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1남1녀의 자녀를
둔 49세의 주부다. 더불어 개인택시를 운전하는 남편을 돕기 위해 5평
남짓한 미용실을 운영하고 있는 직업인이기도 하다.
지금의 내가 있기 전,
나는 남편의 교통사고와 운영해 오던 의상실의 사업 부진, 뒤늦게 배운
미용기술의 거듭되는 낭패로 계속된 시련을 이기지 못하고 알콜 중독자라는
부끄러운 멍에를 쓰고 살았다. 또 설상가상으로 겹친 갑상선 합병증
등의 병마와 싸우며 수년간 망연자실하는 삶을 살아야 했다.
기억하기조차 싫은
한 때의 수렁에서 스스로 헤쳐 나올 수 있었던 것은 분명 부처님의 가르침을
공부하면서부터다. 그 동안 참회의 눈물을 얼마나 흘렸는지. . .
생각해보면 나는 태어나기
전부터 내 어머니의 몸을 빌어 절에 다닌 것 같다. 불교가 모태 신앙인
셈이다.
혜화동에서 양장점을
운영하면서 만난 남편과 아이를 낳아 키우면서 절에 다녔지만 그것은
오로지 기복적인 신앙 행위였다. 내 어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나 또한
주체적인 신앙심 없이 우리 집, 우리 아이를 잘 되게 해달라고 관세음보살을
염하며 그저 기도하고 경을 외웠던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이기적이기
그지 없지만 당시 나는 그런 생각을 추호도 하지 못했다.
결혼 전부터 혜화동에서
양장점을 운영하면서 사치와 술에 젖어 살며 호화로운 생활을 했던 나는
남편을 만나서야 비로소 안정적인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러나
화사한 봄날도 잠깐, 서서히 불행이 다가오고 있었다. 남편의 놀음으로
속상해 하고 있을 때 빌려준 돈을 사기 당했고 엎친데 덮친 격으로 그동안
내가 붓고 있던 계마저 깨져 낭패를 봤다.
불행이 연이어 닥쳐오자
나는 다시 알콜의 달콤함에 빠지게 되었고, 의상실과 가정은 엉망이
되었다.
그래도 뭔가 변화를
시도하고자 혜화동에서 독산동으로 이사를 했다. 의상실을 새롭게 단장하고
재기의 몸부림을 치는 동안 10여년의 세월 속에 남매를 두었고 남편은
해외취업을 나갔다. 그즈음 독산동 법성사 스님의 도움으로 집을 사게
되었다. 갖은 사고와 실패로 집을 살 형편은 아니었지만 스님 말씀만
믿고 전세대신 신월동에 연립주택을 샀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지금의
미용실 건물을 매입할 수 있었다.
연립 베란다에 ‘예원의상실’
간판을 달고 양장점을 하면서 금강사 스님을 뵙게 되었다. 무리한 집
마련에 남편도 없이 힘겨워 하는 나에게 스님께서는 전생의 업 때문이니
전생의 빚을 갚고 있다고 생각하고 하루빨리 원망심에서 벗어나 관세음보살
기도로 업을 닦으라고 용기를 주셨다. 또 수계법회에서 법등심이라는
불명도 주셨다.
스님의 따사로운 격려와
함께 불명을 받고 보니 마음속엔 참회심이 서서히 일었다.
‘모두 내 탓이다.
내 업이구나. 어제의 모든 것 이젠 다 잊어 버리자. 다시 시작하자.
나로 인하여 태어난 저 남매에게 부모의 책임을 다하자’며 마음을 다졌다.
그러나 기성복 시대에
접어들면서 의상실 운영이 순탄치 못하면서 또 다시 시련이 다가왔다.
그래서 미용 기술을 배우기로 결심하고 해외가족 특혜를 받으며 독산동
부녀복지관을 다녔다. 뒤늦게 시작한 일이라 여러 번 포기하고 싶었을
만큼 힘겨울 때가 많았지만 그 때마다 스님의 가르침 대로 관세음보살을
염하면서 하루하루를 노력하며 보냈다. 그렇게 인내하는 사이 미용사
자격증을 따 39세에 미용실을 개업해 새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미용실 개업초기, 미용기술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긴 했지만 차츰 자리를 잡아갈 즈음 남편이 4년만에
귀국했다. 남편은 다시 해외로 나가질 않고 택시회사에 취직해 영업용
택시를 몰았다. 그것이 불행의 화근이었다. 계속 이어지는 남편의 교통사고는
내 마음을 흔들었고, 새로운 분출구를 절실히 원하고 있었다.
