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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호및지난호

생활인의 결제와 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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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미령 (동국역경원 역경위원… 작성일06-01-23 17:55 조회2,59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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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거철입니다. 안거
석 달 동안 용맹정진하려는 일념으로 깊은 산사의 선원과 도심의 선방마다
열기가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습니다.


안거는 어디에서 유래되었을까요?


부처님이 계신 곳에서
치열하게 수행하여 공부가 무르익으면 많은 스님들은 자기와 인연 닿는
곳으로 법을 전하러 떠나갑니다. 하지만 비가 많이 내리는 우기 석 달
동안은 포교도 잠시 쉬고 한 곳에 정착하여 자기 수행에 매진합니다.
우기 동안은 함부로 길을 다니다가 물에 휩쓸려가기 쉽고 병을 얻기도
쉽습니다. 그리고 이때는 식물들이 맘껏 자라나고 작은 곤충들도 꾸물거리며
세상 밖으로 나오는데 스님들이 길을 다니다가 이런 생명들을 자칫 다치게
할 수도 있습니다. 하다못해 재가자들이 애써 마련해준 필수품들이 물에
떠내려가기도 할라치면 ‘믿음으로 보시한 물건을 소홀히 한다’는 재가자들의
비난을 면하기는 무척 어렵습니다. 이런 비난을 전해들은 부처님께서
수행자들에게 석 달 동안의 정착기간을 강제조항으로 마련하신 것이
안거입니다.


안거를 시작하는 것을
결제라고 하고, 안거를 마치고 자유롭게 다닐 수 있게 되는 것을 해제라고
합니다. 출가한 스님들에게 결제가 갖는 의미는 참 큽니다. 홀홀 단신
출가하여 오직 진리를 찾는 마음으로 쉬지 않고 흘러 다니는 수행납자가
거의 강제적으로 석 달 동안 도반들과 한 공간에 모여 지내면서 공동체
속에서 자신의 기량을 가늠해보고 연마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기
때문입니다.


세속과 인연을 끊은
스님들은 수행에만 전념하므로 아주 짧은 시간에도 크나큰 진리의 세계로
성큼성큼 들어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같은 생활인들은 그러지
못합니다. 생활인들에게는 아침에 눈을 뜨는 순간 스님들의 치열한 구도현장에
버금가는 삶의 현장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 양 어깨에는 가족들이
매달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절대로 단 하루도 쉴 수가 없습니다. 하루해가
저물도록 땀 흘리며 뛰어다니고 나서야 그 현장에서 풀려납니다.


출가한 스님들에게는
결제에서 해제하기까지 석 달 동안 용맹정진할 기간이 주어집니다. 하지만
재가자들에게는 눈뜨는 아침부터 해가 진 저녁까지가 고군분투해야 할
정진의 시간입니다. 그렇다면 생활인들에게는 매일 아침이 결제요, 집에
돌아와 잠옷으로 갈아입는 매일 저녁이 해제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닙니다.


우리는 생활인이기에
생업에 충실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부처님 가르침도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먹고 사느라 자신을 돌아볼 틈도 제대로 갖지 못하는 이런 재가 생활인에게
부처님은 어떤 가르침을 주셨을까요?


“가정생활을 하면서
삼보에 귀의하는 사람을 생활인(우바새)이라 한다. 세속에 살면서 집안을
잘 다스리고 목숨이 끝날 때까지 삼보에 귀의하여 바른 믿음을 가지며
오계를 잘 지키기를 서원한 사람이다.”(잡아함 929경)


재가자로서 그리고
불자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부처님은 집안을 잘 다스릴 것을
가장 먼저 주문하십니다. ‘생활에 충실하라’라는 뜻이지요. 그렇다면
어떤 것을 바른 생활이라 할 수 있을까요?


“무리하게 구하지
않고, 분수를 알아 만족할 줄 알며, 남을 속이는 그릇된 직업으로 생활하지
않고 오직 법답게 재물을 구하는 것을 바른 생활(正命)이라 한다.”(중아함
분별성제경)


부처님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어떻게 먹고 살 것인가’하는 구체적인 지침을 내리고
계십니다.


“먼저 기술을 익혀라.
그래야만 재물을 모을 수 있다. 재물을 얻어 풍요로워지거든 잘 지켜라.
재물을 쓰되 사치하지 말고 줘야 할 사람을 잘 가려라. 남을 속이거나
저돌적인 사람은 아무리 애걸해도 빌려주지 말라. 벌이 여러 꽃에서
꿀을 모으듯 재물을 모을 때 작은 것을 소홀히 하지 말라. 먹고사는
살림에 만족할 줄 알고, 자기 직업에 게으르지 말며, 틈틈이 모으고
쌓아 가난하고 어려울 때를 대비하라.”(장아함 선생경)


생활인으로서 가장
먼저 이와 같은 주문을 하신 뒤에 부처님은 이어서 우리를 차츰 진리의
세계로 이끌고 가십니다. 마하남이라는 사람이 여쭈었습니다.


“어떻게 해야 생활인으로서
바르게 사는 것입니까?”


“생활인으로서 믿음은
있지만 계율이 없으면 완전하지 못한 삶이다. 그러므로 계율을 잘 지켜야
한다. 계율이란, 산 목숨을 공연히 죽이지 않고, 도둑질하지 않으며,
음행하지 않고, 속이지 않으며 술에 취하지 않는 것이다.”


“믿음과 계율만 지녔다고
해도 보시하지 않으면 그 또한 완전하지 않다. 그러므로 부지런히 베풀어
공덕을 닦아 나가라. 기쁜 마음으로 보시하되 손수 베풀고 후회하지
않는 것이 바른 보시행이다.”


“믿음과 계율과 보시에
완벽했더라도 수행자에게 찾아가 법문을 듣지 않으면 그 또한 완전하지
않다. 그러므로 절을 찾아가서 법문을 들어야 한다. 법을 듣고도 몸소
실천하지 않으면 완전하지 못하니 들은 대로 잘 실천해야 한다. 이것이
생활인(우바새)이 해야 할 도리인 것이다.” (잡아함 929경)


부처님은 생활인이
가정을 잘 꾸리고 보시하고 계율을 지켰다면 반드시 법을 들으러 다닐
것을 당부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들 세속의 삶이란 참으로 덧없어서 그
속에서는 완전하고 영원한 행복을 찾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들은
산다는 게 희로애락에 적당히 묻어서 지내는 거라며 스스로 위안을 삼기도
하지만 부처님은 중생들이 생사윤회하며 흘린 눈물이 저 태평양보다
더 많음을 지적하십니다.


불자에게는 계율과
선정과 지혜의 공부거리가 있습니다. 계율을 잘 지킨 사람만이 선정에
무난하게 들어갑니다. 하루에 단 30분 만이라도 자기 속으로 모든 생각과
관심을 집중시킨다면, 이러기를 죽을 때까지 이어갈 수 있다면, 그런
선정 속에서 부처님의 가르침과 스님의 법문과 오늘 읽은 한 권의 불서
속에 담긴 내용을 온전히 내 머리로 생각하고 내 마음으로 이해해간다면
그 사람은 집에 있어도 출가한 것이 됩니다. 이것이 바로 깊은 산사
두툼한 좌복 위에서 땀 흘리는 석 달의 정진을 날마다 가정에서 실천해나가는
완전한 생활인의 삶임에 틀림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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