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법(法, dharma)
불교에서는 진리를
깨달으면 누구나 성불을 할 수 있다고 한다. 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이란
다른 종교에서 말하는 절대 신이 인간에게 보여주는 계시와는 달리 인간의
노력으로 얻는 진리를 말한다. 그 진리의 내용은 우리에게 부처님의
팔만 사천 법문으로 설해져 있다.
이 진리의 말씀을 법(法)이라고
한다. 법이란 범어의 다르마(dharma)를 의역한 것으로서, 진리 그 자체,
또는 부처님의 가르침이라는 뜻이다. ‘법을 깨닫는다’, ‘법을
본다’는 것은 불교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체험이며, 이것은 곧 깨달음
즉, 열반과 성불을 의미한다. 따라서 불교에서 일상적으로 쓰이는 법이라는
용어는 바로 ‘진리’와 ‘교법’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또 존재하는 바의 모든
것, 즉 모든 사물(事物)을 일컬을 때도 법이라 한다. 삼법인 중 제법무아에서
말하는 법, 즉 연기에 의해 성립된 세상의 모든 존재도 이 법에 해당된다.
이와 같이 불교에서
법의 개념은 다양한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경전과 논서에 기술될 때는
진리와 교법이라는 의미 외에도 ‘존재’라는 의미로 쓰일 때가 많기
때문에 경전을 읽을 때는 이를 생각해야 한다.
2. 연기(緣起
)
마하보디대탑
- 공존의 세계관
-
일구월심 사유하던
성자에게
모든 존재가 밝혀진
그 날
그의 의혹은 씻은 듯이
사라졌다.
연기의 도리를 깨달았으므로.
<자설경>
싯달타 수행자는 진리,
즉 법을 깨달아 부처님이 되었다. 그 진리의 내용은 바로 연기(緣起)이다.
연기란 모든 것은 원인이 있으며 원인으로 생겨나고 원인이 사라지면
소멸한다는 것을 말한다. 이것을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설명하신다.
고행상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고 (此有故彼有)
이것이 태어남으로
저것이 태어난다. (此生故彼生)
이것이 없기 때문에
저것이 없고 (此無故彼無)
이것이 사라짐으로
저것이 사라진다. (此滅故彼滅)
<증아함경>
연기법은 인연법(因緣法)
또는 인과법(因果法)이라고도 하는 것으로서 모든 것은 독자적으로 존재하지
않고 상관관계 속에서 존재한다는 진리이다. 즉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바로 이런 연기의 법칙 즉, 서로 원인과 결과가 되어 서로 의존하며
생겨난다는 것이다.
이 연기법에 의하면
우리의 고통과 슬픔(老死憂悲苦惱)은 독자적으로 우연히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하여 신의 뜻이나 숙명에 의하여 나타나는 것도 아니다.
거기에는 반드시 그럴 만한 원인과 조건이 있게 마련이다.
부처님은 이 연기의
법칙이 당신이 만든 것도 아니며, 부처님이 세상에 나오든 나오지 않든
간에 진리로서 변함없는 것으로, 당신은 다만 이 진리를 깨달았을 뿐이라고
하셨다. 요컨대 연기법은 세계와 인간에 대한 불변의 진리라는 것을
강조하신 것이다. 아함부 경전에 ‘연기를 보는 자는 법을 보고, 법을
보는 자는 연기를 본다. 그리고 연기를 보는 자는 부처님을 본다’고
하였는데 이러한 말씀은 수행자 고타마가 깨달은 핵심이 바로 연기법임을
잘 말해 주고 있다.
연기법은 세계의 현상
관계뿐만 아니라, 어떠한 이유에서 우리의 고통과 불행이 생겨나고 어떻게
하면 그것을 극복하여 즐거움과 행복의 이상에 도달할 수 있는가 하는
인생의 실상을 바르게 알고 그 바른 인생관에 따라 노력하고 수양하여
이상을 성취하는 길을 제시하고 있다
3. 중도(中道)
- 극단을 떠난
바른 길 -
“제자들아, 그대들은
두 극단에 달려가서는 안되나니, 그 둘이란 무엇인가? 온갖 욕망에 깊이
집착함은 어리석고 추하다. 범부의 소행이어서 성스럽지 못하며 또 무익하니라.
또 스스로 고행을 일삼음은 오직 괴로울 뿐이며, 역시 성스럽지 못하고
무익하니라.
나는 이 두 가지 극단을
버리고 중도(中道)를 깨달았으니, 그것은 눈을 뜨게 하고 지혜를 생기게
하며, 적정(寂靜)과 증지(證智)와 등각(等覺)과 열반(涅槃)을 돕느니라.”
