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불교 윤리의 근본
오늘 날 우리 사회는
과학 문명의 발달에 따라 많은 분야에서 인간생활의 편리함과 혜택을
가져왔지만, 그 역기능 또한 적지 않다. 자연 환경의 파괴, 배금주의와
물질만능주의로 인한 비인간화 현상, 도덕 규범의 상실, 가치관의 부재
등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시대일수록
인간과 인간 사이에 지켜야 할 윤리의 필요성은 절실하다. 윤리란 바로
인간의 행동에 있어서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를 구분하여, 선을
행하고 악을 행하지 않도록 하며 궁극적으로는 사회 질서를 유지시켜
주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불교는 세속을 떠난 종교이기에 인간의 윤리에 대한 가르침이 적다고
잘못 이해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다른 어떤 종교보다도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문제에 대해 여러 가지 가르침을 펴고 있기 때문에 불교야말로
윤리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설하고 있다.
불교의 윤리 사상은
선업과 악업에 대한 가르침인 업설業設과, 이 업설을 구체적 행동으로
실천하는 계율 사상에 잘 나타나 있다. 업설이야말로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고 있는 가장 포괄적인 개념으로,
불교 윤리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불교에서 업業은 인간의
의지적 작용과 행위를 말하며, 거기에는 반드시 과보果報가 따른다고
설하고 있다. 선업에는 즐거운 과보가 따르고, 악업에는 괴로운 과보가
따른다고 경전은 설하고 있다. 또한 선과 악의 판단 기준에서는 인간의
자유 의지를 중시하지만 그 판단에는 사회 윤리적 책임이 함께 부과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마을(연합뉴스)
그러나 이 세상에는
나쁜 일을 저지르고도 잘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착한 일만 하는
데도 불우한 일생을 보내는 이가 있는 등, 인과의 법칙에 어긋나 보이는
경우를 볼 수 있다. 이러한 현상에 대해 유신론자들은 신의 뜻에서,
운명론자는 운명에서 그 원인을 찾는다. 그러나 그러한 현상들이 신의
뜻이나 운명에서 이루어진다면 인간의 자유 의지에 의한 노력과 극복이라는
개념은 설 자리가 없다.
불교에서는 삼세 업보설로
그러한 현상들을 풀이하고 있다. 삼세란 과거ㆍ현재ㆍ미래 즉 전생과
현생, 그리고 내생을 말한다. 그래서 전생의 업에 따라 현생에서 과보를
받는 경우와, 현생의 업에 따라 내생에서 과보를 받는 경우 등을 들고
있다. 부처님은 “만일 고의로 업을 짓는 일이 있다면 반드시 그 과보를
받되, 현세에 받을 때도 있고 내세에 받을 때도 있다.”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등장하는 것이 윤회설이다.
이 윤회설에 의해 인간윤리의
대상은 현세의 테두리를 벗어나 무한한 시공 속에 펼쳐지게 된다. 즉,
금생만 살고 말면 된다는 생각으로 인한 순간적인 환락, 자포자기 등을
억제시키고, 스스로 행복을 위해 끊임없이 선을 행하려는 강력한 의지를
요구하고 있다. 여기에서 미래 지향적인 불교의 인생관, 가치관, 사회
윤리관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은 행복하게
살 것을 바라면서도 불행을 가져오는 악업을 일삼는 어리석은 짓을 되풀이하고
있다. 부처님은 이러한 악업을 열 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몸(身)으로 세 가지
악업을 지으면 괴로운 보報를 받는다. 살생殺生과 도둑질(偸盜)과 사음邪淫이
그것이다. 입(口)으로 네가지 악업을 지으면 괴로움을 받는다. 그것은
거짓말(妄語), 이간질하는 말(兩舌), 욕설(惡口), 아첨하는 말(綺語)이다.
뜻(意)으로 세 가지
악업을 지으면 괴로움을 받는다. 곧 욕심(貪愛), 성냄(瞋쨌), 어리석음(癡暗)이다.”
