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이 또 변했다.
가끔씩 가는 한국의 모습은 갈 때마다 낯설었다. 이번에는 또 어떤 일로
당황할지를 몰라서 인천 공항에 도착하기 전의 기내에서 국내 신문들을
모조리 읽고 사전 정보를 미리 좀 익혔다. 인터넷 사이트에 접속만 하면
홈네트워크를 통해서
바깥에서도 자신들의 집안 상태를 한 눈에 점검할 수 있는 시스템, 영상
녹화나 음성 녹음까지 가능해진 휴대폰 카메라와 디지털 카메라의 우수한
성능, 정보 홍수가 쏟아지면서 희한한 사건들도 많았다. 은행 계좌의
현금을 자신의 휴대 전화로 이체해 놓고 현금처럼 사용하는 전자 화폐
서비스 같은 것은 이해도 잘 가지 않았다. 외형을 중요시하고, 충동에도
약하여 무분별한 신용카드 사용으로 인한 개인 신용 불량자 수가 4백만
명 선으로 육박하고 있어서 정부와 금융회사들의 신용 불량자를 줄이기
위한 대책 등을 비롯하여 정치와 스포츠난까지 다 훑어보면서 오늘날의
한국 사회 분위기를 파악해 두었다. 그러면서 이번만큼은 덜 무지하게
몇 주를 지낼 수 있기를 희망했다.
제일 먼저 경험하게
된 것은 시속 300km의 초고속 철도KTX였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2시간
40분이 걸렸으니 당일 출장이나 쇼핑도 가능하게 된 것이다. 과연 겉보기에는
국민 소득 2만 달러 시대를 향해서 나아가는 시설이었다. 터널에서의
소음을 제외하고는 속도감을 느끼지 못하는 부드러운 질주에 편안하게
몸을 맡기고 차창 밖의 봄 풍경을 즐기려고 했다.
낯선 시멘트 건물 사이로
아직도 남아 있는 벚꽃과 야산의 진달래, 그리고 빈 논가를 덮고 있는
보랏빛의 자운영에 가슴이 벅차오르려는데 느닷없는 휴대폰 소리들이
그 감동을 깨고 말았다. 여기저기서 통화하느라고 객석은 재래시장처럼
잠시 시끌벅적했다. “아, 나 조금 전에 고속열차 탔거든,” “어제는
잘 얻어먹었어. 다음에는…” “얘, 내일이 곗날이거든…” 목소리들을
낮추는 법도 없고 조심스러워 하지도 않았다. 언젠가는 그 대화들이
끝나겠지 하고 참을성 있게 기다리니 마침내 조금씩 조용해져 갔다.
그런데 갑자기 앞좌석에서
코고는 소리가 요란한 게 아닌가. 이번에는 아무리 기다려도 그 소리가
그칠 줄을 몰랐다. 특실이나 초고속 같은 첨단 시설은 사람의 인격과는
무관한 것 같았다. 그들을 탓하기보다는 나의 예민한 귀를 탓하면서
객차 사이의 공간으로 빠져 나왔다. 넓고 편한 특실 자리를 마다하고
객실 밖의 좁은 간이 의자에 조용히 쪼그리고 앉아서 창 밖으로 지나가는
봄을 다시 잡으려고 했다.
한국을 떠나던 70년대만
해도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 말이 있었는데, 이제 개발로 인해 강산은
5년이면 변한다고 했다. 그 동안 고국의 강산이 다섯 번이나 바뀌었는데도
수십 년 전에 본 야산의 할미꽃을 찾아보겠다는 나의 야무진 꿈에 부풀어서
발보다 마음이 먼저 앞서 갔다. 그 바람에 시드니의 아침 비행기를 타기
위해서 어스름한 새벽녘부터 출발하느라 외출 신발 찾아 신는 것을 잊어버리고
말았는데, 농장 베란다에 뒹굴어 다니던
찌그러진 샌들을 신고
있는 것을 발견한 것은 공항에서였다. 그래서 한국에서 제일 먼저 찾아간
점포가 신발 매장이었다. 가격표에는 왜 그리 동그라미가 많은지 뒤에서부터
일, 십, 백, 천, 만하며 열심히 헤아렸다. 마음에 드는 것을 고르고
난 후에 계산대에 가서 2만 원을 지불했다. 그런데 매장 아가씨가 차갑게
눈을 내려 깔고는 “2십만 원인데요” 한다. 어리둥절해서 손가락으로
가만히 따져 보았다. 도무지 감이 안 잡히는 숫자인 2십만 원을 환율
850원으로 나누니 235불이다. ‘아이구 호주에는 100불만 줘도 좋은
신발 산다, 30~40불짜리 중국산 신발도 좋기만 한데 뭐.’ 하면서도
거기서 그 비싼 신발을 사 신어야만 했다. 한국 방문 일정에 짜여진
친구의 작품전 오프닝에 가야 하는데 우아한 미술 전람회장에서 우리
개가 물다 만 신발을 끌고 다닐 수는 없지 않겠는가.
