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싹들에게 줄 좋은 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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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영자(서울 강북구 수유동) 작성일06-06-11 14:59 조회3,488회 댓글0건본문
새싹들에게 줄 좋은 약
이영자 (서울 강북구 수유동)
불교를 잘 알지 못하면서 친정어머니를 따라 조그만 절에 1년에 한 번 초파일에 등을 다는 정도였습니다. 1984년 겨울방학을 하던 날, 우연히 손목이 순색으로 붓기 시작했습니다. 수소문 끝에 잘 고친다는 병원을 찾았는데 의사의 오진으로 주사를 잘못 맞아 근육 결핵을 얻었습니다.
1986년 대학입시를 앞둔 큰아들을 앞에 놓고 매일매일 유서를 써가며 생활하던 중 재수술하고 퇴원한 지 1주일 되던 날 고마운 두 친구의 권유로 봉은사 삼천배 기도에 동참하기로 했습니다. “너는 약만 가지곤 고칠 수 없을 것 같으니 부처님께 매달려라.”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제 나이 사십 중반. 저는 살 만큼 살았다고 생각이 들었으나 죽는다고 생각하니 두 아들의 얼굴이 크게 떠오르며 어머니 노릇을 못한 것이 미안해서 지금은 죽을 때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두 아이들 대학 입학이라도 시켜놓고 가면 원이 없을 것 같았습니다. 두 친구를 따라 봉은사에 갔습니다. 삼배도 제대로 안 해본 저는 치마를 입고 절할 준비도 없이 갔습니다. 뼈만 앙상하게 남은 처참한 병객의 모습으로……. 부처님을 뵙고 앉아 있는데 갑가지 마음 깊은 곳에서 기도가 튀어나왔습니다.
“부처님, 저 좀 살려 주세요. 우연 병고로 고통을 당하고 있는데 두 아이들이 기운을 잃어 공부를 놓고 있습니다. 저 아이들 대학 입학하는 것만 보아도 원이 없겠습니다. 부처님, 저 퇴원한 지 1주일밖에 안 되는데 삼천배는 제대로 못할 것 같습니다. 천배만 하더라도 살려 주세요.”하며 어처구니없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오후 7시, 모든 준비가 끝나고 삼천배가 시작되었습니다. 북을 치는 스님, 염주를 돌리는 스님, 수천 명의 많은 신도들은 그 북소리에 맞추어 절을 했습니다. 환희심이 났습니다. 20분 하고 10분 쉬고, 40분 하고 10분 쉬고, 천배가 끝날 무렵, 윗뜰에 계시던 스님께서 처참한 제 모습을 보셨던지, “노약자는 앉아서 반배 하세요. 부처님은 다 아시니까 반배도 한배로 쳐주시니까 욕심내지 말고 앉아서 하세요.”라고 하셨습니다.
천배를 마치고 반배로 하다가 좀더 할 수 있는 힘이 남아 있는데 꾀를 부리는 것 같은 생각이 들어 다시 “부처님, 삼백배만 더 제대로 할 수 있게 힘을 주세요.”하는 기도를 드린 후 다시 삼백배를 마치는 순간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제가 최선을 다해서 할 수 있는 한계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순간 알 수 없는 환희심과 함께 후련한 한숨이 길게 내쉬어지면서 ‘나는 살았어!’하는 안도감이 들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열심히 반배씩 채워 새벽 세 시가 지나서 삼천배 기도가 끝이 났습니다. 기진맥진한 상태로 간단하게 새벽 예불을 올리고 친구의 도움으로 집에 돌아왔습니다. 만 24시간을 늪에 빠진 듯이 깊은 잠을 잤습니다. 다음날 새벽 세 시쯤 되었을까, 선명한 총천연색 꿈을 꾸었습니다. 그제 절하던 봉은사였습니다. 부처님이 차에서 내려 제 앞에 마주 서시더니 어깨 앞, 뒤 수술한 자리 세 곳을 손으로 꾹꾹 눌러 주시면서 음성은 들리지 않았지만 “아무 걱정 마라. 지금 먹고 있는 약을 조금만 더 먹어라.”하는 말씀을 몸으로 느끼면서 깜짝 놀라 눈을 떴습니다. 아침에 출근을 하려던 남편이 수술 자리에 소독을 하고 거즈를 갈아붙여 주려고 저를 깨웠습니다. 일어나서 꿈 얘기를 했습니다. 남편은 제게 조금이라도 희망을 주려고 부처님 가피를 입어 곧 나을 것이라며 저를 위로했습니다. 같이 삼천배를 하자고 인도했던 친구에게도 전화를 했습니다. 친구는 환호성을 쳤습니다. “그래도 전생에 많이 닦았나 보다. 어떻게 삼천배 단 한 번에 가피를 받았니?” 좋아하며 위로하고 힘을 주었습니다. 정말로 고마운 친구였습니다.