이상의 열 가지 악업(十惡業)에
반대되는 것이 십선업十善業이다. 즉, 불살생不殺生ㆍ불투도不偸盜ㆍ불사음不邪淫ㆍ불망어不妄語ㆍ불양설不兩舌ㆍ불악구不惡口ㆍ불기어不綺語ㆍ무탐無貪ㆍ무에無쨌ㆍ정견正見이
그것이다.
이 십업 중의 어느
하나도 인간의 사회 생활과 무관한 것은 없다. 거대한 댐이 작은 구멍
하나로 무너지듯이 사회라는 큰 틀도 개인의 변화에 크게 좌우된다.
특히 도시화되고 문명의 이기가 범람하는 이 시대에 있어 개인의 깨달음과
바른 삶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 개인의 변화는 이 시대 개혁의 출발점이자
완성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공동체에는 공동체의
유지를 위해 필수적인 도덕과 최소한의 규범이 있다. 부처님께서 불자들이
지켜야 할 생활규범의 원칙으로 제시하신 것이 바로 이 열 가지이다.
이 열 가지 원칙들은 몸(身)과 입(口)과 생각(意)에 바탕을 둔 것으로,
몸과 관련된 것이 세 가지, 입과 관련된 것이 네 가지, 생각과 관련된
것이 세 가지이다.
첫째로 몸과 관련된
규칙으로는, 산 목숨을 죽이지 말고 살려 줄 것(放生방생), 남의 것을
훔치기 보다는 남에게 베풀 것(布施보시), 다른 사람과 삿된 관계를
갖지 말고 정숙한 생활을 할 것(梵行범행)을 강조하셨다. 이것은 자신에게도
해로울 뿐 아니라 다른 이를 고통에 빠뜨리는 근원이 된다.
둘째로 입으로는 먼저,
남에게 거짓말보다는 정직한 말을 해야 한다.(眞實語진실어) 거짓말을
하는 것은 자신의 조그마한 이익을 생각하기 때문인데 그러나 그것은
자신감을 상실한 사람들이나 하는 행위이다. 그러므로 스스로 당당한
사람이 되어 거짓말에 쏟는 정열과 노력을 돌려 정직하게 살아가야 함은
물론, 욕설보다는 부드러운 말로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안온한 상태에서
서로 흉금을 털어놓고 말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愛語애어) 남을 속이는
일은 나를 속이는 일이고 이런 행동이 점점 심해지면 나중에는 습관적으로
남을 속이는 행위를 하게 된다. 그러나 인간의 자의식은 언제나 잠재하고
있어 나중에는 스스로 항상 누가 나를 속이지나 않나 의심하게 된다.
그리고 이것이 깊어지면 심리적 변화를 유발하기도 한다. 따라서 바른
말을 하여 신뢰의 바탕을 쌓아야 한다.(直語직어)
우리 속담에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말이 있다. 이것은 남이 잘 되는 것을 못 봐주는
의식에서 나온 속담일 것이다. 이러한 현상이 지속될 경우 믿음보다는
불신이 심화될 것이다. 불자들은 진실한 말과 행동으로 남들을 이간시키거나
불신의 소지를 남겨서는 안될 것이다. 그리고 이간질이 깊어지면 사회가
혼란스러워진다. 그래서 이러한 이간질을 하지 말아야 한다.(和合語화합어)
셋째는 생각과 관련된
규칙들이다. 우리들은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 속에서 살아간다. 이것을
극복할 수 있는 것은 바른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길 뿐이다. 사실 잘못된
행동을 돌아보면 탐욕이 그 근원이다. 따라서 탐욕을 버리는 정신수양이
필요하다. 부처님께서는 늘 무욕의 경지를 설하셨다.(無貪무탐) 한편,
잘못된 생각 한 번으로 돌이킬 수 없는 일을 저지르게 되는 때가 많은데
그 중에서도 특히 성냄이 그 으뜸이다. 따라서 자신의 성격을 잘 다스리는
일이 중요하며, 그것은 수행을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 성냄이 없는 경지를
무에無쨌라고 한다.