<상응부경전>
<잡아함경>
초전
법륜지
중도는 부처님이 성도하신
직후 5명의 수행자를 찾아갔을 때 처음으로 설하신 내용이다. 이 초전법륜의
내용은 중도(中道)와 사성제(四聖諦), 오온(五蘊) 무아(無我)였다고
한다.
부처님 당시의 사회는
사상적 혼란에 휩싸여 있었다. 당시 육사외도를 비롯한 전통사상과 신흥
사상가들은 크게 고정불변의 아트만의 끊임없는 윤회를 인정하는 부류가
주장하는 상주론(常住論)과 윤회를 부정하고 한 번의 생으로 모든 것이
끝난다는 부류가 주장하는 단멸론(斷滅論)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따라서
이들은 고행주의나 쾌락주의로 흐르고 있었다.
고행주의에 빠져있는
그들에게 고행주의와 쾌락주의라는 극단을 벗어난 올바른 길을 가르치는
것은 그들로 하여금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해하는 첩경이 된다. 즉 중도와
사성제는 연기법을 현실에 맞게 정리한 것이다.
중도는 어정쩡한 상황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중도는 잘못된 것을 떠나 옳은 입장에 서는 것이다.
그래서 경전에서 ‘중도는 곧 정도를 말한다’(中者正也)고 하는 것이다.
즉 중도의 실천으로 제시된 것이 바로 팔정도(八正道)이다. 고행주의와
쾌락주의의 극단을 떠난 바른 길이 바로 팔정도이다.
또 부처님은 내세나
영혼의 존재와 같은 형이상학적 질문에 대해 침묵으로 일관하셨는데,
그런 질문에 대답을 한다면 삿된 소견이나 의혹만 더할 뿐이며 연기와
중도의 입장에 서야 진실을 볼 수 있다고 설하신다. 그와 같은 형이상학적인
논의에 얽매이기보다 올바른 생활과 수행, 즉 중도의 실천을 통해 해탈의
길을 찾을 것을 권하신다.
4. 삼법인(三法印)
히말라야
- 존재의
참모습 -
우주 만유를 관통하는
법칙이 연기라면 존재의 실상을 나타내는 것이 바로 삼법인(三法印)이라
할 수 있다. 삼법인은 부처님의 팔만사천 법문 가운데 가장 기본이 되는
진리를 세 가지로 요약한 것으로서 세 가지 진실한 가르침이란 뜻이다.
도장 인(印)자를 쓴 것은 도장을 찍는다는 뜻으로 틀림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말이다.
삼법인은 제행무상(諸行無常),
제법무아(諸法無我), 일체개고(一切皆苦) 세가지를 말하며, 일체개고
대신 열반적정(涅槃寂靜)을 넣기도 하는데 이 네 가지 합하여 사법인(四法印)이라
부르기도 한다.
첫째, 제행무상은 세상의
모든 것은 항상 그대로 있지 않고 변한다는 뜻이다. 물질은 성주괴공(成住壞空)하며,
육신은 생노병사(生老病死)하고 정신은 생주이멸(生住離滅)을 되풀이
하고 있다. 사물이 무상하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영원한 것으로 보는
잘못된 생각(전도몽상, 顚倒夢想)을 버릴 때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고, 그 속에서 바르게 사는 길을 알게 된다.
둘째, 제법무아는 모든
변하는 것에는 자아(自我)의 실체(實體)가 없다는 것이다. 모든 존재는
항상 변하며 인연 따라 서로 상관관계에 의해서 존재한다. 따라서 인연
따라 어느 한 시점에서 다른 시점으로 변해 가는 과정일 뿐이다. 이런
무아의 가르침은 우리에게 자기 중심적 사고와 아집이 허망한 것임을
가르친다. 아집과 소유욕을 없애면 인연으로 형성된 존재의 실상을 깨칠
수 있고, 모든 사람과 사물이 어우러져 더불어 살며 인류세계의 화합과
평화가 이루어 질 것이다.
셋째, 일체개고는 모든
변하는 것은 괴로움이라는 것이다. 즉 무상하기 때문에 고(苦)라는 것이다.
괴롭다고 느끼는 것뿐만 아니라 기쁨과 즐거움 또한 일시적인 것인데도
여기에 집착하여 고통을 낳는다. 모든 것은 변하여 고정 불변하는 실체가
없다. 기쁨과 즐거움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욕망의 불을 끄고 이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게 되면 모든 고통이
사라지고 마음의 평안을 구할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은 열반적정이다.
