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인류의 미래와 불교
오늘날 우리는 과학기술과
산업의 발달로 생활상의 편리와 풍요를 누리고 있다. 그러나 오늘의
세계는 사상 유례 없는 심각한 문제들에 봉착해 있다.
과학과 기술의 발전은
생활과 사회의 진보를 무한히 보장해 줄 것 같았으나, 과학의 대상인
자연은 이미 고갈되다시피 했고, 산업사회에서의 인간은 목적이 아닌
수단적 가치로 평가되어 인간성 소외 현상을 초래했다. 모든 가치를
물질적으로만 계산하는 배금주의적 사고와 경제 우선의 논리에 의해
절제와 검소의 미덕은 사라지고 한탕주의나 과소비 풍조가 계속되고
있다.
또한 자연을 지배와
정복의 대상으로 생각한 서구의 인간 중심적 사고는 급기야 지구촌 환경
파괴로 이어졌고, 이러한 생태계의 변화는 결국 새로운 질병의 발생과
수많은 생명체들의 멸종을 초래했다. 뿐만 아니라, 후기 산업사회의
정보화 시대로 접어들면서 전통적 가치관은 파괴되고, 날이 갈수록 생명
경시 풍조가 늘어나 낙태, 안락사, 자살, 인간 복제 문제 등에 대한
찬반 논쟁이 강도를 더해가고 있다.
이러한 현대 사회가
안고 있는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과연 있는 것일까?
우리는 앞으로도 계속
발생할 새로운 문제들에 대하여 근본적인 대처 방안을 찾지 않으면 안된다.
또한 산 좋고 물 좋기로
이름난 우리나라 금수강산은 그 이름을 잃어버린지 오래다. 이제는 가정마다
수돗물도 믿지 못해서 전문 생수업체에서 생수를 사서 먹는 지경에 이르렀다.
자동차와 각종 공장 굴뚝에서 나오는 매연으로 인하여 공기는 탁해지고
심지어는 도심 길을 걷는 것마저도 힘들게 되었으며, 비라도 오면 이
비가 산성비는 아닐까하는 걱정이 앞서는 지경에 이르렀다. 물과 공기의
문제만이 아니다. 쓰레기, 중금속, 방사능 등 환경과 관련된 수많은
문제가 우리를 위협하고 있다.
이러한 문제의 근본
원인은 무엇일까?
옛날에는 환경오염이
크게 문제되지 않았다. 인간의 행동은 자연속에서 너무나 미미했으며
그나마 자연은 인간이 행하는 모든 행동도 포용할 수 있는 순탄한 재생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자연의 재생력이 둔화되었고,
이제는 그 능력을 잃어버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7∼18세기 이래 산업혁명이
일어나면서 서양의 과학문명은 급속도로 발전하였다. 그리고 이 서구
문명은 근대화와 더불어 우리나라에 아무런 비판없이 받아들여 졌다.
특히 60년대 이후 경제개발 우선 정책의 시행으로 우리 사회는 복잡한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다.
물론 과학문명과 경제개발
정책만으로 이러한 상태가 된 것은 아닐 것이다. 과학문명과 결합된
인간의 자기 중심적인 욕심 때문에 이런 결과가 나타나게 된 것이다.
지구상의 모든 동식물들은
태양으로부터 에너지를 공급받아 자라고 있으며 이 동식물들은 서로간에
다양한 먹이사슬을 유지하며 하나의 균형 있는 생태계를 형성하고 있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의 욕망 때문에 자연환경을 파괴하기 시작했다. 나무를
베고 물을 끌어다 쓰고 도시를 건설하고 전기를 만들어냈다. 각종 질병을
치료하는 방법을 알아냈으며 여러 생활용품을 만들어서 물질적 풍요를
누리기 시작했다. 늘어나는 인구와 이들의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다양한
생산활동, 그리고 물질적 생활은 어느새 자연 생태계의 원활한 흐름을
위협하게 되었다.
무분별한
발복으로 숨을 못쉬는 지구(아프리카)
공해배출로
오염된 하천 (중국)
인간은 자신이 자연의
생태계 속에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자연을 그저 개발하고
이용할 대상으로만 보았으며 자연이 인간과 하나라는 것을 알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자연을 개발하는 것이 우리를 변형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으며 늘어가는 물질적 풍요가 자연을 훼손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개발의
훌륭한 성과라고 생각하는 착각 속에 빠졌던 것이다.