이러한 불교 윤리를
실천하고자 할 때에는 지혜와 자비가 바탕이 되어야 한다. 지혜와 자비로
이러한 잘못된 행동을 가져오는 어리석음을 없애고 진리의 입장에 서는
것이 우리가 지향해야 할 행동이다.(正見정견) 이러한 행동양식을 바탕으로
모든 생명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고 서로 위해 주라는 부처님의 가르침은
모든 인류의 공통적인 선을 추구하는 정도正道인 것이다.
그래서 과거의 모든
부처님들은 다음과 같이 가르치고 있다.
모든 악을 짓지 말고
(諸惡莫作)
모든 선을 힘써 행해
(衆善奉行)
스스로 그 마음을 깨끗이
하라(自淨其意)
이것이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이다(是諸佛敎)
이것을 칠불통계七佛通戒라고
한다. 이 가르침에 의해서 청정하고 맑은 마음을 가진 사람, 모든 더러운
생각이 사라진 마음을 가진 사람은 반드시 절대 평화와 자유의 경지인
해탈과 열반의 경지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어리석게 살지 말라.
남의 흉내를 내면서
살지 말라.
잘못된 생각에 끌려가지
말라.
그리고 물질에 너무
탐닉하지도 말라.
≪법구경≫
2. 함께 사는 세상
매순간 우리는 다른
사람과 더불어 살아간다. 가정에서는 가족과 친척, 학교에서는 스승과
친구, 그리고 직장에서는 동료와 상사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을 만난다.
자신과 다르게 살아온 사람들과 함께 살다보면 본의 아니게 여러 가지
문제가 생긴다. 사람 사이의 갈등은 언제나 사소한 것에서부터 출발하여
나중에는 수습할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곤 한다. 그리고 그것은 언제나
‘너’와 ‘나’라는 입장에서 자기 것을 집착하는 어리석음에서 시작된다.
함께 살아가면서도 ‘너’와 ‘나’로 나뉜 채 살아가는 우리는 서로에게
넘을 수 없는 벽을 느끼곤 한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너와 내가 둘이 아닌 하나라고 말씀하셨다. 우리가 무지에서 벗어나
진리를 발견하게 되면 결국 ‘너’와 ‘내’가 서로 나누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라는 하나로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라는
공동체의 의식을 가질 때 사람들과의 관계는 한층 가깝고 따뜻한 사이로
발전하게 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자신의 수행이 필요하고, 자신보다 나은 행동을 하는 사람을 보면
배우려는 자세로 나아가야 하며, 자신보다 못한 사람을 보면 자신도
과거에 그러했음을 반성하며 친절하게 일러주는 태도로 나아가야 한다.
다른 사람을 무시하고 얕잡아 보는 행동은 어디서나 문제의 화근이 됨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오히려 불교에서는
다른 사람을 위해 헌신하는 적극적인 이타행을 강조하고 있으니 그것이
바로 여섯 가지 실천 행동 즉, 육바라밀이다.
1) 보시(布施)
인색한 사람은 하늘나라에
갈 수 없다.
어리석은 사람은 베풀
줄을 모른다.
그러나 현명한 사람은
베푸는 걸 좋아하나니
그는 그 선행으로 인하여
보다 높은 세상에서
행복을 누리게 된다.
≪법구경≫
옛날 인도 사람은 많은
사람에게 무엇이든지 베풀어주면 그 공덕으로 자신에게 좋은 과보가
돌아온다고 믿었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과 수행자 등을 만나면 자신의
복을 짓게 해준다고 믿고 기쁜 마음으로 베풀어주었다. 까닭에 도움을
받는 사람을 복전福田 또는 복밭이라고 했다.
불교에서는 다른 사람에게
베푸는 것을 보시라 한다. 부처님은 깨달음에 이르신 후 고통의 바다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모든 중생들을 구제하기 위해 이 땅에 머무르셨다.
부처님께서 보이신 연민과 사랑을 본받아 다른 사람들에게 항상 연민과
사랑의 마음인 자비를 실천하는 것이 보시이다.
보시에는 재물을 베풀어주는
재시財施, 두려움을 없애 주는 무외시無畏施, 그리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해주는 법시法施가 있다.