열반은 진리의 구현이다. 무상과 무아의 진리를 완전히 구현하여 깨달음을
성취하여 모든 번뇌와 욕망, 대립과 고통이 사라진 고요한 평화의 상태이다.
불자들은 이 삼법인의 가르침을 자신의 생활 속에 구현하여 최상의 평화와
자유인 열반을 향해 부지런히 정진해야 한다.
5. 사성제와 팔정도
- 괴로움으로부터의
해방 -
현실의 고통에서 벗어나
진리를 구현하는 수행의 길을 가르쳐 주는 길이 바로 사성제(四聖諦)이다.
사성제란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라는 뜻으로 부처님이 녹야원에서
다섯 비구에게 행한 최초의 설법 내용이기도 하다.
네가지 진리가 있다.
무엇을 네 가지라 말하는가? 이른바 괴로움의 진리(苦聖諦), 괴로움이
일어나는 원인에 대한 진리(苦集聖諦), 괴로움의 소멸에 대한 진리(苦滅聖諦),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에 대한 진리(苦滅道跡聖諦)이다.
<잡아함경>
사성제란 괴로움(苦)과
괴로움의 원인(集)과 괴로움의 소멸(滅)과 괴로움의 소멸방법(道)에
대한 가르침이다. 그래서 이를 줄여 고집멸도의 사성제라고도 한다.
이 네 가지는 서로서로 원인과 결과를 이루며 현실세계와 이상세계의
대비를 이루고 있다.
인간은 생로병사의
고통 속에 있다. 인간의 현실에는 이 네 가지 고통 외에도 수많은 고통이
존재하고 있다. 이것이 인간과 모든 존재의 현실이며,. 이것이 고성제이다.
그러면 고통은 왜 발생하는가?
그것은 바로 집착에서 비롯된다. 무상한 세계에서 영원한 것을 찾고
자기 것이 본래 없는 데도 헛되이 집착함으로 말미암아 고통을 초래하는
것이다. 이를 설명한 것이 집성제이다.
이 세상에 고통이 있다면
고통 없는 세계도 있고 거기에 이르는 길도 있을 것이다. 고통이 사라진
해탈, 열반의 세계가 있음을 가르치는 것이 바로 멸성제이다.
해탈, 열반에 이르는
길은 무엇인가? 여덟 가지 길이 있으니 바로 도성제인 팔정도(八正道)이다.
팔정도란 여덟 가지 바른 수행의 길이라는 뜻으로 다음과 같다.
① 정견(正見) : 먼저
바로 보는 것이 바른 삶의 시작이다. 바른 견해로 편견 없이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다. 즉, 모든 것을 연기의 입장에서 보는 것이다. 세상 만물이
모두 서로 의지하여 존재하는 것이며 모든 현상에는 그 원인과 결과가
있다는 것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며 이것을 여실지견(如實知見)이라
한다. 어떠한 편견이나 선입견도 버리고 사물이 존재하는 것을 있는
그대로 봄으로써 바른 길을 찾을 수 있는 것이다.
② 정사유(正思惟)
: 바른 생각이다. 바른 견해를 가짐으로써 바른 생각을 할 수가 있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고 이치에 맞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③ 정어(正語) : 바른
말이다. 말은 자신의 생각과 의견을 표현하는 수단이다. 거짓말, 이간시키는
말이나 욕, 비방하는 말은 그 사람의 비뚤어진 생각과 시각을 나타낸다.
항상 바른 생각과 말을 하여 구업(口業)을 짓지 말고 상대방을 존중하는
부드러운 말을 해야 한다.
④ 정업(正業) : 바른
행동이다. 일체의 행위를 바르게 해야 한다. 바른 생각과 말에서 나아가
이치에 맞는 행동을 해야 한다.
⑤ 정명(正命) : 바른
생활이다. 옳은 일에 종사하고 몸과 마음과 말의 신구의(身口意) 삼업을
청정히 하면서 바로 사는 것을 말한다. 즉 바른 직업관을 가지고 생업에
임해야 한다.
⑥ 정정진(正精進)
: 바른 노력이다. 올바른 이상을 가지고 물러섬 없이 꾸준히 노력하는
것을 말한다.
⑦ 정념(正念) : 바른
기억이다. 항상 바른 생각을 잊지 않으며 생활하는 것을 말한다. 즉,
고(苦), 공(空), 무상(無常), 무아(無我)를 항상 마음 속에 간직하고
생활함으로써 어떤 변화에도 능히 대처하여 흔들림 없이 살아가는 것을
말한다.
