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IMF 관리체제가
우리나라를 덮쳤을 때 였다. TV를 비롯한 모든 매스컴에서는 생소한
단어들이 넘쳐 났다. ‘IMF’, ‘구조조정’, ‘모라 토리 움’. 우리네
소시민들은 휘둥그레 눈을 떴다. 이게 무슨 난리인가? 나도 엉거주춤
시류에 동참하게 되었다. ‘하긴, 너무 들 흥청망청 했었지’, ‘진작에
모두들 정신 차렸어야지’ 누구나 할 것 없이 목소리를 높여 책임을
전가시키기에, 서로를 원망하기에 바빴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다른 모든 경제적 타격은 제쳐 두고라도 나에게는 군 제대를 코앞에
둔 아들이 있었다. 당장 취업 문제가 다가왔다. 제대 후 졸업을 하면
적당한, 괜찮은 직장에 들어가리란 수순을 너무나도 당연히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면 모든 어려움은 일시에 해결될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매스컴의 야단법석에 비례해서 마음 속 불안지수도 높아만 갔다.
아들이 제대하기 전
무작정 108배를 시작했다. 이는 어떤 발원이라기 보다 내 마음의 불안을
잠재울 한 가닥 희망의, 최선의 수단으로서 였다. 그냥 불교 신도란
호칭만 달고 다닌 지 십수 년이 되었다.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식으로 편리할 때도 있었다.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던가? 어떤
때는 어줍잖은 설득이나 회유, 강요도 했었다. 그러나 기본적인 불심,
확실한 신념이 없는 이론은 말놀이에 불과할 뿐, 빈 바람벽처럼 공허했다.
나의 얄팍한 지식이나, 절에 다닌 세월의 숫자만큼이나 아상(我相)만
높여갔다.
‘부처님 아들의 취업이
걱정됩니다.’ 기복(祈福)에서 출발한 내 기도는 108 번뇌를 넘나들며
‘과거, 현재, 미래, 욕심, 허세, 집착 등 모든 인간사 속성의 구석구석을
훑고 뒤지며 형식적인 108 번의 절로서 마치기를 수없이 반복했다. 어떤
날은 ‘이게 기도가 아닌데….’ 라는 자각이 슬며시 들었으나 늦은
밤, 절을 시작하면 마음은 또 다시 허욕의 물살 속을 허우적거렸다.
유년은 아주 병약(病弱)
했었다. 초등학교 시절, 신학기 몇 날은 항상 결석해 제대로 정해진
내 자리에 앉아 본 기억이 별로 없었으며, 소심한 성격을 점점 더 위축시켰다.
체육시간에는 외톨이로 운동장 귀퉁이 꽃밭에서 사금파리로 금 긋기를
하며 지낸 기억, 제법 키가 커진 5학년 때 외할머니의 등에 업혀서 학교
간 부끄러운 기억, 반쯤 밖에 다니지 않은 중학교 1학년 때 ‘4등’이
적힌 통지표를 보시고, 무뚝뚝한 아버지께서 웃으시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던 기억 등…. 나는 항상 ‘병골이’, ‘약골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숫기 없는 아이로 인식되어져 뒷줄로 만 다녔다.
결혼 후에는 조금 나아졌지만
‘기관지 천식’을 천형인 양 평생 달고 살아가는 내게 요령 없는 108배는
무리였는지 처음 얼마 동안은 심한 몸살을 앓았다. 숨이 가빠질 때는
다반사였고, 무릎이 아파 약을 붙이기도 했다. 어떤 날은 절하기 싫어
괜히 방안을 서성이기도 했고, 피로회복제를 꺼내 마시기도 했다. 예전에는
‘성철 스님의 3000배까지는 아니더라도 1000배는 어렵사리 한 적도
있었는데….
‘몸이 있어야 마음도
있는 거야’ ‘부처님께서도 이렇게 힘들어하는 것을 원하지 않을 거야’
‘엄마, 오늘 저녁은 제가 절을 할게요.’ 육체적 고통은 차치하고라도
식구들은 별의별 이유를 붙이며 만류했지만 나 또한 ‘한국 아줌마의
자식에 대한 집착’에서 예외는 아니었다. 그런 저런 사연을 만들며
108배는 슬그머니 내 생활의 일부분으로 녹아들었다. 차츰차츰 흔들림도
줄어들고 그 많던, 거미줄 같이 얽혀 나를 옥죄던 잡다한 생각들도 어느
정도 정리가 되어가는 것이 피부로 느껴졌다.
