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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꽃의 미소를 닮은 기후 스님/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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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작성일06-02-06 10:53 조회3,49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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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꽃의 미소를 닮은 기후 스님<?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


편집부





축서사의 하늘은 유달리 푸르다. 지난 겨울이었다. 카메라를 메고 축서사를 찾은 어느 반가운 이가 말했다.


“이렇게 푸른 하늘은 티베트에나 가야 볼 수 있어요.”


그렇게 하늘이 푸르고 맑은 축서사에 작년 11월 초 특별한 인연으로 선덕(善德) 스님 한 분이 오셨다. 호주에서 15년간 한국불교를 전법하였던 기후(基厚) 스님이다. 지금 축서사의 총무 스님이자 불교대학 학감인 혜산 스님 역시 10여 년간 호주에 살았다. 비행기 조종사, 여행사 사장 등의 일을 하던 거사였던 혜산 스님이 출가의 뜻을 비추자 무여 큰스님 앞으로 소개장을 써 보내었던 분이 바로 기후 스님이었다. 축서사와 이미 오래 전부터 인연이 깊었던 셈이다.


스님은 65년도에 통도사에서 이성공(李性空) 스님 문하로 출가해 69년도에 계를 받았다. 71년도에 통도사 강원을 졸업하고 바로 강원에서 1, 2학년을 담당하는 강사인 중강(中講) 소임을 맡았다. 해인사 강원의 중강도 역임하였다.


그러다가 문자 공부에 한계를 느낀 스님은 참선에 뜻을 두고 용화사로 가서 전강 선사의 문하에서 선방 수좌 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봉암사, 극락암, 수도암 등 제방선원을 두루 다니며 운수납자로서 화두를 참구했다. 또 경주 기림사 북암(北庵)에서 6년간 묵언 참선정진을 하기로 도반 2명과 함께 결사하였다. 집 밖으로는 나가지 않는, 일종의 무문관 결사였다.


“묵언 정진을 하니 3년 정도는 갑갑하고 힘듭디다. 그러나 4년째 접어들면서 마음이 편안해지고 세계와 내가 하나가 되는 체험을 했어요.”


기후 스님은 이때 평등세계를 깨닫고 차별세계에 끄달리지 않는 힘을 얻게 된다. 그러나 수행을 밀어붙였던 것은 그때까지였다.


“그 이상 용맹정진하기에는 내 선근이 부족하다고 느꼈어요.”


이렇게 얘기하는 스님의 음성은 편안하고 눈빛은 진솔하고 따뜻하다. 자기 자신에 대해 포장하려는 허위가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다. 그것이 오히려 더 가슴 뭉클하다.


6년이나 묵언 정진을 한 끝인데 더 치열하게 밀어붙이고 싶은 마음이 왜 없었겠는가. 그러나 스님은 정밀한 사려와 통찰 끝에 자신의 한계에 대한 냉철한 판단을 내렸다. 이러한 냉철함과 판단력이야말로 수행자다운 자기 정직성, 그리고 진실한 수행력이 필요한 부분이 아닐까.


스님은 그후 더 외진 곳을 찾아 태백산 소천면까지 가서 ‘제일 깊은 곳’이 어디냐고 물었다. 구마동 70리 계곡이제일 깊다하여 그곳에 초가집을 구해 1년간 토굴살이를 했다. 그러나 번거로운 세연(世緣)이 그곳까지 와 닿아 조용히 살기가 어려웠다.


토굴을 나온 스님은 우연히 시드니에 가게 되었다. 그곳에 있던 아는 처사님은 마침 빈 절이 있다며 그곳에 스님을 머무시도록 했다. 호주의 보통 일반주택에 ‘불광사’라는 간판만 붙여놓은 절이었다. 스님 없이 지낸 것이 벌써 7개월째라며 신도들이 반가워했다. 스님이 떠나려고 하자 신도들이 막무가내로 붙잡았다. 스님은 난처해졌다.


“관광 비자로는 제가 여기에 머물러 활동할 수 없으니 정식으로 초청을 하시거든 그때나 다시 뵙지요.”


설마 초청까지 하랴 싶었다. 그런데 웬걸, 한국에 돌아온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정식 초청장이 날아들었다. 약속을 했으니 안 갈 수가 없었다.


스님은 호주로 간 후 임대주택이었던 불광사 건물과 토지를 매입하고, 근처의 달마사라는 한국 비구니 스님 절과 통합하여 ‘정법사’라는 새 절을 세웠다. 그리고 불사와 전법, 포교를 하며 15년을 머물렀다.


