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의 조건은 바른 실천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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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지범(조계종 중앙신도회 행… 작성일06-08-09 15:46 조회3,007회 댓글0건본문
특집/생전예수재와 효행 셋.
행복의 조건은 바른 실천에 있다
이지범 (조계종 중앙신도회 행사기획실장)
세상은 참 복잡하다. 사람관계 속으로 들어가면 더욱 그렇다. 타인과 사물에 대한 생각과 이해하는 정도가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서부터 다툼이 생기고 시기와 멸시와 같은 아우성을 짓고 있는 사람들은 날마다 좋은인연(善緣)과 나쁜인연(惡緣) 그리고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인연(不苦不樂)을 가지면 살아간다. 그러나 이러한 인연도 다 만남(觸)으로부터 출발한다는 것을 간과하고 있다.
가령, 복잡한 버스 안에서 내가 서 있다고 하자. 처음에는 아무런 관계(不苦不樂)가 없던 앞뒤의 사람을 자신이 어떻게 느끼고 보고 생각하기에 따라 버스 안과 자신과의 상황은 180도 달라진다. 자신과 맞대고 있는 이가 예쁘거나 잘 생긴 사람이라면 좋은 인연으로, 반대로 추하고 매캐한 냄새 나는 사람이라면 나쁜 인연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많다. 그러나 그 인연에서도 결과는 충분히 달라질 수 있다. 그것은 내가 상대방을 어떻게 의도하였는가에 달려있다.
이와 같이 우리들은 매일 위의 3가지 원인과 결과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부여받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 존재는 사물을 판단할 수 있는 신체기관과 대상을 느낄 수 있는 나 그리고 나 밖의 대상이 언제나 연결되어 나타난다. 그럴진대 타인과 사물들과 관계를 얼마나 객관적이고 투명하게 만나고 꾸준하게 실천하는가에 따라 행복의 조건은 달라진다.
요즈음 우리 사회에는 또 하나의 키워드로 스트레스라는 용어가 등장했다. 이것은 행복의 조건과도 직결된다. 현대인들은 전형적인 종교의 선택이나 필요에서 한 걸음 나아가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한 방법으로 종교적 방법을 선택하기도 한다. 듀크대학교 의과대학의 해럴드 쾨니히 교수는 “종교적 신앙은 역경을 이겨내는 데 아주 강력한 수단이 될 수 있다.”고 한 바와 같이 스트레스가 심한 현대인들에게 종교적 활동은 긍정적인 효과를 얻게 한다. 또한 행복한 삶에 있어 사후의 삶을 믿는 것은 사람들에게 특히 나이든 사람들에게 의미와 목적을 주며 이 세상에서의 외로움을 덜어준다. 많이 베풀고 사랑하고자 실천한 이들이 더 오래 살고 건강하다는 의학적 결과를 무시할 수는 없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이상학》의 서두를 “인간은 본성적으로 알고자 하는 욕구를 갖는다.”고 한 바와 같이 사람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삶의 환경인 자연으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세계 또는 자연을 이해하고자 하는 본능적 욕구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욕구로부터 가장 근접한 것이 바로 종교라 할 수 있다.
인간의 삶의 방향성을 결정해주는 진리에 대한 믿음과 그로부터 도출되는 의식과 행위의 총화를 가리키는 종교는 냉정한 논리적 사고를 통해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체험과 공감을 통해 가슴으로 수용하는 데서부터 비롯된다. 그래서 종교인은 주어진 현실에 있는 삶의 양식으로 출발한다. 불교인 내지 불자는 염부수 나무 아래에서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살펴보며, 그 근원을 풀어낸’ 부처님의 성스러운 가르침(四聖諦)을 본받아 바르게 실천(八正道)하는 이를 말한다.
종교는 사회적 작용과 지원을 동시에 가져다준다.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을 베푸는 사람들이 더 행복하게 지낸다는 연구 성과들에서도 볼 수 있듯이, 사람들에게는 종교적인 유대가 더 큰 만족의 원천을 제공할 수 있다. 오늘날 점점 더 정신적 파괴현상이 일어나는 현대인들에게 자신의 삶의 문제에서 벗어나고, 첨단 문명사회로부터 도구적 가치로 매몰되어 가는 자신을 깨닫게 하는 종교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새삼 일깨워주고 있다.
우리의 인생 방향을 바꾸어놓을 수 있는 종교생활에서 자신의 종교적 교의를 지키고 발전시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진리에 대한 믿음을 확신할 수 있는 어떤 합리적 근거가 있는가를 생각해보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부처님과 같이 완전한 존재가 아닌 우리들은 자연 세계가 실재한다는 믿음만큼은 나름대로 적절한 합리성을 지니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받아들일 만한 나름대로 적절한 합리성은 무엇이고 어떻게 찾아야 할 것인가.