⑧ 정정(正定) : 바른
선정이다. 번뇌, 망상이 없이 마음과 몸을 평안하게 하고 바른 선정을
익히는 것을 말한다.
괴로움과 집착의 상태를
벗어나 열반의 길로 들어가는 방법이 바로 팔정도이다. 이 여덟 가지의
성스러운 길은 각기 하나 하나 따로 떨어져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우리 불자들은 팔정도의 전제 조건이
되는 정견을 굳게 가지는 것이 올바로 살 수 있는 길임을 알아, 생활
속에서 중도 즉 팔정도를 늘 생각하고 실천하여야 한다.
6. 오온(五蘊)
오온은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의
다섯 가지 요소로서 인간을 이루고 있는 물질적인 요소와 정신적인 요소를
말한다.
색(色)이란 육체를
가리킨다. 육체는 물질적인 4가지 요소, 즉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四大)와
사대로 이루어진 다섯 종류의 감각기관인 눈, 귀, 코, 혀, 몸 등이다.
수(受)는 내적인 감각기관과
외적인 대상들과의 만남에서 생기는 감수 작용이다. 고락사(苦樂舍 :
괴로움, 즐거움,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음) 3종이 있다.
상(想)은 외부 환경의
모습을 감각기관이 잡아서 취하는 정신작용이다.
행(行)은 형성하는
힘, 즉 의지작용을 말한다.
식(識)은 일반적으로
분별, 인식 및 그 작용을 말한다.
7. 십이처(十二處)와
십팔계(十八界)
윤회도
무엇을 인식하고
그에 대한 정신작용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인식 기능을 가지고 있는 감각기관(육근,
六根)과 거기에 상응하는 인식의 대상(육경, 六境)을 만나야 하며 그것을
인식하는 인식작용(육식, 六識)의 3가지 요소가 반드시 필요하다.
십이처란 눈·귀·코·혀·몸·마음의
6개의 감각기관(육근)과 그에 상응하는 6개의 대상(육경) 즉 빛깔·소리·냄새·맛·감촉·생각을
합친 것이다.십팔계는 십이처에 안·이·비·설·신·의
6가지 인식작용(육식)을 합친 말이다.
8. 업(業)과 인과(因果)
- 불자의 가치관
-
부처님 당시, 많은
사상가들이 출현하여 갖가지 주장을 폈다. 그중에서도 특히 여섯 명의
외도가 유명했다. 이들은 대개 운명론을 주장하거나 쾌락과 향락을 쫓아
마음대로 살라고 가르쳤다. 부처님은 이 주장을 비판하시고 이들의 가르침이
초래할 윤리적 폐해를 경계하셨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인과의 법칙은 원인이 있으면 반드시 결과가 따른다는 것이다. 이 세상의
어떤 행위도 반드시 결과를 낳는다. 착한 일을 하면 좋은 결과가 따르며,
악한 일을 하면 나쁜 결과가 온다. 이를 ‘선인선과(善因善果) 악인악과(惡因惡果)’의
인과응보(因果應報)라 한다. 또한 그 결과를 낳는 근원적인 행동을 업(業)이라
한다. 업은 산스크리트어 까르마(karma)에서 나온 말로 ‘의도를 가진
행동’을 말한다. 부처님은 절대자의 섭리나 정해진 운명을 부정하고,
모든 것은 인간의 의지와 행동에 따라 성립한다고 설하셨다.
즉 스스로의 의지나
행동으로 자신의 운명을 개척할 수 있으며, 삶의 모든 결과는 그 누구도
아닌 바로 자신의 책임이라는 것이다. 설령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주어진 것처럼 보이는 출생계급이나 삶의 조건도 사실은 모두 자신의
업에 의한 과보이다. 만일 악한 일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당장 악한 결과가
나타나지 않는다 해도 언젠가는 그 악업의 과보를 받게 된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그 사람의 지금 모습을 보면 전생을 알 수 있고, 그 사람의
현재 행위를 보면 내생을 알 수 있다고 <삼세인과경>에서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고통스러운
과보를 초래하는 악업의 원인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미혹(迷惑)이다.
번뇌에 물들어 진리에 어둡고 마음이 흐려져 악업을 짓게 되고 그로
말미암아 과보를 받게 되는 것이다. 이것을 혹(惑)-업(業)-고(苦)의
삼도(三道)라고 부른다. 반대로 진리와 깨달음을 지향하는 마음은 선업을
낳고 그 결과 선한 과보를 받게 된다.