자기 것을 다른 이에게
주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소유에 대한 강한 집착과 욕심으로부터
벗어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보시는 자신의 것을 남에게 기쁜 마음으로
베풀어주는 것이다. 보시는 우리의 집착과 그로 인해 생긴 모든 번뇌를
없애주는 길이기도 하다. 탐욕을 버리는 가장 좋은 길은 첫째, 지혜의
눈을 뜨는 것이요. 둘째, 행동으로 나의 것을 남에게 베풀어주는 마음이라
한다.
보시를 바라는 사람이
있음을 보고 나서 주는 것은 보시라고는 하지만 바라밀이라고는 하지
않는다. 만약 보시를 바라는 사람이 보이지 않아도 자진해서 베풀 때는
이를 보시바라밀이라고 부른다. 만약 이따금 하는 보시라면 이를 보시라고는
해도 바라밀이라고는 하지 않는다. 언제나 보시하는 경우, 이를 보시바라밀이라
부른다. 만일 남에게 주고 나서 뉘우침이 생긴다면 이를 보시라고는
해도 바라밀이라고는 하지 않는다. 주고도 뉘우치는 마음이 없을 때
이를 보시바라밀이라고 부른다.
궁극의 깨달음을 위해
수도하는 사람은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 주고 받는 물건이 여기에 있다고
보지 않는다.
오직 대승의 궁극적
깨달음인 영원의 법을 위해 보시하고, 세상에 삶을 받은 모든 자에게
혜택을 주기 위해서 보시하고, 모든 사람의 번뇌를 끊어주기 위해 보시한다.
≪대반열반경≫ <고귀덕왕보살품〉
축서사
안양원 기와 올리는 모습
이처럼 보시를
행할 때에는 주는 이와 받는 이가 따로 있다는 생각을 내서는 안된다.
이를 ‘삼륜이 청정하다’고 한다.(三輪淸淨) 삼륜이란 주는 사람, 받는
사람, 그리고 주고 받는 물건을 말한다.
물질의 소유에 따라
사람의 가치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모든 사람은 불성을 지닌 평등한
존재이다. 부처님은 보시할 때 어떠한 보답을 바래서는 안되며 심지어
자신이 남에게 보시한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아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2) 지계(持戒)
부처님이 생존해 계실
때, 전생의 과보로 열반에 들기 전에 등창이 생겨 고생했다고 하는 내용이
전생담에 실려있다. 이것은 깨달음에 이른 사람조차도 자신이 행한 일에
대해서는 반드시 그 과보를 받게 된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즉 알게 모르게 행하는 우리의 행동은 결국 다시 본인에게로
되돌아온다는 법칙인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의 행위를 하더라도 조심하지
않으면 나중에 가서 후회하게 될 것이다. 동기나 과정이 어찌 되었든
결과만 좋으면 되지 않겠느냐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원인 없는 결과가 있을 수 없듯이 악한 행위에 좋은 결과도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오늘의 행동은 내일의
모습을 결정한다. 부처님은 우리가 행한 모든 행동은 결국 우리자신에게로
돌아온다고 하셨다. 한 방울의 물이 모여 큰 항아리를 채우는 것과 같이,
우리가 ‘별거 아니겠지’라고 가볍게 생각하면서 저지른 악행이 결국
재앙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성인이 되면 자신의 행위에 대해 스스로
책임을 져야 한다고 한다. 잠시라도 한눈을 팔게 되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악행에 물든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좋은 행위는
쉽게 몸에 배이지 않지만, 나쁜 행위는 그렇지 못하다. 항상 자신의
마음과 말과 행동을 관찰하고 자신을 다스리는데 게을리 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열반경≫에서 제자들에게 계를 스승삼아
열심히 정진하라고 하셨던 것이다.
이미 저질렀거나 아직
저지르지 않았거나를 막론하고
다른 사람의 결점은
일체 보지말라.
이미 저질렀거나 아직
저지르지 않았거나를 막론하고
그대 자신의 잘못은
반드시 되돌아보라.
