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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호및지난호

신심명(信沁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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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여 큰스님 작성일06-01-23 14:12 조회3,030회 댓글0건

본문


Investigation.27.jpg


47.
면약불수 제몽자제


眠若不睡
諸夢自除


48.
심약불이 만법일여


心若不二
萬法一如


49.
일여체현 올이망연


一如體玄
兀爾忘緣


50.
만법제관 귀복자연


萬法齊觀
歸復自然


51.
민기소이 불가방비


泯其所以
不可方比


52.
지동무동 동지무지


止動無動
動止無止


53.
양기불성 일하유이


兩旣不成
一何有爾


54.
구경궁극 부존궤칙


究境窮極
不存軌則


55.
계심평등 소작구식


契心平等
所作俱息


56.
고의정진 정신조직


狐疑淨盡
正信調直


..............................................................................................................................................


47. 眠若不睡면 諸夢自除요


눈에
만약 졸음이 없으면


모든
꿈 저절로 없어지고


누구든지 잠을 자지
아니하면 꿈을 꾸지 않습니다. 꿈은 자기 때문에 있는 것입니다. 꿈을
꾸지 않을 정도로 살아야 합니다. 수행자의 눈매는 항상 초롱초롱하고
공부는 성성해야 합니다.


48. 心若不二면 萬法一如니라


마음이
다르지 아니하면


만법이
한결 같느니라


마음이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은 망상을 일으키지 않고 제 마음 그대로 지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본래의 마음이 달라지지 않으면 일만법이 항상 한결같다는 말입니다.


만법이 본래 한결 같아서
여여부동한데도 그것을 보지 못함은 중생의 마음 속에 분별심과 차별심이
있기 때문이므로 마음 가운데서 분별심, 차별심을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음에 이변二邊인 분별심, 차별심이 없으면 만법이 여여한 그대로라는
것입니다.


49. 一如體玄하야 兀爾忘緣하야


일여는 바탕이 현묘하여


모든 인연을 잊고 홀로
오똑하니


일체 만법이 여여하다,
일여하다는 것은 그 본체가 현묘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마음은 일여하고
여여하여 오직 하나로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이라 말할
수도 없고, 비유할 수도 없습니다. 그것은 물질도 아니고, 허공도 아니고,
산 것도 아니고, 죽은 것도 아니며, 남자도 아니고, 여자도 아니며,
그 무엇이라고 이름 지어 말할 수 없습니다.


한결같이 그대로 있는
이 마음은 본래의 바탕이 현현밀밀玄玄密密하고, 현현묘묘玄玄妙妙하여
모든 인연을 여의고 홀로 오뚝이 드러나 있습니다. 오뚝하다는 말은
홀로 높아서 상대가 끊어졌다는 것입니다. 부처도 중생도 아니므로 부처가
된다 하여도 이 마음자리가 부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처니
중생이니 없어지면 이 마음자리 하나만 남게 됩니다. 현묘한 본체는
석가가 아무리 알았다 해도 실제로 알 수 없으며, 달마가 전했다 해도
전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옛사람이,
‘석가도 알지 못하거니 가섭이 어찌 전할 수 있을 건가?'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정말 알 수도 없고 전할 수도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그럼 석가가 깨치고 가섭이 전했다고 하는 것도 거짓말인가? 그러나
참으로 알 수 없는 가운데 분명히 알고, 전할 수 없는 가운데서 분명히
전하는 것이 불교의 묘법이니, 이것이 참으로 현묘한 이치라는 것입니다.


‘홀연히 일체 인연을
다 잊었다'고 하는 그 인연이란 생멸인연生滅因緣을 말합니다. 더 나아가서
모든 인연을 다 잊어버렸다는 것입니다.


50. 萬法이 齊觀에
歸復自然이니라


만법이
다 현전함에


돌아감이
자연스럽도다


만법이 현전하다는
것은, 일체 만법이 환히 나타나 일체 만법을 훤히 본다는 뜻입니다.


돌아감이 자연스럽다는
것은, 본래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으로 자연스럽게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51. 泯其所以하며 不可方比라


그 까닭이 없어져서


견주어 비교할 수도
없으니


그러나 그 이유는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부사의해탈경계不思議解脫境界이기
때문에 말로써 표현할 수 없고, 마음으로도 생각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비교해서
이렇다 저렇다 설명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물질도 허공도 아닌 이 마음은
무슨 모나거나 방원장단方圓長短(둥글거나 길거나 짧음)이 없으므로
불가방비不可方比라 하였습니다.