언제부터인가
108배를 할 때 잡념이 없어졌다. 그냥 부처님께 절을 하고 또 할 수
있다는 것만이 무작정 좋았다. 이런 것이 무념(無念)일까? 나도 무슨
발원(發願)을 해야 하지 않을까? 의식적으로 생각을 모아 발원을 해
보지만 어느새 마음은 무념 상태가 되어가곤 했다. 신기했다.
그렇게 나를 싸고 있던
걱정, 불안, 욕심 등이 108배를 할 때는 조금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20분 정도 부처님만을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이 온갖 잡다한 생각으로부터
떠날 수 있어 행복하기까지 했다. 물론 평소에는 누구를 흉보다가, 시린
무릎도 걱정하다가, 생각으로 기약 없는 열두 채 기와집도 지었다가,
뒤죽박죽이었지만.
‘1000일을 마치면
그만 두어야지’라는 생각도 1,000일이 지나자 욕심인지 집착인지
108배를 계속했다. 그 사이사이 걱정거리가 생기면 ‘300배로 7일 기도를
해야지’, ‘300배로 100일기도를 해야지’ 하며 욕심을 늘렸다. 여하튼
기도에 탄력이 붙었다고나 할까? 기도시간이 즐거워지며 기다려질 때도
있었다.
시시비비에서의 명확한
결론, 낯선 상대에 대한 강한 거부감, 용서나 실수에 대해 인색한 고정관념,
형상화되어 질 정도로 굳어가던 이기심 등이 한 겹 벗겨져 나감을 느끼며,
지나치게 신중하고 모든 일에 생각만 많은 나 자신이 객관적으로 보였다.
인정하고 싶지 않던 나의 단점들이 수긍이 되며 개선의 여지가 보이기
시작했다. 아울러 소심하고 위축되어 있던 나의 또 다른 부분은 스스로
다독여졌다.
그러자 믿기지 않는
일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예전엔 조금만 피곤해도 숨이 가빠지고,
가벼운 감기 증세도 빠르게 천식으로 옮아갔었다. 밤에 자다가도 숨이
조여들면 앉아서 밤을 새울 때가 많았다. 기도(氣道)를 넓히는 흡입제를
항상 소지하고 다녔다. 또 빈혈이 심해 길에서 쓰러져 ‘119’에 실려
간 적도 여러 번 있었다. 이런 여러 증상들이 나도 모르게 조금씩 나아졌다.
차츰 투약 횟수가 줄어들어
1주일 분의 약으로 한 달을 지내고 6개월을 견디게 되었다. 맹세코 나를
위한 기도는 한번도 없었다. 아이들의 일을 비롯한 다른 여러 집안 일들이
하나씩 해결되고 제 자리를 잡아갔다. 가슴 속 밑바닥에서 감사함이
일어나 서서히 확신으로 바뀌었다. 여태껏 살아오면서 얼마나 많이 방황하고
불신했으며 거부했었던가? 그래도 나는 역시 부처님 자식이었다.
부처님께서는, 딸 둘을
낳고 아들을 소원하신 친정어머니에게 환한 금빛 물살이 퍼지는 둑 위에서
발가숭이 계집아이를 안겨 주셨다고 했다. 기회 있을 때마다 불심이
남다르신 어머니를, 알량한 지식을 내세우며 외면했었다. 참 너무도
먼 길을 굽이굽이 돌아왔다.
부처님에 대한 믿음이
겸손으로, 하심으로, 환희심으로, 또 진리에 대한 갈증으로 찾아왔다.
부처님 법이나 진리에 대한 학문적 지식이나 의문이 끊임없이 일어났다.
어떤 체계적인 지식이 없어 많은 방황을 했다. 참선에 대한 호기심에
이곳저곳을 기웃거렸다. 손에 잡히는 대로 여러 경전들을 읽고 외우며
가끔씩 큰스님 법문도 경청했다.
예전 얼마간의 교사생활의
연장선에서 였는지, 사회의 어떤 문제보다 어린이들에게 관심이 많아
자연스레 108배’는 우리들의 아이들, 특히 그날그날 머리에 떠오르는
장애아, 소년 소녀 가장 등 불특정의 아이들에게로 옮아갔다. 금강경의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其心)’에 감히 가까이 다가서는
것인가? 하잘 것 없는 내가 무슨 큰 힘이 있어 도움이 되겠냐마는 그래도
부처님께서는 그 근기에 맞게 어떤 방편으로든 나투셔서 해결해
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생겼다.
부처님께서는
내게 참 많은 것을 주셨다. 건강한 몸을 가지지 못한 데다, 경제적 어려움까지
겹쳐서일까? 예전에는 부정적 시각이 나를 옭아매었다. 마음은 시시각각
변하여, 똑 같이 있는 반 컵의 물도 속절없이 기분이 맑은 어떤 날은
반 컵이나 물이 남았다고 신명을 내다가, 또 까닭 없이 우울한 다른
날은 어깨를 짓누르는 삶의 무게로 세상에 주눅 들며 형편없이 위축되었다.