아침, 저녁으로 소독을 하고 거즈를 갈아붙여 주는 것이 일과로 되어 있는 남편은 바로 부처님이셨습니다. 소독을 하려고 거즈를 떼는 순간 그렇게도 질척거리던 고름이 뽀송뽀송한 채 조금만 묻어 있는 것이었습니다.
“야! 기적이야! 인제 다 나아서 막혔나 봐!” 신이 나서 소독을 하고 거즈를 붙여주고 출근을 했습니다. 다시 소독할 저녁시간, 이게 웬일인가? 인제 고름 같은 건 찾아볼 수 없이 아물어 버렸습니다. 한 달 후, 의사 선생님으로부터 결핵약을 끊어도 좋다는 허락이 났습니다. 잘 먹고 잘 자고 과로하지 않으면 된다고 하시며 매년 술 한 병씩 사 가지고 와서 건강한 모습 한 번씩 보여주면 된다고 농담까지 하셨습니다.
하늘은 높고 맑았습니다. 몇 년 동안 시들어 보였던 나뭇잎들이 싱그러워 보였습니다. 그로부터 친구들을 따라 절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절에 아침에 출근해서 사시불공, 2시 기도, 각 신행단체 법회, 저녁예불 등 모든 기도에 매일 참석을 하면서 출퇴근을 했습니다. 그러면서 미신이라고 생각했던 불교가 가장 합리적이고 대단히 훌륭한 과학적이고 세계적인 종교라는 것이 가슴에 와닿으면서 머리 좋은 사람들이나 외울 수 있을 것 같던 천수경도 외웠고, 각종 다라니들도 외우면서 각 단체 법회에 당당하게 참석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육신의 병을 고쳐주신 부처님께서는 법당 안에서도 가장 훌륭한 선지식들을 도반으로 인연지어 주시어 동참 기도와 방생기도, 경읽기 등 1년 365일 하루도 부처님을 떠나서 살지 않게 잡아주셨습니다. 잠이 깊이 들기 전까지는 참회진언, 광명진언 외우기, 참회하며 방생기도, 철야정진기도, 야외법회 동참해 야단법석에서 듣던 큰스님들의 환희스러웠던 설법……. 『지장경』을 읽으면서 조상 천도재도 수없이 지내드렸고, 어언 『지장경』 1천 독을 마쳐갈 무렵까지 수없는 가피를 받으며 감사한 마음으로 새벽 4시 반에 일어나 샤워하고 조계사로 가는 버스 속에서, 퇴근 후 집에 가는 버스 속에서 어느 시간이나 짜투리 남는 시간에는 『지장경』을 읽었고 걸을 때는 참회진언, 광명진언, 멸업장진언 등을 외우는 등 부처님을 떠나서는 생활하지 않았습니다.
시간이 부족하고 갈증이 났습니다. 잠자는 시간이 아까웠습니다. 더 알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기초교리 1기 야간반에 등록을 했습니다. 퇴근 후 급히 달려와 저녁을 지어 차려놓고 다시 버스를 타고 조계사에 와서 7시부터 9시까지 공부를 하는 시간은 정말 행복했습니다. 불교, 바로 그곳이 극락이었습니다. 그러는 동안 제 스스로가 많은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잘못된 일이 모두 나에게서 비롯되었음을 알았고 남의 탓을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사치하던 마음이 검소해졌습니다. 주는 병이 생겼다고 할 정도로 남의 입장을 먼저 헤아릴 줄 아는 마음과 베푸는 마음이 더 커졌습니다. 절에서 시작하는 불사에는 능력껏 모두 동참했습니다.