≪수타니파타≫
3) 인욕(忍辱)
불교를 흔히 수행의
종교라 한다. 수행을 한다는 것은 모든 것을 참아가며 참사람이 되는
것이기도 하다. 즉 참는다는 것은 탐내는 마음과 성내는 마음을 자제하는
것을 말하며, 탐내는 마음을 잘 참기 위해서는 자신의 마음을 잘 이해하고
지켜보는 것이 필요하고, 성내는 마음을 잘 참기 위해서는 자신을 화나게
하는 사물이나 조건 혹은 상대방을 잘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나로
하여금 분한 마음이 솟아오르게 하는 상대방이 있을 때에는, 그가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를 이해하거나, 혹은 그가 잘못된 지식으로 인해
그와 같이 행동한다는 것을 알게 되면, 상대방을 이해하는 마음도 생기고
저절로 참을성이 생겨나기도 할 것이다.
마치 초보 운전자가
길과 교통체계를 알지 못해 방황하는 모습을 보고 경멸할 것이 아니라
자신도 그런 시절이 있었던 것을 떠올리며 살며시 웃어 넘길 수 있는
여유와 이해하는 참을성을 길러야 하겠다.
4) 정진(精進)
과거의 버릇이 얼마나
오래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는가를 보여주는 속담에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말이 있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바르게 실천하는 삶을 살려고
해도 과거의 탐욕에 길들여진 버릇을 하루아침에 털어버리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몸과 말과 마음의 수행이 어느 정도 되는가 싶다가도
금방 그것을 흔들고 허물어 버리는 삼독심이 솟구치곤 한다. 그러므로
보다 굳건한 마음으로 생활하면서 과거의 습관을 바꾸려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
투철하게 깨달음을
이루어 다시는 어제의 생활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커다란 서원을 세우고
그 길을 용감하게 가는 일이 중요하다. 반복하여 잘못을 저지르더라도
그보다 더 끈질기게 다시 떨치고 일어나는 용맹한 정진심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깨달음을 이루고 못 이루는 것도 정진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행위의 결과를 미리 예측해 보는 지혜가 있어야 한다.
결과에 어떤 과보를 받을지를 안다면 정진에 많은 장애를 극복하게 될
것이다. 더욱 열심히 깨달음의 길을 향해 정진해야만 어제와 다른 내일을
맞이할 수 있다.
5) 선정(禪定)
선원의
큰방
마음에 번뇌가 없어
어지럽지 않은 것이 선정이다. 마음이 고요하면 행동도 자연히 안정을
이룬다. 선정은 개인의 수행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싸움도 상대가 있어야
하는 법인데 내가 먼저 인욕하고 깊이있는 생각으로 모든 행동을 차분하게
처리한다면 상대방도 다투려는 마음보다는 평온한 마음으로 상대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깊이 생각하는 힘을 길러주는 수행인 선정을 닦아야 한다.
선정은 지혜로 나아가는
길이다. 그 길은 머리가 좋은 사람만이 가는 것도 아니고 학벌과 학위로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누구든지 어떤 것에 대한 관심을 갖고
깊이 생각함으로써 자신이 그동안 보지도 알지도 못했던 전체의 모습과
나와 남으로 나눌 수 없는 하나로 연결된 삶의 전과정이 드러나고, 그
속에서 지킬 것과 얻을 것, 버릴 것 등을 바르게 판단하는 것이다.
6) 지혜(智慧) - 반야(般若)
반야란 제법의 실상이
공하여 실체가 없고 모든 것이 인연연기의 법칙에 의해 존재함을 깨달아서
일체 집착이 없음을 말한다. 그러한 이해 속에서 생활을 하는 사람을
지혜인이라 할 수 있다. 지혜로운 사람은 자신의 삶을 건강하고 아름답게
꽃피울 뿐만 아니라 주위 사람들에게도 좋은 향기를 준다. 마치 언덕에
곱게 핀 꽃이 그윽한 향기를 바람에 실어 그 향기를 오가는 사람들에게
베풀어주듯이, 지혜로운 사람들 곁에 사는 삶은 나와 이웃 그리고 자연의
세계를 정화시키는 감로의 물줄기가 될 것이다.
다섯가지 바라밀은
반야바라밀이 없이는
바라밀이라고 불리지
못한다.