그럴 때마다 부처님 법문을 들었다. 그러면 이리저리 날뛰던 두렵고
초조하던 마음이 어느 틈에 안정되며 콧노래가 나왔다. 생활이 차츰
즐거워지며 세상을 보는 시각도 긍정적으로 바뀌어갔다.
특히 마음 속에서 ‘계산’이
없어졌다. 대부분의 가정에서는 절약이나 검소함을 미덕으로 여기며
산다. 물론 나도 마찬가지이다. 8만 원이 모이면 10만 원을 만들고 싶고
90만 원이 되면 100만 원으로 채우고 싶은 소박한 마음을 거의 대부분의
여자들은 가지고 있다. 치밀한 성격의 나도 한 달의 수입에서 기독교의
십일조(十一條) 마냥 내 나름의 정해 놓은 액수를 넘지 않고 불전을
기복(祈福)의 한 가지 수단이나 방법으로 생각했다. 나의 불전에는 무의식적으로
계산되어진 보상이나 대가가 도사리고 있었다. 절에 갈 때마다 불전
때문에 자주 갈등이 일어났다. 그런데 이것은 기복도 보시도 아니었다.
앞으로의 나나 가족을 위한 든든하고 확실한 저축이었다. 내가 누구에게
베풀다니, 그 베품의 밑바닥에 나의 아상(我相)은 없었는가? 과연 내가
그만한 그릇이 되는가? 너무도 건방진 생각을 하고 있었다. 부끄러움과
반성이 교차되었다.
무주상보시(無住想布施)를
생각했다. 혹시라도 내 안 구석 어딘가에 아상이 도사리고 있을 것 같아
느슨해지는 마음을 다잡는 심정으로 정근, 사경도 병행했다. 감히 참선까지는
아니더라도 면벽(面壁) 흉내도 내었다.
그래서 나는
남이 갖지 않는, 어떤 사고나 위험으로부터도 우리 식구들을 보호해줄
나 혼자 만의 비밀스러운 우주은행에 저축하기로 했다. 그리고 나니
미약하나마 ‘텔레 뱅킹’ 등으로 어떤 기관에 송금할 때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다. 어떤 때는 즉흥적인 송금 후 일말의 후회를 한 적도 있었다.
비록 형체는 없으나 진리의 세계에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엄연히 존재하는
당연한 사실인 것을 여태껏 모르고 살았다.
절에 갈 때 불전 함에
넣는 ‘금액’에 대한 아쉬움이나 망설임도 없어졌다. 돈으로도 해결
못할 미래에 대한 막연하던 불안도 걱정도 두려움도 사라졌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우주 저금통장’에도 빨리빨리 잔액을 불리고 싶었다.
혹시라도 미래에 있음직한 위험에 내 통장의 잔고가 모자랄까봐.
이렇게 내 마음을 바뀌게
해준 ‘주인공’ 부처님에 대한 감사함이 마음과 몸 구석구석까지 가득
찼다. 나 자신 스스로도 대견해졌다.
자리(自利)에서 이타(利他)로
넘어가는 깨우침이 ‘우주 저금통장’이란 징검다리로 한 걸음 다가왔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부처님께서는 백 여덟 번의 많은 기회를 주신 것 같다. 그 많던 정신적,
물질적 깨우침의 기회를 다 놓쳐 버리고 허우적거렸는데도 마지막 백
여덟 번째의 기회를 남겨 주셨다. 이제는 모든 대상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다. 힘들고 감당 못 할 일이 생기면 우주와 연결 지어 진 나의
주인공(眞我)에게 자연스레 맡기게 되었다. ‘주인공, 네가 해결하고
이 시자를 잘 이끌어가’ 라고. 이제는 흔들리지 않을 자신감도 생겼다.
누구에게나 미소로
대하고 여유로워지며 칼날같이 날카로웠던 마음도, 주눅 들고 위축되었던
마음도 당당하고 적극적이 되었다. 두려움이 없어졌다. 이 튼실한 묵시(默示)를
누구에게나 알리고 싶다. 혹시라도 생활이 힘이 들고 부대낄 때, 위기는
다시 없을 기회라는 그 평범한 진리로 부처님의 바다에 풍덩 뛰어들기를
권하고 싶다. 껴안기는 자식을 내칠 부모는 없지 않은가? 수 천 년을
이어 온 부처님의 자비심이 이를 증명하고 있으니.
부처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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