일찌기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데 식량은 산술급수적으로 늘어난다고 말한 서양의 학자가 있었다.
그러나 이 사람은 그러한 인구증가가 일으키는 문제보다 사람의 욕심이
더 많은 문제를 일으킨다는 점은 미처 생각지 못한 것이다.
간디는 ‘자연의 자원은
인류가 생존하기에 충분한 양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인간의 욕심을
충족시키기에는 부족하다’고 말했다. 인류의 탐욕으로 마침내 자연은
돌아올 수 없는 경지에 이르렀다.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환경문제를 두고 우리 불자는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연기의 가르침은 이러한 때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하겠다. 자연과 우리는 원래 둘이 아니며 서로
의지하면서 조화롭게 살아야 하는 존재임을 깨달아야 한다. 불교는 동체대비를
말한다. 나와 남이 둘이 아니기 때문에 큰 자비를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에 서면 나와 자연은 둘이 될 수 없다. 나와 자연이
둘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 자신의 몸을 스스로 망치는 일을 하지 않듯이
자연을 훼손하는 일도 하지 않을 것이다.
이제부터라도 우리는
불교적 가치관을 바탕으로 과학문명의 한계를 바르게 인식하고 인간성
회복을 위한 사회적 역할을 해야 할 때이다. 그리고 이데올로기와 지역,
계층간 갈등 구조, 상대적 박탈감에 따른 불평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인간 내면세계에 도사리고 있는 삿된 욕망을 제거하고, 불교가 지닌
조화 정신을 바탕으로 절대 자유, 절대 평등의 세계를 추구해야 할 때이다.
또한 자연을 지배하고 정복하는 인간중심적 자연관에서 인간과 자연의
조화와 균형을 추구하는 전일적全一的 우주관, 유기체적 세계관을 확립해야
할 때이다.
부처님께서는 일체중생
실유불성一切衆生悉有佛性의 사상을 통해 생명의 무한한 자유와 가능성을
강조한 바 있다. 아무리 하찮은 생명체라도 그 나름대로의 생존에 대한
존재 가치를 지니고 있음을 바르게 알고 이를 실천에 옮겨야 한다.
우리는 인간 생활의
기본적 요소인 의식주 생활에서부터 만족을 아는 생활 무소유와 근검절약의
생활이 환경을 살리는 길이며, 결국 불성을 소유한 자신을 살리는 길임을
명심해야 한다.
예를 들어 사찰에서
행하는 발우공양의 경우를 살펴보자.
음식물 쓰레기를 줄이고,
수질 오염을 막을 수 있는 차원을 넘어서서 지옥의 아귀 중생에게도
고통을 주지 않겠다는 적극적 생명관은 오늘날 우리 현대인에게 큰 교훈이라
아니할 수 없다. 나 하나의 실천이 무슨 도움이 되겠느냐고 소극적으로
생각할 것이 아니라, 나부터 바뀌면 세계가 바뀐다는 적극적인 사명감으로
생활 속에 실천해야 한다.
이를 위해 우선 가정에서는
쓰레기를 줄이기 위해 반드시 분리수거를 하고, 합성세제, 일회용품
등 환경오염의 소지가 있는 제품의 사용은 자제하며, 절제된 소비로
지나친 자원 낭비를 줄여나가는 것부터 실천에 옮겨야 한다.
여러 가지 어려운 여건에서도
그나마 청정한 지역으로 남아 있는 사찰 주변의 생태계를 보호하기 위해서,
절에 갈 때는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만약 차를 가져갔을 경우에는 절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주차하고 가급적 걸어서 참배를 하도록 함이 좋겠다.
또한 계곡을 올라가면서 계곡 주변에서 취사하는 사람들을 보면 지정된
장소에서 취사하도록 권유하는 등 청정구역을 보존할 수 있는 노력을
계속해 나가야 한다.
불자들이 생활에서
구현하는 이 작은 실천은 개인적으로 다소 번거로운 점도 있을 것이지만
자연환경 보호에 큰 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명심하고 지켜나가야 한다.
또한 개개인은 사회 속에서 환경보호의 파수꾼이 되어 환경을 지켜나가도록
해야 한다. 기업가는 자신의 상품 생산이 자연을 파괴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하며, 정치가는 정치가대로, 과학자는 과학자대로 자신의 영역에서 할
수 있는 모든 환경보호 활동을 펼쳐야 한다.