시드니에는 한국 교회가 173개인데, 한국 절은 고작 4개이다. 이렇게 열악한 환경에서 스님은 꾸준히 포교와 전법 활동을 하였다. 정법사는 안정적으로 번창했고 법회를 하면 100여 명이 참석하게 되었다. 이것은 시드니 현지 사정에 비한다면 매우 많은 숫자로서 호주에 있는 7개 사찰 중에서 가장 큰 규모이다. 스님은 정법사에서 일요법회, 관음기도법회, 주말 참선법회, 요가교실, 어린이 한글학교를 열었다.


스님은 어려운 환경 속에서 불법에 대한 믿음을 지켜가고 있는 호주 불자들이 안타까웠다. 그들의 사기를 진작시켜 주고 싶어서 정말 열심히 뛰었다. 이렇게 동분서주하다 보니 신경 쓸 일,할 일이 언제나 많아 몸에 무리가 왔다. 스님은 위암 판정을 받았다.


2005년도 1월에 스님은 후임 주지를 임명하고 한국으로 건너와 수술을 받았다. 다행히 수술 경과는 매우 좋다. 그간 몸을 돌보지 않고 열심히 불사와 수행, 전법을 한 선업의 결과로 큰 수술을 받고도 이만큼 몸이 건강한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러나 스님은 수행자답게 철저한 ‘자기 반성’부터 한다.


“내가 뭔가 잘못 산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이렇게 위암이란 병을 얻은 것이 아닌가 하고 말이지요. 지난 삶을 되돌아 보았지요.”


이렇게 자신을 살피기 시작한 스님은 불사와 포교의 규모가 점점 커지면서 의욕이 지나쳤던 것이 발병의 원인이 되었음을 깨달았다.


스님이 한국에 와서 위암 수술을 받게 되자 혜산 스님이 병문안을 갔다. 무여 큰스님은 그 편에 따뜻한 안부인사와 선물을 보내셨다. 그것을 계기로 기후 스님은 축서사에 머물게 되었다. 한국에서의 새로운 삶, 수행자로서 제2막을 열게 된 것이다. 스님과 축서사의 인연은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다.


“호주에 있을 때부터 축서사 생각을 했어요. 왠지 그곳에 가서 살고 싶었지요. 그래서 혜산 스님이 출가한다고 했을 때도 축서사로 인연을 맺어 드린 것이고, 호주에서 불자들이 한국에 간다고 하면 축서사를 소개해 드렸지요.”


‘마음의 고향’으로 널리 알려진 축서사는 멀리 호주에서 전법 포교 활동을 하며 15년을 바친 기후 스님에게도 마음의 고향이었던 셈이다. 늘 마음 한 켠에 두고 있던 고즈넉하고 청정한 고국의 산사. 그곳에 가서 수행하며 후학을 돌보고 불교를 전하고 싶었던 마음이 비로소 인연의 결실을 맺은 셈이다. 그 열매는 기후 스님의 눈빛만큼이나 신실하고 아름답다.


기후 스님의 인상은 편안하다. 그리고 소탈하고 솔직하다. 서양에서 오래 살았던 사람들 특유의 활발함과 솔직함, 그리고 합리성이 깃든 성품이다. 거기에 동양적인 온유함과 깊은 정감이 은은한 빛을 발한다.


기후 스님은 얼굴이 살짝 얽었다. 한 살 때 마마를 앓은 이후 그렇게 되었다. 남들보다 더 모범적으로, 더 진실하게 살아야겠다는 마음을 그래서 일찍부터 가질 수 있었다. 기후 스님의 그 얽은 흉터가 산이나 들판에 피어나는 쌀알만큼 작은 들꽃들의 웃음 같다.


세월은 정직하다. 한 사람이 살아온 세월은 얼굴에 그 자취를 남기고 간다. 어떤 사람의 세월은 그 얼굴의 아름다움을 모두 파괴하고 고통과 어둠으로 일그러진 그림자를 남긴다. 어떤 사람의 세월은 그 얼굴에 존재하던 흉터마저도 따뜻함과 삶의 훈장으로 바꾸어낸다. 겸허하고 진솔함으로 가득한 눈빛을 지닌 기후 스님은 당신 얼굴의 흉터를 들꽃의 미소로 바꾸어냈다.

기후 스님은 축서사 불교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인터넷 홈페이지에 글을 올리며 선덕(善德) 스님으로서 한 그루 나무처럼 깊이 뿌리내리게 될 것이다. 축서사에 이렇게 좋은 인연들 모여들어 숲을 이루고 강물을 지으면 문수산 자락 청정도량이 더욱 빛나게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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