친구의 전람회장에
꽃화분을 하나 보내고 싶어서 화원에 갔다. 크고 멋진 도자기 화분에
난이 심어져 있었고
꽃송이들은 고운 천과
리본으로 둘러 싸여진 것으로 결정하고 주인에게 꽃값을 물었다. 8만원이라고
했다. 도자기 화분을 가리키며 그것은 얼마냐고 물었다. 주인은 보지도
않고 시큰둥하게 다시 8만 원이라고 했다. 그러면 합계가 16만 원 하면서
열심히 호주 달러로 계산해 보았다.
그러면 이 요란한 리본은
또 얼마이며 배달료는 얼마인가 하고 물었다. 마침내 주인이 화를 냈다.
“그 참! 가는귀가 먹었소? 모두가 8만원이라고 몇 번을 말해야겠소?”
나는 한참동안 멍해 있었다. ‘호주는 다 따로 파는데…’하고 속으로만
궁시렁거릴 뿐이고 목소리는 주눅이 들어서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한국이 참으로 인정이
많다고 생각한 것은 덤으로 오는 것만 같은 도자기 화분에다 예쁜 리본과
배달료까지 포함된 꽃을 사서가 아니었다. 주유소에 가니 차 기름도
와서 넣어 주고 차 창문을 통해서 계산까지 이루어졌다. 게다가 그 차
창문 사이로 티슈 뿐만 아니라 건빵이나 사탕봉지까지 건네받았는데
차에서 내리지도 않고 해결이 되니 그런 서비스가 감격스러웠다.
호주에서는 셀프 서비스여서
직접 차 기름을 다 넣고 나면 계산대까지 가야 하고 현찰을 주어도 눈깔사탕
하나 안 준다. 그러니 한국은 참으로 물자가 풍부하고 인심이 좋은 나라임에
틀림없었다.
비 오는 날, 희한한
광경을 보게 된 것은 X마트의 건물에 들어가서였다. 주차 요원이 유니폼을
입고 마네킹처럼 서서 건물 안으로 진입해 들어오는 차들을 로봇 같은
움직임으로 팔과 손가락을 꺾으며 방향 지시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운전자인 올케 언니께서는 그 손가락 신호를 무시하고 멋대로 넓은 공간에
주차해버리길래 놀라서 ‘저 인형 같은 사람이 저쪽에 차례대로 주차하라고
우리에게 손가락 체조를 하던데요?’하니까 ‘괜찮아요, 난 아줌마니까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거예요.’한다. 참으로 대한민국 아줌마들은 자랑스러운
축구 국가대표선수들만큼이나 파워가 있었다.
나는 그 대단한 아줌마
뒤를 졸졸 따라가다가 그 아줌마가 멈추어 서길래 나도 섰다. 그 곳
출입구엔 스테인리스스틸 통이 있었고 거기의 두 구멍에는 짧은 우산
그리고 긴 우산이라는 표시가 있었다. 그녀가 자기 우산을 그 안에 넣길래
순간 저 작은 구멍 안에서 나중에 자기 우산을 어떻게 찾아 나올까 싶은
걱정이 앞섰다. 그러나 그 우산은 어느새 비닐 포장이 되어서 밑으로
떨어져 나왔다. 건물 안에 물방울 흘리지 말고 갖고 다니라는 편리함에
놀라고 말았다. 과연 한국인들의 정열적이고 도전적인 자세가 오늘날의
경제적인 부와 편리한 문화생활을 만들었고 또 그것을 당당하게 즐기고
있었다.
그런데 나 같은 촌뜨기를
더 얼뜨기로 만드는 것은 그런 안락함을 가져다주는 똑똑한 기계들뿐만이
아니었다.
길거리의 건물 벽에
걸려 있는 어지러운 간판들은 서로가 더 돋보이려는 단어와 색상들로
인해서 원색적이고 치열하게까지 보였다. 무엇이 어느 가게인지 분간도
잘 가지 않았다.
한번은 ‘xx의수족관’이라는
간판을 보고 한국 금붕어가 우리 양어장에서 부화하는 호주 금붕어와
어떻게 다른가 싶어서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런데 그 안에 진열된 것은
인조 팔과 다리였다. 후다닥 뛰어나와서 간판을 다시 올려다보았다.
