하게 되고, 아랫사람에게 겸허한
태도를 가질 수 있다면 참으로 절에 다니는 보람이요, 진정한 수행이
된다.
이렇게 얘기하면, 상대방이
그럴 만한 자격을 못 갖추었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없다고 말할 수도
있다. 자격과 조건이 되는 이를 공경하기는 쉽다. 그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일정한 조건을 아직 갖추지 못한 이에게 공경심과 겸허함으로
대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이러한 태도야말로 결국 남이
아닌 자기 스스로를 존중하는 귀한 마음가짐으로서, 일상에서 선을 닦는
마음가짐인 것이다.
참선은 무위의
공덕을 짓는 최상의 수행법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참선은 무엇보다도
선지식과의 만남을 필수로 하며, 선지식과의 만남은 작은 복부터 짓는
일에서 비롯된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복은 자신이 지은 만큼
나타나게 되어있다. 무한한 복을 지은 이에게는 무한한 선지식이 다가오며,
자그마한 복을 지은 이에게는 자그마한 선지식이 나타난다. 그러므로
선지식을 못 만났거든 자신의 복이 부족함을 인식하고 꾸준히 복을 지어나갈
일이다. 또한 복은 그냥 복으로만 생각하지 말고 무위의 공덕이 되도록
하여야 수승한 복이라 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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