이에 대해 부처님께서는 ‘지금 여기 바로’라는 가르침을 주셨다. 여기에는 대단히 업적(業的) 사고가 깔려있다. 어떤 사물이나 과정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두고 자신이 이해하든 하지 못하든 간에 자신으로부터 비롯된 행위(業)는 어찌할 수가 없다. 동심원을 그리며 호수에 떨어진 돌멩이를 그 누가 다시 떠오르게 할 수 있겠는가. 숙제를 다 하지 못하고 학교에 간 학생이 선생의 눈치를 살피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만큼 자신이 놓여져 있는 오늘과 그리고 현실에서 보다 실천적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불교의 의식 중의 하나인 <생전예수재>는 현세에서 공덕을 쌓고 바른 삶을 살아야 한다는데 더 큰 의미를 두고 있다. 현세에서의 바른 실천은 우리들이 행동으로만이 아니라 말로나 생각으로 하는 온갖 움직임(動作)인 업을 해소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백연경》에는 땅을 쓸면 다섯 가지 공덕이 있다고 했다. 스스로 마음의 때를 제거하고, 다른 이의 마음의 때로 제거하며, 교만심을 없애고, 마음을 조절할 수 있으며, 공덕을 길러 좋은 인연을 쌓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공덕은 보살행(實踐)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최고의 보상이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있어 움직이지 않고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무엇을 얻고자 한다면 부지런히 움직여야 한다. 우리가 행복을 추구한다면 그에 알맞은 행동을 해야 가능하다. 자신이 바라는 것을 얻으려면 먼저, 자신으로부터 바른 행동과 실천을 해야 한다. 살생은 자비종자를, 도둑질(偸盜)은 복덕종자를, 음행은 청정종자를, 거짓말은 진실종자를, 음주는 지혜종자를 끊게 된다고 한다. 설령 꿈속에서라도 오계(五戒)를 범하지 않는 것이 진정한 수행이요. 실천인 것이다.
불자들이 행할 수 있는 실천의 기본은 팔정도의 가르침이다. 이를 바탕으로 신심을 견고히 하고, 본래 마음을 찾아 나아가고, 몸에는 모든 질병을 없애며, 바르게 노력하여, 생각하는 마음을 갖고서, 교만한 마음을 갖지 않으며, 바른 자세와 지혜를 가지고, 모두가 들을 수 있는 지혜를 갖추어야 그 실천이 바르다고 할 수 있다.
오늘 걷고 있는 이 진리의 길은 원래 있던 길이 아니라 나와 도반들이 함께 일구어 가는 길이다.
행복의 조건은 바른 실천에 있다
이지범 (조계종 중앙신도회 행사기획실장)
세상은 참 복잡하다. 사람관계 속으로 들어가면 더욱 그렇다. 타인과 사물에 대한 생각과 이해하는 정도가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서부터 다툼이 생기고 시기와 멸시와 같은 아우성을 짓고 있는 사람들은 날마다 좋은인연(善緣)과 나쁜인연(惡緣) 그리고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인연(不苦不樂)을 가지면 살아간다. 그러나 이러한 인연도 다 만남(觸)으로부터 출발한다는 것을 간과하고 있다.
가령, 복잡한 버스 안에서 내가 서 있다고 하자. 처음에는 아무런 관계(不苦不樂)가 없던 앞뒤의 사람을 자신이 어떻게 느끼고 보고 생각하기에 따라 버스 안과 자신과의 상황은 180도 달라진다. 자신과 맞대고 있는 이가 예쁘거나 잘 생긴 사람이라면 좋은 인연으로, 반대로 추하고 매캐한 냄새 나는 사람이라면 나쁜 인연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많다. 그러나 그 인연에서도 결과는 충분히 달라질 수 있다. 그것은 내가 상대방을 어떻게 의도하였는가에 달려있다.
이와 같이 우리들은 매일 위의 3가지 원인과 결과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부여받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 존재는 사물을 판단할 수 있는 신체기관과 대상을 느낄 수 있는 나 그리고 나 밖의 대상이 언제나 연결되어 나타난다. 그럴진대 타인과 사물들과 관계를 얼마나 객관적이고 투명하게 만나고 꾸준하게 실천하는가에 따라 행복의 조건은 달라진다.
요즈음 우리 사회에는 또 하나의 키워드로 스트레스라는 용어가 등장했다. 이것은 행복의 조건과도 직결된다. 현대인들은 전형적인 종교의 선택이나 필요에서 한 걸음 나아가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한 방법으로 종교적 방법을 선택하기도 한다. 듀크대학교 의과대학의 해럴드 쾨니히 교수는 “종교적 신앙은 역경을 이겨내는 데 아주 강력한 수단이 될 수 있다.”고 한 바와 같이 스트레스가 심한 현대인들에게 종교적 활동은 긍정적인 효과를 얻게 한다. 또한 행복한 삶에 있어 사후의 삶을 믿는 것은 사람들에게 특히 나이든 사람들에게 의미와 목적을 주며 이 세상에서의 외로움을 덜어준다. 많이 베풀고 사랑하고자 실천한 이들이 더 오래 살고 건강하다는 의학적 결과를 무시할 수는 없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이상학》의 서두를 “인간은 본성적으로 알고자 하는 욕구를 갖는다.”고 한 바와 같이 사람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삶의 환경인 자연으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세계 또는 자연을 이해하고자 하는 본능적 욕구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욕구로부터 가장 근접한 것이 바로 종교라 할 수 있다.