어머니의 역할이 온전해지고 나니 이해와 사랑 속에서 가족들의 마음도 모두 평화로웠습니다. 또 부처님께 일심으로 기도드리면 위신력으로 모든 것이 원만성취됨을 알았습니다. 재수하던 아이가 대학에 합격하고 불교 써클 회장을 맡으며 정진하고, 엄청난 교통사고 중에서도 남편과 큰 아이 모두 머리카락 하나 다치지 않고 살아났던 기적 같던 일, 작은 아이의 한의대 입학 등 부처님의 가피 속에 살고 있습니다. 남편도 10년 동안 크고 작은 기도에 동참해 주며 일요법회에 꼭 참석해 법문을 들은 후에야 사적인 약속을 하고, 작년 9월에 결혼한 큰며느리도 『법화경』 사경을 하며 기도에 동참했습니다.
“내생이 어디 있니? 살았을 때 하고 싶은 대로 하다 죽는 거지.”하시며 저를 원망하셨던 시어머님까지도 요즘은 경을 열심히 읽으십니다. 남동생들도 모두 절에 다니며 나름대로 법회 참석을 하고 있습니다. 한 달에 한 번은 멀리 경상도에 있는 절까지 다니면서 가족 철야정진을 할 정도가 되었으니 보기만 해도 행복합니다. 큰 조카는 초등학교 6학년때 관세음보살 육자대명왕진언을 외우도록 해서 지금은 고등학교 2학년인데 4년을 하루도 거르지 않고 108배 하며 공부하고 있습니다. 전체 수석을 놓치지 않는 신심 깊고 안정된 아이가 되었습니다. 제가 불교를 믿은 10년 동안 시댁, 친정 모두 정법으로 불가(佛家)가 이루어졌습니다. 실로 큰 가피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하루는 법당에 앉아 “부처님, 저 이제 학교에 사표 내고 부처님 전에 기도 정진만 하겠습니다.”하고 부처님께 고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아니야, 사표 내지 말아라. 네가 할 수 있는 기도는 많은 아이들과 사람들에게 불법을 전하는 일이지. 해마다 새로운 많은 아이들과 학부형과 교사들을 만나면서 불심을 심어야지. 자신만을 위한 기도는 작은 기도야!” 하시며 미소지으셨습니다.
“그래, 바로 그거야! 내가 부처님 은혜 갚는 길은 포교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불법을 심어주는 일이야.”
해마다 새 학년이 되어 담임을 하면 우선 생활기록부 종교란부터 봅니다. 불교를 믿는 아이들이 몇 명이나 되나? 그 부모들의 불심 정도를 관심 있게 살펴보면서 제대로 알지 못하는 학부형들과 무교라고 적은 엄마들에게 여러 가지 근기에 맞는 불경을 보시했습니다. 기도법을 일러주고, 수없이 가피받은 나의 신행담을 들려주고, 같이 절에 다니며 아이들은 어린이 법회에 인도해 주어 매주 절에서 만나곤 합니다. 작년 ‘부처님 오신 날’에는 제가 포교한 어린이들이 ‘화동’, ‘동자승’으로 뽑혀 제등행렬에 참가해 많은 불자들로부터 귀여움을 독차지했습니다. 천진스럽고 맑은 웃음 지으며 승복 입은 동자승 ‘한비’가 너무나 거룩해 보였습니다. 1학년을 담임할 때면 첫 아이인 경우 동생을 볼 계획이 있는 젊은 엄마들에게는 큰스님들께 배운 ‘좋은 아이 만드는 법’과 태교법을 가르쳐 주고 태교책을 보시했습니다. 아무렇게나 낳아서 힘들게 키우지 말고 정성껏 기도해 낳아 나라에 큰 인물로 키우자고 지도했습니다. 물론 젊은 후배 젊은 교사들에게도 알려주고 실천하게 하여 낳은 아이들이 여러 명입니다. 모두 잘 자라고 복된 불자들로 생활하고 있음을 보면서 가끔씩 태만하지 않게 추슬러 주기도 합니다.