마치 전륜성왕이 전보轉寶가
없을 때에는
전륜성왕이라는 이름을
가지지 못하는 것과 같다.
≪대지도론≫
3. 불자의 인간관계
인간은 사회를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으며, 또한 수많은 사람들과 매순간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관계적 존재이다. 이제 우리는 불자로서 살기 좋은 부처님 나라를 실현하기
위해서 현대 사회에 팽배하고 있는 경쟁과 대립의 인간관계를 협력과
우호 관계로 바꾸어 나갈 필요가 있다.
불교는 여러 경전 속에서
사람이 지켜야 할 아름다운 인간관계 윤리를 구체적으로 설하고 있다.
경전에 나타난 인간관계의 근본은 대체로 ‘자비와 존경’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여기에서 말하는 자비와 존경은 일반적으로 쓰이는 자비와
존경이라는 말보다 더 깊은 종교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즉, 너와 나를 비롯한
이 세상의 모든 존재가 생명과 체온을 함께 나누는 한 몸이라는 동체대비의
깨달음 속에서 자연적으로 우러나오는 끝없는 사랑과 관심을 말한다.
부처님께서 여러 경전에 밝혀 놓으신 길을 통해 우리의 삶을 비추어
보자.
1) 부모와 자녀간의
윤리
바다와 같이 넓고 끝없는
사랑을 우리는 흔히 부모의 사랑이라 한다.
하나의 생명을 잉태하여
스스로 독립된 인간으로 살 수 있을 때까지 부모는 자식을 위해 물질적,
정신적으로 중요한 존재이다. 자식은 부모에게 분신과 같은 존재이며
활기와 희노애락의 원천이기도 하다. 그래서 예로부터 부모와 자식 사이는
인륜이 아니라 천륜, 즉 하늘이 맺어준 인연이라고 했다.
부처님께서는 부모가
자식에게 해야 할 일을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첫째, 부모는 자식을
사랑해야 한다.
둘째, 자식이 악행을
멀리하고 착한 일을 하게 해야 한다.
셋째, 적절한 교육과
생계의 수단인 기술을 배울 수 있도록 뒷바라지를 해 주어야 한다.
넷째, 결혼할 때가
되어 배우자가 정해지면 가정을 이루도록 해주어야 한다.
시간이 흐르면 부모는
어느새 나이가 들어 자식들에게 의지하여 살게 된다. 이것은 자식이
어렸을 때 부모에게 의지해 사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부처님께서는
자식이 부모에게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바로 효도라고 하셨다. 부모가
자식에게 베풀어준 은혜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기 때문이다.
부처님께서는 자식으로서
부모에게 해야 할 일을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첫째, 늙으신 부모님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드리고 물질적으로 부족함이 없이 항상 보살펴 드려야
한다.
둘째, 부모님을 위해
열심히 일하고 집안일을 이어받아 바르게 처리해야 한다.
셋째, 조상님께 제사를
올리며 그 뜻을 따라야 한다.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에
우리는 부모와 자식간의 세대 차이를 겪으면서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부모는 부모대로 자식은 자식대로 자신들의 생각을 고집하기보다는 대화를
통해 문제를 해결해 가는 것이 바람직하다. 어느 세대나 장점과 단점은
있기 마련이다. 자기 것만을 고집하기보다는 서로를 이해하고 존중할
줄 아는 것이 바로 사랑이다. 다정다감한 친구같은 부모가 되고 부모를
인생의 선배로서 존경할 줄 아는 자식이 되면, 소위 세대간의 벽도 허물
수 있게 될 것이다.
2) 스승과 제자간의
윤리
서당에서 댕기를 맨
아이가 종아리를 드러내고 스승 앞에 서 있는 모습의 옛 그림은 보는
이의 마음에 훈훈한 정감을 불러 일으킨다. 매를 맞으면서도 익살맞은
표정을 짓는 학동, 엄한 얼굴이지만 친근감이 느껴지는 스승의 모습에서
우리는 사제지간의 따뜻한 사랑을 느낄 수 있다. 우리 시대에 이러한
모습을 요구하기는 그리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스승은 자신에게
있는 모든 지식을 제자에게 가르치고, 건강한 몸과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제자를 격려하고 직접 좋은 본보기가 되어야 하며, 제자는
열심히 스승의 가르침을 배우고 익히며 스승을 존경하고 받들면서 살아야
한다고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 스승의 도리 ]
스승은 제자를 가르침에
있어 다음의 다섯 가지에 힘써야 하느니라.