그것은 분명 무엇의
수족관이었는데 그 전치사 ‘의’가 수족관 앞에 붙어서 의수족관이라는
뜻인 모양이었다. 한글도 제대로 못 읽는 자신이 부끄러워서 혼자 얼굴을
붉히며 한참을 걷다 보니 ‘성인용품 가게’가 눈에 띄었다. 마침 갈아입을
속옷 몇 장을 사야겠다 싶어서 문을 활짝 열고 들어갔다. 그런데 이상한
모형의 플라스틱 장난감들이 진열되어 있어서 수상히 여기며 가게
안을 쭉 둘러보다가 그만 혼비백산을 하고 나오고 말았다.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그 간판을 다시 쳐다보았다. 아니, 성인용품이라니! 어쩜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싶었다. 그 전에는 (벌써 옛날이 되었나?) 그런 뻔뻔스러운
가게가 거리에 없었다. 그러니 그곳이 성인 남녀들의 속옷 파는 곳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더 이상 혼자서는 어떤 가게에도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비행기 안에서 미리 읽어 두었던 기사들은 이럴 때 하나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서울의 지하철역에서도
도움이 안 되기로는 마찬가지였다. xx동에 지하철을 타고 가겠다고 용기를
내어 보았는데 노선 표시판 앞에서 복잡하게 서로 얽혀 있는 노랑, 빨강,
파랑 선을 눈으로 따라가다 보니 도무지 어느 방향으로 가야할지 막막해졌다.
물론 일행이 있었지만 그도 한국에 사는 사람이 아니어서 지리에 무식하기로는
나와 마찬가지였다.
때마침 퇴근 시간이어서
무수한 사람들이 쏟아져 나오는데도 여행 가방을 들고 어정쩡히 서 있는
우리들에게 눈길 한번 주는 사람이 없었다. 남의 일에 상관 잘하는 한국인이라고
책에서도 읽은 기억이 있건만 우리의 이런 처지에 대해서는 왜 아무도
상관을 안 하는 건지 섭섭한 생각까지 하고 있을 때였다.
퇴근길의 무리들 중에서
짙은 갈색 피부의 한 남자가 다가와서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하고 묻는 한국어 발음은 신통찮았지만 그의 간섭이 반가웠다. 사정을
들은 그가 가방까지 들어주면서 지하철 승강구까지 바래다주었다. 인도에서
왔다는 그는 한국에서 일한 지는 8개월쯤 되었다면서 얼굴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직장과 공공장소에서 차별과 모욕을 당한 설움을 하소연하였다.
호주에서 많은 다른
민족들과 다문화 속에 섞여 살다 보니 그의 다른 피부 색깔이 내게는
전연 생소하지가 않았다. 그러나 단일 민족끼리만 살아왔던 우리 한국인들은
나라 안에서는 다른 유색 인종들을 차별하고 또 나라 밖에서는 그 자신들이
동양인으로써 백인들에게 차별 당하는 같은 처지임을 모르는 듯했다.
그에게 공연히 미안한
마음이 들어서 위로를 한답시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도 당신 나라 사람이라고
했더니 반색을 하며 누구냐고 물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라 하니 그가
밝게 웃었다. 그 외의 인도 성인과 철학자들을 얘기하다 보니 우리가
기다리던 지하철이 왔다. 그가 손을 내밀며 자신도 오늘 이렇게 한국인을
도와 줄 수 있어서 기뻤다면서 악수를 청하고는 헤어졌다. 인도인들의
철학에 복은 받는 것이 아니고 주는 것이라 했다. 거리의 거지에게 동전을
주면 그 거지가 당신에게 복을 줄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고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새 해가 오면 ‘복 많이 받으십시오.’하는 욕심스런 소망보다
‘복 많이 지으십시오.’라는 덕을 축원하기도 한다.
부처님이 보호하사
농장집으로 무사히 잘 돌아온 나는 참선방에 들어가서 들뜨고 어수선한
마음부터 가라앉혔다. 벌과 함께 잠자리도 날아다니고 밤이면 반딧불도
날아다니는 이곳, 한국에서는 멸종되고 있는 야생 여우가 여기서는 마을에
내려와서 어린 가축들을 훔쳐가는 행패를 부리지만 자연과 함께 어우러져
사는 호주, 환경오염도 느리고 개발도 느리고 사람도 느린 이 평화로운
주변 모습과 아직도 청정한 자연 환경에 안심이 되었다. 아무래도 나는
호주 촌뜨기라서 그런 모양이다.
물론 조국의 발전도
자랑스럽다. 한국의 초고속 통신망 가입은 세계 1위, 전체 기술 평가
8위, 과학 경쟁력에서도 19위, 스위스국제경영개발원의 발표가 과연
그럴 만하다고 이번 여행에서도 충분히 느꼈다. 그런데 유엔개발계획의
발표에 의하면 삶의 질은 한국이 세계 28위라 한다. 호주는 3위다.
삶의 질은 무엇인가?
서로 인종을 차별하고 문명을 구별하는 것이 삶의 질인가? 만약 눈에
보이는 것이 삶의 질이라면 눈에 보이지 않는 사고의 질은 무엇일까?
부처님은 어떻게 생각하실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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