인간의 삶의 방향성을 결정해주는 진리에 대한 믿음과 그로부터 도출되는 의식과 행위의 총화를 가리키는 종교는 냉정한 논리적 사고를 통해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체험과 공감을 통해 가슴으로 수용하는 데서부터 비롯된다. 그래서 종교인은 주어진 현실에 있는 삶의 양식으로 출발한다. 불교인 내지 불자는 염부수 나무 아래에서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살펴보며, 그 근원을 풀어낸’ 부처님의 성스러운 가르침(四聖諦)을 본받아 바르게 실천(八正道)하는 이를 말한다.
종교는 사회적 작용과 지원을 동시에 가져다준다.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을 베푸는 사람들이 더 행복하게 지낸다는 연구 성과들에서도 볼 수 있듯이, 사람들에게는 종교적인 유대가 더 큰 만족의 원천을 제공할 수 있다. 오늘날 점점 더 정신적 파괴현상이 일어나는 현대인들에게 자신의 삶의 문제에서 벗어나고, 첨단 문명사회로부터 도구적 가치로 매몰되어 가는 자신을 깨닫게 하는 종교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새삼 일깨워주고 있다.
우리의 인생 방향을 바꾸어놓을 수 있는 종교생활에서 자신의 종교적 교의를 지키고 발전시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진리에 대한 믿음을 확신할 수 있는 어떤 합리적 근거가 있는가를 생각해보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부처님과 같이 완전한 존재가 아닌 우리들은 자연 세계가 실재한다는 믿음만큼은 나름대로 적절한 합리성을 지니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받아들일 만한 나름대로 적절한 합리성은 무엇이고 어떻게 찾아야 할 것인가.
이에 대해 부처님께서는 ‘지금 여기 바로’라는 가르침을 주셨다. 여기에는 대단히 업적(業的) 사고가 깔려있다. 어떤 사물이나 과정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두고 자신이 이해하든 하지 못하든 간에 자신으로부터 비롯된 행위(業)는 어찌할 수가 없다. 동심원을 그리며 호수에 떨어진 돌멩이를 그 누가 다시 떠오르게 할 수 있겠는가. 숙제를 다 하지 못하고 학교에 간 학생이 선생의 눈치를 살피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만큼 자신이 놓여져 있는 오늘과 그리고 현실에서 보다 실천적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불교의 의식 중의 하나인 <생전예수재>는 현세에서 공덕을 쌓고 바른 삶을 살아야 한다는데 더 큰 의미를 두고 있다. 현세에서의 바른 실천은 우리들이 행동으로만이 아니라 말로나 생각으로 하는 온갖 움직임(動作)인 업을 해소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백연경》에는 땅을 쓸면 다섯 가지 공덕이 있다고 했다. 스스로 마음의 때를 제거하고, 다른 이의 마음의 때로 제거하며, 교만심을 없애고, 마음을 조절할 수 있으며, 공덕을 길러 좋은 인연을 쌓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공덕은 보살행(實踐)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최고의 보상이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있어 움직이지 않고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무엇을 얻고자 한다면 부지런히 움직여야 한다. 우리가 행복을 추구한다면 그에 알맞은 행동을 해야 가능하다. 자신이 바라는 것을 얻으려면 먼저, 자신으로부터 바른 행동과 실천을 해야 한다. 살생은 자비종자를, 도둑질(偸盜)은 복덕종자를, 음행은 청정종자를, 거짓말은 진실종자를, 음주는 지혜종자를 끊게 된다고 한다. 설령 꿈속에서라도 오계(五戒)를 범하지 않는 것이 진정한 수행이요. 실천인 것이다.
불자들이 행할 수 있는 실천의 기본은 팔정도의 가르침이다. 이를 바탕으로 신심을 견고히 하고, 본래 마음을 찾아 나아가고, 몸에는 모든 질병을 없애며, 바르게 노력하여, 생각하는 마음을 갖고서, 교만한 마음을 갖지 않으며, 바른 자세와 지혜를 가지고, 모두가 들을 수 있는 지혜를 갖추어야 그 실천이 바르다고 할 수 있다.
오늘 걷고 있는 이 진리의 길은 원래 있던 길이 아니라 나와 도반들이 함께 일구어 가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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