개종에 대한 유혹이
가장 먼저 마구니로 다가왔다. 절실히 의지할 데가 필요했던 나는 똘똘
뭉쳐다니며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이웃에게 형제자매가 되어주는 그들(기독교
신자들)의 혜택(?)을 받고 싶었던 것이다.
그 때 바로 남편이
대형 교통사고를 일으켰다. 눈 속에 미끄러져 사고가 났는데 차는 폐차를
시켜야 할 지경이었지만 정말 다행히도 남편과 손님은 부상을 입었을
뿐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다. 항상 남편과 같이 했던 차에 걸린 염주
때문이었을까. 사고현장 주위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운이 좋다며 입을
모았다.
남편이 7개월간 병원에
입원해 있으면서 두차례 수술을 받는 동안 나는 매일같이 절을 찾아
부처님께 참회의 기도를 드렸다. 스님께 많은 도움을 받고도 장사가
잘되지 않을까 하는 장삿속으로 잠시나마 타종교로 개종하겠다는 마음을
일으켰던 나의 어리석음을 눈물로 호소했다. 그렇게 기도를 하면서 나는
알게 되었다. 부처님께서 내게 어떤 깨침을 주시기 위해 남편을 살려
주셨다는 것을.
친지들이 병원에서
남편을 간호하는 동안 나는 미용실에서 하루종일 일을 했다. 서툰 미용
실력에 어느새 자신감이 붙어 일이 훨씬 수월해지긴 했지만 여간 고단한
일이 아니었다. 어깨가 결려 힘줘 버티고 서 있을 수 조차 없었지만
미용실 셔터문을 내리고 나면 남편을 간호하기 위해 병원으로 갔다.
그리고선 새벽녘에야 집으로 돌아와 밥을 해 아이들을 등교시켰다.
미용실, 병원, 집을
오가며 정신없이 지내다 보니 발바닥과 입이 부르텄다. 그러면 그럴수록
관세음보살을 염하는 나의 마음은 더욱 간절해졌다. 가끔 나 자신도
알 수 없는 눈물이 쏟아졌다. 어리석음을 후회하는 눈물, 참회의 눈물,
부처님 품에 되돌아간 환희심의 눈물이었다.
남편은 퇴원한 후 택시회사에
다시 입사했다. 덕분에 나는 미용실 운영과 가정 살림에만 전념할 수
있었고 생활은 차츰 호전되어 갔다.
그러나 너무 무리하게
버텨 왔던 탓일까. 건강이 좋지 않았다. 숨이 차고 눈두덩이가 부었다.
갑자기 침침해진 시력은 사물을 분간하기 힘들 정도였고, 30분이 멀다
하고 화장실을 가야 했다.
종합병원으로 가보라는
동네 병원 의사 선생님의 진단은 삶의 행복을 맛볼 찰나에 청천벽력의
철퇴가 되어 다가왔고, 두려움의 나날을 보내야 했다. 무엇보다 사춘기에
접어든 남매가 걱정되었다.
나 대신 미용실을 운영해
줄 미용사를 들인 나는 관세음보살님에 매달리며 한가닥 희망을 갖고
신촌 세브란스 병원으로 진료를 받으러 다녔다. 병원에서 내린 선고는
갑상선 합병증. 시력이 더욱 나빠져 한 달에 몇 번씩 안경을 바꿨고,
몸 구석구석이 으스러지듯 아팠다.
몸이 아프자 신앙이고
뭐고 다 귀찮았다. 나는 무력한 무종교인으로 자포자기하는 삶을 선택했다.
다시 술을 입에 댔다. 병든 몸과 정신적 고통을 잊기 위한 유일한 길이라
생각했다.
형제, 친지들과의 다툼,
이웃과의 다툼, 제대로 돌아가는 게 하나도 없자 부처님에 대한 원망이
커져만 갔다.
“왜 제가 이런 고통에
시달려야 합니까? 아직 죽을 순 없습니다.”
목숨에 대한 강한 집착과
현실을 거부하려는 강한 반항심이 내 모습을 흉하게 만들었다. 그럴수록
아들 딸의 얼굴을 대할 면목은 더욱 없어져 갔다. 사춘기인 남매에게
그저 “너무나 아파서, 고통을 이길 수 없어 술을 마신다”며 구차한
변명으로 일관했다. 그러면서도 아이들이 엇나갈까봐 “엄마와 너희
자신을 위해 절에 가 기도해 달라”고 매달렸다.