진리와 깨달음을
지향하는 마음을 보리심(菩提心)이라 한다. 업을 헤어날 수 없는 굴레로
생각하는 잘못된 이해도 있지만, 오히려 자신의 주체적인 의지와 행동으로
삶을 변화시켜 나가는 긍정적인 지향과 원리를 담고 있다. 수행의 길도
마찬가지이다. 전생이나 과거에 길들여진 나쁜 습성과 잘못된 행동을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진정으로 참회하고 바로 수행하면 깨달음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다.
몸(身)과 말(口)과
뜻(意)으로 짓는 업의 과보는 엄정한 것이어서 한치의 오차도 없다.
이것을 인과율(因果律)이라고 한다. 악업을 많이 지을수록 자신의 삶은
구속되고 고통스러워진다. 그러나 선업을 쌓을수록 인생은 자유로우며
깨달음으로 나아갈 때 장애가 없어진다. 즉 자신을 구속하는 것도, 자신을
자유스럽게 하는 것도 모두 자기 자신이다. 악행을 멀리하고 선행을
닦으며 또한 수행에 정진함으로써 중생의 마음에서 벗어나 깨달음을
얻어야 한다.
7. 계율 - 불자의 규범
보살계수계식(축서사)
계(戒)는 불교도의
생활 윤리, 또는 삶과 수행의 규범이다. 계율은 일반적으로 승가를 구성하는
사부 대중이 준수해야 할 삶의 방식과 규율을 말하며 일반적으로 통칭한다.
계와 율은 엄밀하게
말하면 서로 구분되는데, 계는 불교의 수도에 들어가고자 하는 사람이
자발적으로 지켜야 할 도덕적 수행이며, 율은 승가의 질서 유지를 위하여
필요한 타율적인 행위 규범을 뜻한다.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중도(中道)는 어디까지나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 법(法)에 근거를 둔
생활방식을 자각하고 주체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행위였다. 그러한 생활
방식을 계(戒)라고 한다.
그러나 교단이 커지고
수행자가 많아지게 되면서 수행자 개개인의 자각만을 기대하기 어렵게
되고, 또 출가자로서의 훈련이 부족한 사람이나 전혀 자각이 없는 사람도
있었다. 따라서 수행자로서 허용될 수 없는 행위가 발생하게 되고, 그런
비행이 있을 때마다 부처님은 그것을 규제하여 금지조항을 만드셨다.
이것을 수범수제(隨犯隨制)라고 한다. 그러므로 불교의 율은 필요에
따라서 그때그때 제정한 것을 모아 놓은 것이다. 이와 같은 율은 경전의
결집 과정을 통해 계속 전승되어 왔고 출가자와 재가자의 규범으로서
계속 지켜지고 있으며 그에 대한 정기적인 점검으로 자자(自恣)와 포살(布薩)이
있다.
이러한 계율 이외에
우리나라를 비롯한 선종의 특색으로 청규(淸規)를 들 수 있다. 청규는
청정한 규칙이라는 의미로 대중 생활의 규율을 의미하는데, 당나라 백장
회해(百丈懷海)선사가 총림에서 시행해야 할 규칙을 제정한 뒤 각 사찰에서
저마다의 절에서 시행할 규칙을 마련하여 청규라 이르면서 성립된 것이다.
선재
동재
재가 불자가 수지하게
되는 5계, 10선계, 보살계는 모두가 이와 같은 계의 정신을 따르고 있는데
주체적인 선택이며 자율적인 것이다. 즉 누구의 강요도 없이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다. 계를 지킴과 파함에는 그것을 열어야 할 때와 닫아야
할 때가 있다. 이것을 지범개차(持犯開遮)라고 한다.
혹여라도 계율을
지키는 것이 보다 많은 사람들의 행복에 제약이 된다면 그 상황을 타개할
때까지 열고 또 닫을 수 있는 것이다. 계를 지키는 것은 스스로가 어떤
자리에서나 성실하고 참된 삶을 살겠다는 것으로 자연스러워야 한다.
이것이 중도에 입각하여 계를 지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계율은 불교도의
생활 윤리, 또는 삶과 수행의 규범으로서 결코 가벼이 볼 수 없는 것이며,
계를 가벼이 보는 것은 불교도의 삶을 이완시키는 원인이 된다. 따라서
계를 수지한 후에는 계율을 삶을 일관하는 좌표이자 가치관으로 삼아
스스로의 삶을 성실하고 참되게 영위하는 길잡이로 만들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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