그 동안 스님들께 들었던 법문과 불교방송을 들으며 메모해 두었던 법문들을 아이들에게 맞게 ‘좋은약’이라는 이름으로 들려주어 인성교육을 시켜왔습니다. 그래서 제가 담임했던 아이들과 학부모들은 저를 ‘좋은약 선생님’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특히 5월에는 『부모은중경』을 자세하게 일러주며 효심을 가르치면 감정이 여린 아이들은 “우리 엄마 불쌍해서 어떡해요. 선생님, 엄마 보고 싶어요.”하며 울기도 합니다. 그러면 아이들이 덩달아 따라 울어 교실이 울음바다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런 감정들을 일기로 쓰게 했습니다. 그리고 부모님 사인을 받아오게 했습니다. 그 일기를 통해서 부모님들까지도 간접 교육이 되면서 감사편지를 보낸 학부형도 있었습니다. 자기도 몰랐던 것을 아이의 일기를 보고 배웠다고요.
졸업한 아이들이 가끔 전화로 소식을 전합니다. 공부가 안 될 때는 ‘마음 가다듬기 운동’을 하고 선생님이 주신 비싼 ‘좋은약’의 가르침대로 실천하고 생활해서 성적도 올랐고 안정된 학교 생활을 하고 있다고요.
그런 전화를 받았을 때도 저는 또 합장을 합니다. 그 아이들이 곧게 자란 나무처럼 제 몫을 하는 성인으로 자랄 것을 의심치 않으며 그들에게 부처님의 가피가 항상 함께 하길 기원합니다. 육바라밀을 실천하며 앞으로 더욱더 정성스럽게 전법, 정진하겠다는 각오로 우리 나라의 불교 중흥과 정토건설을 기원합니다.
이 글은 『현대불교신문』에 실린 신행수기를 인용 허락을 받아 게재하는 것으로 지면 사정상 일부 축약합니다.
이영자 (서울 강북구 수유동)
불교를 잘 알지 못하면서 친정어머니를 따라 조그만 절에 1년에 한 번 초파일에 등을 다는 정도였습니다. 1984년 겨울방학을 하던 날, 우연히 손목이 순색으로 붓기 시작했습니다. 수소문 끝에 잘 고친다는 병원을 찾았는데 의사의 오진으로 주사를 잘못 맞아 근육 결핵을 얻었습니다.
1986년 대학입시를 앞둔 큰아들을 앞에 놓고 매일매일 유서를 써가며 생활하던 중 재수술하고 퇴원한 지 1주일 되던 날 고마운 두 친구의 권유로 봉은사 삼천배 기도에 동참하기로 했습니다. “너는 약만 가지곤 고칠 수 없을 것 같으니 부처님께 매달려라.”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제 나이 사십 중반. 저는 살 만큼 살았다고 생각이 들었으나 죽는다고 생각하니 두 아들의 얼굴이 크게 떠오르며 어머니 노릇을 못한 것이 미안해서 지금은 죽을 때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두 아이들 대학 입학이라도 시켜놓고 가면 원이 없을 것 같았습니다. 두 친구를 따라 봉은사에 갔습니다. 삼배도 제대로 안 해본 저는 치마를 입고 절할 준비도 없이 갔습니다. 뼈만 앙상하게 남은 처참한 병객의 모습으로……. 부처님을 뵙고 앉아 있는데 갑가지 마음 깊은 곳에서 기도가 튀어나왔습니다.