환경보전을 위한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각종 노력이 필요한 것이 사실이지만 이에 선행되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의식전환이다. 인간과 자연을 이분법적으로
생각하여 자연을 개발의 대상으로만 보고, 그래서 자연의 파괴를 부추기는
인간 중심적 사고를 벗어나야 한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멸하므로 저것이 멸한다”라는 부처님의 가르침은 여기에도 해당되는
진리이다. 자연이 파괴되면 인간 또한 그 삶을 지속할 수 없는 것이다.
자연의 아픔이 곧 우리의 아픔이라는 것을 명심하고 자연을 살리고 우리를
살리기 위해 다같이 노력해야 하겠다.
5. 한국 불교의 역할과
사명
1) 새로운 세기의 대안
21세기에 접어든 지금
세계는 새로운 질서를 향한 거대한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 있다. 이 소용돌이는
정치ㆍ경제ㆍ사회는 말할 것도 없고 문화와 나아가 인간의 행동양식이나
의식구조에 이르기까지 변화의 물결이 닿지 않는 분야가 없는 문명사적
전환기를 이루게 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민족
종교로서의 불교는 이 사회에 어떻게 이바지 할 수 있을까? 우리나라는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볼 수 없는 다종교 사회이다. 수많은 교회와 성당,
사찰 뿐만 아니라 각종 사이비 종교 집단이 난립해 있다.
그 많은 종교 단체들이
한결같이 인간을 교화시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사회는 여전히
부조리와 모순이 혼재하고 있으며, 종교 단체들 간의 반목과 질시는
오히려 사회 분위기의 혼탁과 분열을 조장하기도 한다. 또한 현대인들의
이기적 욕구와 무지로 인한 인간성 상실, 생태계의 파괴, 가치관의 혼란
현상 등은 윤리 도덕에 대한 회의적 태도를 초래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대립과 갈등,
분열의 시대에 연기緣起사상에 입각한 불교의 조화와 관용의 원리는
불교인들만의 사상에서 벗어나 우리 민족 전체의 사상으로 승화되어야
한다.
후기 산업사회의 정신적
갈등과 인간성의 변모는 불성佛性의 계발이라는 충고에 의해서 치유될
수 있다. 전쟁ㆍ인구ㆍ자원ㆍ공해ㆍ과학 등의 제 문제는 결코 법과 제도의
외형적 요인에 의해서 해결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오히려 올바른
사고와 견해를 바탕으로 한 정신혁명, 의식혁명 차원에서 질적 변화가
있을 때 가능한 것이다.
궁극적으로 한국 불교는
조화와 평화가 구현된 사회, 즉 불국정토를 실현하기 위하여 노력해야
한다. 개인 차원의 기복 신앙과 자비심을 바탕으로한 불쌍한 이웃 보살피기
수준의 봉사에서 벗어나 사회 정의 실천을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분단의
상징인 판문점
“중생이 앓으므로
나도 앓는다.”는 유마거사의 말처럼 국가와 국민들의 관심사에 무심해서는
안된다.
이제 한국 불교는 국민정신의
개혁을 위한 시민운동 차원으로 승화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출가
수행자와 재가자가 합심하여 불교를 좀 더 활성화하고 내실화해서 중생
제도라는 보살의 대원력을 세워야 할 것이다.
2) 민족 문화의 창조적
계승
불교는 이 땅에 전래
수용된 이래 지금까지 민족정신과 융화되어 우리 민족의 문화와 사상을
선도하였다. 특히 불교는 1,600여 년의 역사를 거치는 과정에서 우리
민족의 생활이념으로 흡수 통합되면서 우리들의 내면 세계에 깊이 내재되어
있으며, 독자적인 우리의 전통 사상으로 발전되었다.
우리는 대부분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개인의 종교에 관계없이 불교의 전통 문화에 의하여 형성된
생활양식과 관습 속에서 살고 있다.
그러나 오늘에 들어와서
사정은 급변하고 있다. 일제 36년간의 식민지배로 인하여 우리의 많은
전통적인 정신문화가 빛을 잃게 된데다가, 동족상잔의 6ㆍ25 전쟁으로
수많은 문화 유산이 파괴되고 분실되었는가 하면, 서구의 사상과 문화가
물밀듯이 들어와 급기야는 전통 문화의 단절 현상까지 초래하게 되었다.
