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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호및지난호

아름다운 노후를 위한 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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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찬훈 교수 작성일06-08-09 16:01 조회3,01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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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전예수재와 효행/ 둘
아름다운 사후를 위한 준비
이찬훈 (인제대학교 인문학부 교수)


이 세상 모든 것은 저 홀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들에 기대어 다른 것들과의 관계 속에서만 존재합니다. 저 들판에 피어난 작은 들꽃 한 송이를 보십시오. 그 들꽃은 그것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흙과 그 속의 물, 그것에 숨결을 불어넣는 공기, 그리고 생명의 에너지를 주는 태양, 이 모든 것에 의존해서만 존재합니다. 들꽃은 태양과 바람과 공기와 흙, 아니 더 나아가 이 세상 모든 것들의 인연관계에 의해 만들어진 것입니다. 이처럼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서로간의 인연에 의해 존재하는 것이므로 저 홀로 독립된 실체가 아니며, 그만의 고정적인 독립적 성질(自性)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이것은 나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나 역시 나를 둘러싼 세상의 온갖 인연에 의해 생겼다가 그 인연이 다하면 스러질 공한 존재입니다. 다른 존재들과 마찬가지로 사실은 내 몸도 공(空)하여 나도 없고 내 것도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이렇듯 공한 자신의 존재에 끊임없이 집착합니다. 아상에 사로잡혀 자기 자신에게 끊임없이 집착하는 사람들의 생에 대한 애착은 이루 말할 수 없이 강합니다. 사람들은 나라는 상(我相), 사람이라는 상(人相), 중생이라는 상(衆生相), 목숨이라는 상(壽者相) 등 갖가지 형상에 사로잡혀 그것에 집착함으로써 온갖 고통을 만들어 냅니다.
물론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생명체는 유일한 것으로 고귀한 존재입니다. 내가 태어난 것은 억겁의 세월 속에 쌓이고 쌓인 전 우주적 인연 관계들이 모여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러니 내 삶은 얼마나 소중한 것이겠습니까? 이런 내 인생을 어찌 가벼이 보고 허비할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는 있는 힘을 다해 우리의 인생을 값진 것으로 만들어 나가도록 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인연의 끈이 다해 갈 때가 되면, 또한 자연스런 그 흐름에 따라 평화롭게 죽음을 맞이하는 것도 중요한 일입니다. 삶에 대립하는 것은 죽음이 아니라 ‘죽임’일 뿐입니다. 이 세상의 어느 것과도 똑같지 않은 유일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지극히 아름다운 생명체를 죽이는 일보다 더 큰 악은 없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의 다른 모든 존재들과의 연관성 속에서 태어난 생명체가 그 생을 다하고 다시 그 근원 속으로 돌아가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런 일입니다. 시들고 있는 꽃을 죽어 가는 것으로만 보면 그 꽃이 슬퍼 보이겠지만, 그것을 얼마 안 가 열매 맺을 나무 전체의 일부로 본다면, 그때 우리는 그 꽃의 참된 아름다움을 볼 수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죽음도 장엄한 전체 우주적 생명의 광대한 전개과정의 일부로 본다면 그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삶에서 나타나는 온갖 고통과 병폐는 나만을 위하고 내 것만 챙기려는 의식, 나와 내 것에 대한 집착, 아집에서 나온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해탈은 모든 개별적 형상에 대한 집착, 특히 자기 자신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벗어나 자신을 포함한 모든 존재가 온 우주의 진여법성과 둘이 아님과 유무가 둘이 아님을 깨닫는 데서 이루어집니다. 이러한 일다불이(一多不二)와 유무불이(有無不二)의 통찰에 의해 본디 내가 공(空)한 것임을 투철하게 깨달으면 나와 내 것에 대한 집착이 없어져 다른 온갖 집착도 없어지고, 생사를 초월하고 온갖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난 대자유의 경지가 열립니다. 본디 불교에서는 죽음을 개체가 태어나기 전의 본래의 근원적 자리로 돌아가는 것으로 보아 생사에 초탈한 생사불이(生死不二)의 태도를 보입니다. 실제로 불가의 많은 고승들은 생사가 본래 둘이 아니라는 통찰을 바탕으로 임종 시에 생에 집착하지 않고 지극히 평안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허허로운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생사를 달관한 이 모습을 서산대사의 임종게는 이렇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천만 가지 온갖 계책과 생각은
붉게 타는 화로 위에 떨어지는 한 송이 눈꽃.
진흙소가 물위를 가니
대지가 허공중에 흩어지도다.
千計萬思量 紅爐一點雪
泥牛水上行 大地虛空裂


인간의 온갖 꾀와 생각, 그리고 그것이 만들어 낸 온갖 화려한 문물들도 알고 보면 한낱 붉게 타는 화로 위에 떨어지는 눈꽃 한 송이처럼 한 순간에 자취도 없이 사라져 버릴 허망한 것입니다. 내 육신을 포함한 이 세상 모든 것은 진흙으로 만든 소가 물위를 가면 순식간에 녹아 없어져 버리듯이 찰나적인 것이니, 천지는 모두 공한 것입니다. 우주의 실상을 꿰뚫은 이런 통 큰 경지에 선 서산대사는 인연을 다한 생을 헌 옷 벗어버리듯 훌훌 털고 가는 초탈한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불자라면 누구나 잘 알고 있듯이, 불교에는 사후를 위해 대비하는 의식으로 생전예수재가 있습니다. 예수재는 예수시왕생칠재(預修十王生七齋)를 줄인 말로서 사람이 살아있을 때 자기가 죽은 후를 생각하여 명부의 십대왕과 권속들에게 미리 재를 올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생전에 자기가 지은 죄와 빚을 갚고 복을 지어 사후에 극락왕생하기를 기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신이 짓는 선업과 악업에 따라 사후에도 선악의 과보를 받게 되고 그에 따라 다음 생이 결정된다는 인과응보와 윤회사상에 따른 자연스런 의식의 하나로 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여기에는 자칫하면 자신의 생에 집착하여 사후에서까지 자신의 생을 연장하려는 아상과 자기집착의 욕망이 작동할 위험이 있습니다. 사실 완전한 해탈은 온전한 깨달음을 통해 생사윤회의 사슬로부터 벗어나 더 이상 다른 것으로 태어나 윤회하지 않고 진여법성과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본디 공한 것임을 깨달아 이 세상에서 내가 쌓고 얻은 온갖 것들을 모두 벗어던지고 나를 텅 비워야 합니다. 그동안 내가 지은 악업을 참회하고 그로 인해 쌓인 모든 미움과 원한을 풀고, 선연에 의해 다른 이들의 음덕으로 얻은 모든 것들을 그들에게 회향하는 것이야말로 아상이 만들어 낸 모든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나를 텅 비우는 길입니다. 아름다운 사후를 위한 진정으로 올바른 준비는 이처럼 아상과 모든 집착을 놓아버리고 진여법성과 하나 될 수 있도록 준비하는 것이며,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예수재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진정한 해탈을 얻어 생사윤회의 사슬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정말로 소중한 기회입니다. 그리고 이 소중한 기회를 놓치지 않는 길은 나와 내 것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나 자신을 텅 비워 진여법성과 하나 될 수 있는 준비를 제대로 하는 것입니다.
모든 불자들께서 이런 생사의 이치를 깨달아 사후를 위해 진정으로 올바른 준비를 통해 생사윤회를 벗어난 해탈에 이르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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