“부처님, 저 좀 살려 주세요. 우연 병고로 고통을 당하고 있는데 두 아이들이 기운을 잃어 공부를 놓고 있습니다. 저 아이들 대학 입학하는 것만 보아도 원이 없겠습니다. 부처님, 저 퇴원한 지 1주일밖에 안 되는데 삼천배는 제대로 못할 것 같습니다. 천배만 하더라도 살려 주세요.”하며 어처구니없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오후 7시, 모든 준비가 끝나고 삼천배가 시작되었습니다. 북을 치는 스님, 염주를 돌리는 스님, 수천 명의 많은 신도들은 그 북소리에 맞추어 절을 했습니다. 환희심이 났습니다. 20분 하고 10분 쉬고, 40분 하고 10분 쉬고, 천배가 끝날 무렵, 윗뜰에 계시던 스님께서 처참한 제 모습을 보셨던지, “노약자는 앉아서 반배 하세요. 부처님은 다 아시니까 반배도 한배로 쳐주시니까 욕심내지 말고 앉아서 하세요.”라고 하셨습니다.
천배를 마치고 반배로 하다가 좀더 할 수 있는 힘이 남아 있는데 꾀를 부리는 것 같은 생각이 들어 다시 “부처님, 삼백배만 더 제대로 할 수 있게 힘을 주세요.”하는 기도를 드린 후 다시 삼백배를 마치는 순간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제가 최선을 다해서 할 수 있는 한계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순간 알 수 없는 환희심과 함께 후련한 한숨이 길게 내쉬어지면서 ‘나는 살았어!’하는 안도감이 들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열심히 반배씩 채워 새벽 세 시가 지나서 삼천배 기도가 끝이 났습니다. 기진맥진한 상태로 간단하게 새벽 예불을 올리고 친구의 도움으로 집에 돌아왔습니다. 만 24시간을 늪에 빠진 듯이 깊은 잠을 잤습니다. 다음날 새벽 세 시쯤 되었을까, 선명한 총천연색 꿈을 꾸었습니다. 그제 절하던 봉은사였습니다. 부처님이 차에서 내려 제 앞에 마주 서시더니 어깨 앞, 뒤 수술한 자리 세 곳을 손으로 꾹꾹 눌러 주시면서 음성은 들리지 않았지만 “아무 걱정 마라. 지금 먹고 있는 약을 조금만 더 먹어라.”하는 말씀을 몸으로 느끼면서 깜짝 놀라 눈을 떴습니다. 아침에 출근을 하려던 남편이 수술 자리에 소독을 하고 거즈를 갈아붙여 주려고 저를 깨웠습니다. 일어나서 꿈 얘기를 했습니다. 남편은 제게 조금이라도 희망을 주려고 부처님 가피를 입어 곧 나을 것이라며 저를 위로했습니다. 같이 삼천배를 하자고 인도했던 친구에게도 전화를 했습니다. 친구는 환호성을 쳤습니다. “그래도 전생에 많이 닦았나 보다. 어떻게 삼천배 단 한 번에 가피를 받았니?” 좋아하며 위로하고 힘을 주었습니다. 정말로 고마운 친구였습니다.
아침, 저녁으로 소독을 하고 거즈를 갈아붙여 주는 것이 일과로 되어 있는 남편은 바로 부처님이셨습니다. 소독을 하려고 거즈를 떼는 순간 그렇게도 질척거리던 고름이 뽀송뽀송한 채 조금만 묻어 있는 것이었습니다.
“야! 기적이야! 인제 다 나아서 막혔나 봐!” 신이 나서 소독을 하고 거즈를 붙여주고 출근을 했습니다. 다시 소독할 저녁시간, 이게 웬일인가? 인제 고름 같은 건 찾아볼 수 없이 아물어 버렸습니다. 한 달 후, 의사 선생님으로부터 결핵약을 끊어도 좋다는 허락이 났습니다. 잘 먹고 잘 자고 과로하지 않으면 된다고 하시며 매년 술 한 병씩 사 가지고 와서 건강한 모습 한 번씩 보여주면 된다고 농담까지 하셨습니다.