그 와중에 텔리비전을
통해 사후 시신기증에 대한 뉴스를 들었다. 시신을 기증함으로써 다른
사람들에게 한줄기 희망을 남기고 삶을 숭고하게 마감한 어떤 이의 감동적인
미담이었다.
언제 쓰러져 한줌의
먼지로 변할 지 모르는 내 몸뚱이가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이 된다면
그 또한 공덕이려니 생각하고 사후 장기기증을 신청했다. 그 증서는
흐트러진 나를 바로 잡는 채찍이 되었다.
남편과 아이들에게
내가 뇌사 상태가 되면 급하게 수술을 받아야 하는 사람들과 의학 연구진에
장기와 시신을 기증해 달라고 당부했다. 부처님 가르침대로 삶을 마감하는
길이 바로 이것임을 알아주길 바랄 뿐이었다. 유언을 하고 나니 비로소
나 자신과 남을 바로 볼 수 있었다.
숨쉬는 마지막 순간까지
나로 인해 태어난 저 남매에게 ‘엄마로서의 책임을 다하고 가자’는
마음이 생겼다. 엄마로서 책임을 다 해야겠다는 결심이 서자 술을 끊지
않을 수 없었다. 술을 입에 대지 않자 원망심이 차츰 사라졌다. 병의
고통까지 가슴에 안아 버렸다.
그러자 근래에 느낄
수 없었던 너그러움이 일었다. 신기하게도 힘들게만 느껴지던 호흡이
훨씬 수월해졌고 시력이 점차 회복되기 시작해 안경도 벗게 되었다.
또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던 얼굴이 맑아졌다.
문득 부처님이 날 버리지
않으시는구나 느꼈다. 다시 하루도 잊지 않고 관세음보살 기도를 드렸다.
남편은 개인택시를
매입해 운행하게 되었고, 불교방송을 들으며 정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절에 다니는 나를 말린 적은 없었지만 그동안 종교에 대해 얼마나 무심했던
남편이었던가. 그가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어려운 이웃들에게 은행
온라인을 통해 작은 보시를 하며 보시행의 공덕도 알게 되었다. 아이들에게도
동참을 시켰다. 온 가족이 불교방송과 불교TV를 청취하고 시청하면서
나날이 달라져 갔다.
미용실을 운영하며
가정 살림을 꾸리느라 엄두도 못 냈던 불교공부가 어찌나 재미있던지
눈 찔끔 감고 96년 9월에는 동국대학교 사회교육원의 동국불교TV아카데미에
등록해 본격적으로 불교공부를 했다.
생활이 예전보다 더욱
바빠지긴 했지만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즐거움을 느끼게 되었다.
저절로 미소가 나왔고, 삶에도 여유가 생겼다.
내가 살고 있는 신월동은
그 당시 케이블 TV 난시청 지역이어서 화면상태가 좋지 않았다. 그래서
미용실을 찾는 손님들에게 불교TV를 보라고 소개할 수는 없었지만 손님
머리를 손질하면서 은근히 불교 이야기를 꺼냈다. 평소 웃음을 잃지
않고 살아갈 수 있게 된 연유와 불교와의 인연 이야기, 부처님의 연기법
등을 말하면서 절에 나가지 못하더라도 안방에서 불교TV를 시청하며
기도하고 수행하면 부처님의 가피력을 느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해주곤
했다.
손님들이 정법을 배워
실천할 수 있게 <법구경>을 복사하여 나누어주고 맑고 향기로운
모임에서 보내주는 책도 주면서 봉사활동에 동참하도록 권했다. 항상
웃음을 잃지 않고 친절하게 보시행으로 영업을 계속하다 보니 미용실
운영이 원만하게 돌아갔고, 건강도 좋아졌다. 불교공부를 시작하고부터는
항상 상대방을 부처님처럼 생각하고 감사해 했다. 조금만 여유가 생겨도
작은 성의지만 좋은 일에 동참하게 되었다.
이렇게 행복한 나날도
잠시, 또다른 시련이 닥쳐왔다. 불교공부를 하며 하루하루를 즐겁게
보내긴 했지만 딸아이 뒷바라지 하랴, 하루종일 서서 손님들 머리 손질
해주랴 힘겨운 날들의 연속이었던지, 결국 지난해 1월5일 낮 미용실에서
TV를 향해 안면이 마비된 채 쓰러지고 말았다. 무려 5시간 동안이었다.