52. 止動無動이니 動止無止니


그치면서 움직이니
움직임이 없고


움직이면서 그치니
그침이 없나니


고요함은 움직임이
그친 상태며, 움직임과 연결된 움직임의 다른 모습에 불과합니다. 움직임을
상대로 그치고, 그침을 상대로 한 움직임이므로, 구경에는 움직임도
그침도 아니니, 동動이 지止고 지止가 곧 동動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움직임은 그침에
즉卽한 움직임이므로 움직임이 없는 것이며, 그침은 움직임에 즉卽한
그침이므로, 그침이 없어서 움직임과 그침이 함께 융통자재하면서 동시에
두 상대법이 없어짐을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움직임은 그침 가운데
움직이며, 그침은 움직임 가운데 그침이어서 움직임과 그침의 두 상대법이
함께 없어지면서 함께 서로 통하고 있습니다.


53. 兩旣不成이라 一何有爾아


둘이
이루어지지 못하거늘


하나인들
있을 건가


둘이 이미 이루어지지
못한다는 것은 움직인다, 그친다는 것은 근원적으로 성립되지 못합니다.
그 자리는 움직임도 그침도 없습니다. 그 둘이 없어짐도 없고, 그 둘을
떠난 하나도 없습니다.


그렇기에 부처님께서는
49년간 동분서주하며 팔만장경을 설하시고도, 나는 일찍이 한 자도 설한
바 없다고 설하시고, 달마 대사도 문자를 세우지 않는다고 해놓고 혈맥론血脈論까지
설하여 놓으셨습니다. 두 분은 설했다고 할 것입니까, 설하지 않았다고
할 것입니까?


백의관음白衣觀音은
설함없이 설하고


남순동자南巡童子는
들음이 없이 듣습니다.


54. 究境窮極하여 不存軌則이요


구경하고
궁극에 이르면


일정한
법칙이 없느니라


양변이 떠나 주관 객관이
끊어진 구경처인 궁극에 이르면 일정한 법칙이 있을 수 없습니다. 양변이
떠나 주관 객관이 없어지면 일체 번뇌망상이 쉬었기 때문에 하나조차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법칙이 없다
해서 단멸에 떨어진 것은 아닙니다. 작을 수도 있고, 클 수도 있으며,
모날 수도 있고, 둥글 수도 있기 때문에 현전한 진여대용眞如大用이
자유자재하고 호호탕탕하여 법을 마음대로 쓰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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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契心平等하여 所作이
俱息이로다


마음에
계합하여 평등한 이치에 다다르면


짓는
바가 함께 쉬도다


마음에 계합하면 일체에
평등하게 됩니다. 다른 말로 마음이 평등한 이치에 계합한다고 함은
마음이 본래의 마음자리에 딱 들어맞는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경지에
들면, 마음은 이치 바로 그대로이며, 쉬어서 고요하며, 그대로 성불입니다.
그 곳에서는 일체를 평등하게 봅니다.


평등이란 남성과 여성,
선과 악, 있는 것과 없는 것, 유정有情과 무정無情 등 양처이변兩處二邊의
대립된 경지를 벗어나서 모든 시비곡절이 끊어진 경지를 말하며, 진정한
이치를 뜻합니다.


일체에 평등하면 조금도
차별망상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여여합니다. 산은 산 그대로 높고,
물을 물 그대로 깊은데 그 가운데 일체가 평등하고 여여부동如如不動함을
보지 않을래야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짓고
짓는 바가 함께 끊어진다', 쉰다, 즉 능소能所가 끊어진다고 하니 일체
변견邊見을 다 쉬어버렸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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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狐疑가 淨盡하면
正信이 調直이라


여우
같은 의심이 다하여 맑아지면


바른
믿음이 고루 발라지며


여우 같은 의심이란
변견과 망견이 있는 의심입니다. 여우란 의심이 많은 짐승입니다. 여우처럼
영리한 사람일수록 의심이 많습니다. 이것인가 저것인가 따지고 분별하고,
과학인가 종교인가 철학인가, 이모저모로 알아보려고 합니다. 이 일은
의심하고 따질수록 멀어집니다. 그 따지고 의심할 마음이 없어지고 맑아지면
화살처럼 바른 믿음이 서게 됩니다.


바른 믿음이란 초발신심初發信心이
아니라 신信, 해解, 오悟, 증證의 원만한 믿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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