하늘은 높고 맑았습니다. 몇 년 동안 시들어 보였던 나뭇잎들이 싱그러워 보였습니다. 그로부터 친구들을 따라 절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절에 아침에 출근해서 사시불공, 2시 기도, 각 신행단체 법회, 저녁예불 등 모든 기도에 매일 참석을 하면서 출퇴근을 했습니다. 그러면서 미신이라고 생각했던 불교가 가장 합리적이고 대단히 훌륭한 과학적이고 세계적인 종교라는 것이 가슴에 와닿으면서 머리 좋은 사람들이나 외울 수 있을 것 같던 천수경도 외웠고, 각종 다라니들도 외우면서 각 단체 법회에 당당하게 참석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육신의 병을 고쳐주신 부처님께서는 법당 안에서도 가장 훌륭한 선지식들을 도반으로 인연지어 주시어 동참 기도와 방생기도, 경읽기 등 1년 365일 하루도 부처님을 떠나서 살지 않게 잡아주셨습니다. 잠이 깊이 들기 전까지는 참회진언, 광명진언 외우기, 참회하며 방생기도, 철야정진기도, 야외법회 동참해 야단법석에서 듣던 큰스님들의 환희스러웠던 설법……. 『지장경』을 읽으면서 조상 천도재도 수없이 지내드렸고, 어언 『지장경』 1천 독을 마쳐갈 무렵까지 수없는 가피를 받으며 감사한 마음으로 새벽 4시 반에 일어나 샤워하고 조계사로 가는 버스 속에서, 퇴근 후 집에 가는 버스 속에서 어느 시간이나 짜투리 남는 시간에는 『지장경』을 읽었고 걸을 때는 참회진언, 광명진언, 멸업장진언 등을 외우는 등 부처님을 떠나서는 생활하지 않았습니다.
시간이 부족하고 갈증이 났습니다. 잠자는 시간이 아까웠습니다. 더 알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기초교리 1기 야간반에 등록을 했습니다. 퇴근 후 급히 달려와 저녁을 지어 차려놓고 다시 버스를 타고 조계사에 와서 7시부터 9시까지 공부를 하는 시간은 정말 행복했습니다. 불교, 바로 그곳이 극락이었습니다. 그러는 동안 제 스스로가 많은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잘못된 일이 모두 나에게서 비롯되었음을 알았고 남의 탓을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사치하던 마음이 검소해졌습니다. 주는 병이 생겼다고 할 정도로 남의 입장을 먼저 헤아릴 줄 아는 마음과 베푸는 마음이 더 커졌습니다. 절에서 시작하는 불사에는 능력껏 모두 동참했습니다.
어머니의 역할이 온전해지고 나니 이해와 사랑 속에서 가족들의 마음도 모두 평화로웠습니다. 또 부처님께 일심으로 기도드리면 위신력으로 모든 것이 원만성취됨을 알았습니다. 재수하던 아이가 대학에 합격하고 불교 써클 회장을 맡으며 정진하고, 엄청난 교통사고 중에서도 남편과 큰 아이 모두 머리카락 하나 다치지 않고 살아났던 기적 같던 일, 작은 아이의 한의대 입학 등 부처님의 가피 속에 살고 있습니다. 남편도 10년 동안 크고 작은 기도에 동참해 주며 일요법회에 꼭 참석해 법문을 들은 후에야 사적인 약속을 하고, 작년 9월에 결혼한 큰며느리도 『법화경』 사경을 하며 기도에 동참했습니다.
“내생이 어디 있니? 살았을 때 하고 싶은 대로 하다 죽는 거지.”하시며 저를 원망하셨던 시어머님까지도 요즘은 경을 열심히 읽으십니다. 남동생들도 모두 절에 다니며 나름대로 법회 참석을 하고 있습니다. 한 달에 한 번은 멀리 경상도에 있는 절까지 다니면서 가족 철야정진을 할 정도가 되었으니 보기만 해도 행복합니다. 큰 조카는 초등학교 6학년때 관세음보살 육자대명왕진언을 외우도록 해서 지금은 고등학교 2학년인데 4년을 하루도 거르지 않고 108배 하며 공부하고 있습니다. 전체 수석을 놓치지 않는 신심 깊고 안정된 아이가 되었습니다. 제가 불교를 믿은 10년 동안 시댁, 친정 모두 정법으로 불가(佛家)가 이루어졌습니다. 실로 큰 가피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하루는 법당에 앉아 “부처님, 저 이제 학교에 사표 내고 부처님 전에 기도 정진만 하겠습니다.”하고 부처님께 고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아니야, 사표 내지 말아라. 네가 할 수 있는 기도는 많은 아이들과 사람들에게 불법을 전하는 일이지. 해마다 새로운 많은 아이들과 학부형과 교사들을 만나면서 불심을 심어야지. 자신만을 위한 기도는 작은 기도야!” 하시며 미소지으셨습니다.