법에 의하여 훈육하여야
한다.
배우지 못한 것을 가르쳐야
한다.
질문해 오는 것을 잘
이해시켜야 한다.
착한 벗을 알려주어야
한다.
아는 것을 다 가르치는데
인색하지 않아야 한다. ≪장아함경≫
〈선생경〉
[ 제자의 도리
]
제자는 스승을 공경함에
있어 다섯 가지 일에 힘써야 하느니라.
공경하고 높이 칭찬해야
하느니라.
스승의 은혜를 항상
기억하라.
가르치신대로 따르라.
늘 사모하고 생각해야
하느니라.
스승의 뒤를 따르고
명예를 드날려야 하느니라. ≪시가라월육방예경≫
3) 부부간의 윤리
불교에서는 부부란
전생부터 지금까지 오백생 인연의 결과라고 한다. 그만큼 서로 다른
환경에서 자랐지만 두 남녀의 만남은 소중한 것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세상에서 가장 가깝고도 먼 사이가 부부이기도 하다.
부부는 흐르는 물과
공기처럼 늘 가까이 있기 때문에 평상시에는 서로의 소중함을 잊어버리고
살 때가 많다. 그러나 어느 한 쪽을 잃게 된다면, 그 빈자리는 쉽게
채워지지 않는다. 사랑한다는 것은 이해하는 것이다. 하나의 가족이라는
사회를 형성한 두 사람이 서로를 이해하고 위로하며 의지할 수 있는
따뜻한 마음으로 살아가야 할 것이다.
부부가 서로 사랑하고
서로 이해하지 않으면 자식들은 그 방향을 잃고 헤매게 될 것이다. 문제있는
부모로부터 문제아가 생긴다는 말이 있다. 거리를 떠돌아다니는 수많은
청소년들은 자신의 부모에게 문제가 생겨서 집에 들어가기 싫다고 말한다.
부모의 불화로 인해 치명적인 상처를 입는 것은 자식이다. 순간의 기분에
이끌려 남편으로서, 아내로서의 책임과 의무를 내던져 버린다면, 자신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에게 피해를 주게 된다.
그러므로 부부는 서로
사랑하고, 존중하며 화목한 가정을 이루어야 한다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 남편의 도리 ]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되
다섯 가지에 힘써야 하느니라.
출입할 때 예절로서
대하라.
위엄을 지켜 딴 여자를
사랑하지 말라.
의식주의 걱정이 없게
하라.
때를 맞추어 징신구를
사주어라.
집안 살림을 믿고 맡겨라.
≪장아함경≫〈선생경〉
[ 아내의 도리 ]
아내는 남편을 섬김에
다섯 가지 일에 힘써야 하느니라.
남편이 밖에서 돌아오면
일어나서 맞이하라.
집안을 잘 정리하고
음식을 잘 만들어라.
딴남자를 생각하지
말고, 얼굴을 붉혀 다투지 말라.
남편의 의사를 존중하고
재산을 잘 관리하라.
남편이 휴식할 때 편안하게
하라. ≪시가라월
육방예경≫
4) 친구간의 윤리
친구는 제2의 ‘자신’이라고
한다.
성실하게 살아가던
사람도 친구를 잘못 만나면 나쁜 길로 빠지는 경우를 본다. 따라서 친구를
사귈 때는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서 예로부터 친구를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고 했다. 자신을 목숨처럼 소중하게 생각해 주는 친구가
단 한 사람이라도 있다면 그 사람의 인생은 성공했다고 말한다. 얼마나
많은 친구가 있느냐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얼마나 진정한 친구가 있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부처님의 10대 제자
가운데 사리불존자와 목련존자가 있었다. 두 분은 한 스승 밑에서 수행하던
친구였다. 좋은 스승을 만나면 서로 연락해 주기로 약속을 하고 살다가
어느 날 부처님을 만나게 되었다. 그러자 그들은 함께 부처님의 제자가
되어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부처님께서는 가까이
하면 유익한 친구와 멀리 해야 할 친구를 이렇게 말씀하셨다.