그 와중에서도 나는 관세음보살을 염했다. 그리고는 살려달라며 움직임
없는 몸부림을 쳤고, 소리없는 아우성을 쳤다. 뇌졸중의 시초였다. 의식을
회복하고 보니 혓바닥은 딱딱하고 머리는 깨어질 듯 아팠다. 왼쪽 몸은
그때까지도 여전히 마비가 돼 있었다. ‘아! 살았구나. 부처님 고맙습니다.’
그날 남편과 아이들은
미용실 안을 들여다 보고 이상하게 여기면서도 내가 TV를 보고 있으려니
생각하고 남편은 택시운행을, 아이들은 독서실에 갔단다. 한식구 같이
10년 동안을 살아온 애견 방울이가 의식을 겨우 회복한 나를 2층 집으로
인도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어떻게 되었을지 모를 일이었던 것이다. 딱딱했던
혓바닥이 차츰 부드러워 지고, 움직이지 않던 몸과 의식이 회복되면서
내 몸에 온기가 돌기 시작했다.
몇 시간 동안이 죽음의
체험과 같이 느껴졌다. 생이란 풀 끝의 이슬이요, 바람 앞의 등불이요,
그림자, 꼭두각시 물거품이며 번개같고 꿈결같다고 했던가. 죽음을 남의
일로만 생각 했는데 정말 상상도 못했던 일이 내게 생겨난 것이었다.
그 후 동국대 한방병원에서
한약을 복용하고 물리치료를 받으면서 몸이 차츰 회복되자 모든 것이
새로웠다. 다시 태어난 듯 했다. 숨을 들여 마셨다 못 내 쉬면 그만인데
부처님 가피력 아니고서는 이런 기적이 일어날 수 없다고 생각했기에
나의 믿음은 더욱 굳건해 졌다. 열반에 드신 부처님이 2천5백년이 훨씬
넘은 지금에도 우리와 함께 호흡하며 살아 계신다고 믿었다.
하루도 쉴새 없이 미용실을
찾는 손님들에게 나는 내가 겪었던 일들과 부처님의 가피력을 반복해서
들려주고 있다.
“제행무상 제법무아
일체개고의 모든 현상은 상이다. 집착을 떨치면 내 몸도 내 것이 아니며
내 자식도 내 재산도 내 것이 아닌 것이 된다. 내가 벌어서 쓰는 돈이지만
재물의 욕심에서 벗어 나야만 우린 서로 돕게 되고 항상 상대방에 감사하며
하심하는 마음으로 원망심을 지워버리게 될 것이다. 숨을 들여 쉬었다가
못 내쉬면 죽음인데 숨 쉬는 그 순간까지 열심히 노력해 탐진치의 번뇌로부터
벗어나야 마음의 문이 열린다”고.
그리고는 불법에 귀의하라며
오계수지를 권유한다. 앉아서 받고 서서 파하더라도 일단 부처님 법을
알게 되면 따뜻하게 세상 살아가는 참 의미를 깨우치게 될 것이라고
말해준다. 또 오계를 실천하면 생활이 즐거워지고 자신이 변화되어 가정이
화목해질 것이라고 역설한다.
올해 둘째 아이가 대학에
들어가면 꼭 일요일 수계법회에 온 가족이 참여하려고 한다. 그리고
온 가족이 불교계의 후원자가 될 것이다. 숨이 붙어 있는 순간까지 부처님
말씀 포교하겠다는 발원으로 조계종 포교사 시험에 응시했다. 조계사신도로
등록도 했다. 여러 가지 불교입문서를 구입해 읽으면서 신행의 길을
찾은 나는 청소년 포교의 시급함을 알게 되었고, 요즘은 청소년 포교를
위한 갖가지 방법을 찾고 있다.
얼마 전에는 고3 아들과
대학 1년생인 딸을 데리고 도선사에서 3천배 기도를 드렸다. 온 몸을
땀으로 적시면서 절을 하는 동안 전신에 일어나는 짜릿한 전율과 환희심은
어떤 언어로도 표현할 수 없었다.
이처럼 신행의 기쁨은
크다. 미흡한 나의 글을 통해 많은 불자님들이 부처님 제자로서 살아가는데
용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며, 우리 다 함께 불퇴전의 정신으로 불법
구현에 앞장섰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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