“그래, 바로 그거야! 내가 부처님 은혜 갚는 길은 포교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불법을 심어주는 일이야.”
해마다 새 학년이 되어 담임을 하면 우선 생활기록부 종교란부터 봅니다. 불교를 믿는 아이들이 몇 명이나 되나? 그 부모들의 불심 정도를 관심 있게 살펴보면서 제대로 알지 못하는 학부형들과 무교라고 적은 엄마들에게 여러 가지 근기에 맞는 불경을 보시했습니다. 기도법을 일러주고, 수없이 가피받은 나의 신행담을 들려주고, 같이 절에 다니며 아이들은 어린이 법회에 인도해 주어 매주 절에서 만나곤 합니다. 작년 ‘부처님 오신 날’에는 제가 포교한 어린이들이 ‘화동’, ‘동자승’으로 뽑혀 제등행렬에 참가해 많은 불자들로부터 귀여움을 독차지했습니다. 천진스럽고 맑은 웃음 지으며 승복 입은 동자승 ‘한비’가 너무나 거룩해 보였습니다. 1학년을 담임할 때면 첫 아이인 경우 동생을 볼 계획이 있는 젊은 엄마들에게는 큰스님들께 배운 ‘좋은 아이 만드는 법’과 태교법을 가르쳐 주고 태교책을 보시했습니다. 아무렇게나 낳아서 힘들게 키우지 말고 정성껏 기도해 낳아 나라에 큰 인물로 키우자고 지도했습니다. 물론 젊은 후배 젊은 교사들에게도 알려주고 실천하게 하여 낳은 아이들이 여러 명입니다. 모두 잘 자라고 복된 불자들로 생활하고 있음을 보면서 가끔씩 태만하지 않게 추슬러 주기도 합니다.
그 동안 스님들께 들었던 법문과 불교방송을 들으며 메모해 두었던 법문들을 아이들에게 맞게 ‘좋은약’이라는 이름으로 들려주어 인성교육을 시켜왔습니다. 그래서 제가 담임했던 아이들과 학부모들은 저를 ‘좋은약 선생님’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특히 5월에는 『부모은중경』을 자세하게 일러주며 효심을 가르치면 감정이 여린 아이들은 “우리 엄마 불쌍해서 어떡해요. 선생님, 엄마 보고 싶어요.”하며 울기도 합니다. 그러면 아이들이 덩달아 따라 울어 교실이 울음바다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런 감정들을 일기로 쓰게 했습니다. 그리고 부모님 사인을 받아오게 했습니다. 그 일기를 통해서 부모님들까지도 간접 교육이 되면서 감사편지를 보낸 학부형도 있었습니다. 자기도 몰랐던 것을 아이의 일기를 보고 배웠다고요.
졸업한 아이들이 가끔 전화로 소식을 전합니다. 공부가 안 될 때는 ‘마음 가다듬기 운동’을 하고 선생님이 주신 비싼 ‘좋은약’의 가르침대로 실천하고 생활해서 성적도 올랐고 안정된 학교 생활을 하고 있다고요.
그런 전화를 받았을 때도 저는 또 합장을 합니다. 그 아이들이 곧게 자란 나무처럼 제 몫을 하는 성인으로 자랄 것을 의심치 않으며 그들에게 부처님의 가피가 항상 함께 하길 기원합니다. 육바라밀을 실천하며 앞으로 더욱더 정성스럽게 전법, 정진하겠다는 각오로 우리 나라의 불교 중흥과 정토건설을 기원합니다.
이 글은 『현대불교신문』에 실린 신행수기를 인용 허락을 받아 게재하는 것으로 지면 사정상 일부 축약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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