고구려, 백제, 신라,
고려, 조선 시대를 거치는 동안 면면히 이어져 내려온 불교의 전통 문화를
창조적으로 계승 발전시키는 일은 한국 불교의 시급한 과제 중의 하나이다.
최근 들어 우리 전통문화
특히 불교에 대한 국내외적인 관심이 커져가고 있는 것은 매우 고무적인
현실이다. 불교문화의 창조적 계승은 21세기의 세계화, 국제화 시대를
맞이하여 한국의 새로운 정신문화 창달과 정체성 확립에도 크게 이바지할
수 있을 것이며, 민족의 밝은 미래를 열어 가는데 기여할 것이다.
3) 통일을 준비하는
불교인
우리 민족은 일제로부터
해방되어 그 기쁨을 누려보기도 전에 분단의 아픔을 겪어야만 했으며
그 고통의 시간도 벌써 50여 년에 이르게 되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분단으로
인해 이산가족이 되는 고통을 겪었으며 그 아픈 사연들을 속으로만 갈무리해야
했다. 더욱 안타까웠던 것은 지난 시절 국내외적인 여건이 통일에 대해
마음대로 이야기할 수 없는 상황이어서 통일을 향한 진전이 별로 없었다는
것이다.
북한
룔천으로 가는 구호물자을 실은 선박
그러나 최근 남북한
정상회담 이후 정치ㆍ경제ㆍ문화ㆍ체육 등 다방면에서 남북한 교류가
붐을 이루고 있다. 남북을 잇는 금강산 관광이나 계속되는 이산 가족
상봉, 기업체를 통한 경제 교류 등 민족 화해와 통일의 기운이 움트고
있다. 또한 얼마전 룡천에서 발생한 열차 폭발 참사에도 각계에서 많은
의료와 구호물자 및 장비를 보내는 등 따뜻한 손길은 이념을 넘어선
따뜻한 동포애를 발휘하고 있다. 이제는 불교에서도 나름대로 통일에
대한 준비를 해야 한다.
불교계의 동질성 회복과
통일을 위한 노력은 이미 삼국통일 시대부터 있어왔다. 일찍이 삼국을
통일한 신라에서 원효 스님이 전쟁의 상처로 신음하는 민중에게 불교
사상으로 동질감을 회복시켰고, 화쟁정신으로 갈등을 푸는 실마리를
제공한 역사가 있었다.
고려시대 몽고의 침입
때에도 대장경을 조판하면서 꿋꿋이 국난을 이겨낼 수 있었던 것도 역시
불교의 힘이 적지 않았다. 유교사상을 중심으로 하던 조선시대에도 임진왜란과
같은 어려운 시기에 민중과 고통을 함께 나누기 위해 애쓴 사실은 불교가
우리 민족사에서 어떤 역할을 하여 왔는가를 잘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그래서 한국 불교가 이제 통일 시대를 대비하여 다각적인 노력과 역할을
수행해나가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통일을 준비하는 불자들은
우선 기본적이고 필수적인 그러면서도 쉬운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 우선,
미움과 증오를 버리는 것은 민족 화해의 첫걸음이다. 민족의 동질성을
확보하기 위해 우리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북한에 대한 증오와 적개심을
풀어야 한다. 부처님께서는 증오와 미움을 갖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말씀하셨다. 미움을 간직한 채로는 다른 한쪽과 손을 맞잡을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설사 그런 식으로 통일이 이루어진다 하더라도 미움으로
인한 또 다른 갈등이 생기게 되기 때문이다.
또한 불교계가 민족통일에
기여하기 위해선 남북 간의 불교 교류를 활발히 전개해야 할 것이다.
교류를 통한 남북 간의 다양한 접촉은 서로의 이해를 도와주는 계기가
될 것이며 분단의 아픔을 어느 정도나마 해소시킬 수 있는 자리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남북한 각 사찰에 대한 상호 방문 및 서신 교류,
문화유산에 대한 관심 등 다채로운 교류의 길을 마련할 수도 있을 것이다.
북한의 사찰을 복원하거나 신축하는데 함께 참여하거나 불교병원 등
복지사업을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한편, 민족 통일을 위한 노력은
특정 불교 교단만이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여러 종단과의 협의를
통해 사업을 추진해야 할 것이다.
통일을 위한 다양한
노력에 나는 무엇으로 참여할 것인가를 스스로 결정하고 적극적으로
동참하는 것이야말로 분단된 한국에 사는 불자의 중대한 사명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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