[ 가까이 할 친구 ]
첫째, 친구가 취했을
때 재산을 지켜주고, 두려워할 때 보호자가 되어 주며, 필요한 때는
내가 필요로 하는 두 배 이상의 재산이라도 줄 수 있는 친구이다.
둘째, 즐거우나 괴로우나
항상 변하지 않는 벗이란 자기의 비밀을 말해주고 또한 나의 비밀을
지켜준다. 재산을 잃어 가난해졌을 때도 버리지 않고, 친구를 위해서
목숨까지도 버리는 친구이다.
셋째, 착한 말만 하는
친구는 악한 일을 멀리하게 하고 선한 일을 행하게 한다. 새로운 정보와
성인의 가르침을 말해주고 인도해 주는 친구이다.
넷째, 동정 있는 벗은
친구가 약해졌을 때 기뻐하지 않고 그의 목소리를 듣는 것으로도 기뻐한다.
비난하고 험담하는 사람을 멀리하고 찬양하는 사람을 칭찬하는 친구이다.
[ 가까이할 친구 ]
“나의 결점을 일러주는
친구.
나의 결점을 꾸짖어
주는 친구,
이런 사람 만나거든
그를 따르라.
그는 나에게 보물이
감추어진 곳을 일러주는 사람 같나니,
그를 따르면 많을 이익이
있다.” ≪법구경≫
[ 멀리할 친구 ]
“의롭지 못한 것을
보고 그릇되고
굽은 것에 사로잡힌
나쁜 벗을 멀리하라.
탐욕에 빠져 게으른
사람을 가까이 하지 말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수타니파타≫
[ 멀리할 친구 ]
첫째, 무엇이나 눈에
띄는 것은 가져가고, 작은 것을 주고 큰 것을 얻으려 한다. 자발적이
아닌 두려움에서 일을 하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만 일한다.
둘째, 교묘한 말로
우정이 있는 것처럼 가장하고 필요없는 애교를 부린다. 해야 할 일이
눈앞에 닥치면 태도가 달라진다.
셋째, 감언이설로 상대방의
나쁜 일에만 보조를 맞추고 좋은 일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그 사람 앞에서는
칭찬하고 돌아서면 비웃고 험담한다.
넷째, 생활이 문란하고
술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는 사람은 같이 즐길 때는 좋지만, 결국 무기력하고
사회에서 쓸모없는 사람으로 몰아간다. 그러므로 이런 사람은 친구마저
파멸시키므로 멀리해야 한다.
5) 직장에서의 윤리
현대인의 스트레스는
절반 이상이 직장에서 받는 것이라고 한다. 과중한 업무와 직장 동료와의
갈등으로 인해 받는 심리적 압박감은 대단히 심각하다. 그러나 이것은
서로에게 배려하는 마음을 조금씩 내면 서서히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내가 먼저 달라지면 전체 사회가 달라지게 될 것이다.
서로에 대한 작은 관심과 격려, 그리고 이해를 통해 따뜻한 가슴을 가진
사람들이 사는 곳을 만들어 가야 한다.
상사는 부하 직원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고, 일에 대한 흥미와 삶의 보람을
느낄 수 있도록 배려해 주어야 한다. 또 적당한 여가를 주어 생활의
활기를 찾도록 해주고, 잘못이 있을 경우엔 자존심이 상하지 않도록
잘 타일러준다. 반대로 부하 직원은 직장과 인생의 선배인 상사를 존중해야
한다. 자신에게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하고, 상사가 없는 곳에서 험담을
해서는 안된다.
직장은 가정 다음으로
중요한 삶의 터전이다. 직장을 통해 개인의 능력을 발휘하고 그에 따른
보수로 생활을 한다. 서로 존중하고, 선의의 경쟁을 통해 자기 성취를
이루어 나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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