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욕도인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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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대반야경 중에서 작성일06-08-09 15:42 조회3,035회 댓글0건본문
인욕(忍辱)도인의 길
설법 제일(說法第一)인 부루나 존자께서 체험한 거룩한 인욕의 일화가 있다. 부루나 존자는 마음의 움직임 없이 전부 참는다는 것이다. 또 이 세상의 허무함을 여실히 깨닫고 수행자가 될 사람은 수행자가 되어 철저히 수행하도록 설법을 제일 잘 하는 분이다.
부루나 존자께서 한 번은 아직 불교가 전도되지 않은 외딴 지방에 가서 포교할 생각을 했다. 그때는 일거일동(一擧一動)을 부처님께 반드시 다 여쭈고 실천했다. 부처님 곁을 떠나는 것을 어린 아이들이 어머니 아버지한테 하듯, 지금 초등학교 학생이 선생님한테 하듯이 그랬다.
그때만 그러는 것이 아니라 지금도 그렇게 하도록 되어있다. 선생이 있으면 제자로서 그래야 할 것이고, 부모가 있으면 아들딸이 꼭 물어서 행동해야 할 것이다. 설사 제자가 스승보다 낫다고 하여도 스승은 선각자(先覺者)이니 물어서 해야 하고, 부모가 설사 대학을 못 나오고 아들만 못하다 하더라도 나보다 경험이 많은 분이니까 상의하고 물어서 하면 부자간(父子間)이고 내외간이고 문제가 될 것이 없다.
부루나 존자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아무 지방으로 가서 전도를 하고 싶은데 가도 되겠습니까?”
그러자 부처님께서 물으셨습니다.
“가기는 가지만 그 지방 사람들이 불법(佛法)이 없고, 아주 강강난폭(剛剛亂暴)한 탐재호색(貪財好色)하는 중생들만 사는 곳이니, 가서 전도하기 힘들 것이다. 만일 네가 가서 너 자신이 피땀 흘려서 알게 된 것, 공부한 것을 애써서 일러주지만 한 사람도 잘 들어서 받들지 않고, 도리어 무슨 소리인지 알아듣지 못하거니와 네 말을 전혀 듣지 않고 욕설과 비방만 하면 어찌할테냐?”
“그래도 대단히 어질고 착한 중생들이라고 생각하고, 듣고 안 듣고 간에 전도를 계속하겠습니다.”
“그러면 욕만 하면 다행인데 봉변을 당하고 몽둥이로 매질을 당한다면 그때는 어떻게 하겠느냐?”
“그래도 대단히 어질고 착한 중생들이라고 생각하겠습니다.”
“아, 사람들 때리고 돌질하고 병신 만들어 놓는데 그런 사람들이 어떻게 어질고 착한 중생이냐? 억지로 지어서 하는 소리 아니냐?”
“아닙니다. 이유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나에게 달려들어 죽이려고 하는 것보다는 어질고 착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구나. 그렇다면 너에게 그만 달려들어서 사정없이 머리에 돌멩이질을 해서 죽게 하면 어찌할 것이냐?”
10대 제자 가운데 실제로 이렇게 포교하다가 돌에 맞아서 죽은 이도 있다. 신통이 제일가는 목련존자가 그랬다. 태산도 뚫고 들어가고, 바위 속도 뚫고 들어가는 신통이 있는 이가 돌멩이에 맞아 죽었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사실은 바윗돌로 때려봐야 아무 것도 없는 허공을 때리는 것 같아서 아무렇지도 않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맞아 죽는 법이 또 있다. 이와 같은 예가 있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하신 말씀이었다.
그래도 부루나존자의 대답은 한결 같았다.
“그래도 어질고 착한 중생이라 생각하겠습니다.”
“사람을 죽인 중생을 어찌 어질고 착한 중생이라 하느냐?”
“부처님, 저희들이 억겁다생(億劫多生)으로 이 생사고해(生死苦海)를 면하지 못하는 것은 그때그때 받아서 태어난 육신, 이것을 가지고 항상 ‘나’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중생이 이 생사를 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중생의 죄업(罪業)은 제 스스로가 일부러 지어서 만든 까닭으로 제 죄를 제가 받은 것이지 누가 어디 다른 사람이 하겠습니까? 그 죄의 원인은 단지 허망한 육신을 애착하는 것에 있기 때문에 저희가 이렇게 생사고해에서 허덕이는 것이오며, 아무 까닭도 이유도 없는 고생이고 그 대가(代價)도 없는 고생뿐입니다. 그런데 이 육신을 그만 두드려 깨부수고 해탈시켜 저의 법신, 참나 진아(眞我)를 드러나게 해 주니, 그것이 어질고 착한 대보살이고 부처님 행위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참으로 감사하고 어질고 착한 부처님이라고 믿는지라 아무 원한이 없겠습니다.”
그때서야 부처님께서 고개를 끄덕이시면서 허락하셨다.
“그래 네가 전도할 자격이 있다.”
이와 같이 법사라면 자신부터 이만한 각오가 있어야 할 것이다. 우리도 각오부터 이론으로 철저히 따져서 알고, 그런 다음에 ‘오늘은 실천을 못했지만 내일은 기어코 실천하리라’ 결심하고 다짐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고는 부처님께서 전도하러 가라는 허가의 말씀을 안 하신다.
“대체 전도가 무엇이냐? 너도 안 배운 주제에 설법이 뭐냐?”
그렇게 걱정하실 것이다.
부루나 존자는 ‘설법 제일의 부루나 존자’라고 불릴 만큼 아는 것도 많고 설법도 잘 하지만, 그분은 여법하게 설법할 자격이 되어 있고, 머리를 깎고 먹물 옷을 입을 만한 분이었다.
인욕을 하여 이러한 경지에 들어서면 적이 없다. 나를 죽이는 사람도 적이 아니고, 살리는 사람도 은인이 아니다. 그런데 이렇게 나를 해롭게 하고 괴로움을 주는 사람한테 원한을 품지 않는 것은 오히려 쉽다. 나를 숭배하고 나를 따르고 온갖 것 다 대접하며 그렇게 생명을 바쳐서 나를 위하려 하고, 나를 따르는 그런 이를 고맙게 생각하지 않는 것이 맞아 죽어가면서 원망 안 하기보다 더 어렵다.
날마다 황금을 한 말씩 갖다 주고 불사에 보태 쓰고 용돈으로 쓰라고 매일 그렇게 하는 신도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제가 하고 싶어서 하는가 보다 하고 그렇게 생각해버려야 한다. 누가 가져 왔는지도 몰라야 한다.
조건부로 이렇게 저렇게 사니까 이 세상이 이렇게 혼란해서 도무지 살 수가 없는 것이다. 앞으로는 우리가 사는 세상은 무주상 세계가 될 것이다. 그래서 사바세계 이름을 고쳐 무주상세계라 할 것이다. 우리가 금강경부대를 조직해서 무주상 세계를 건설하는 역군이 되고 독립군이 되어야 한다.
아까 부루나 존자처럼 그렇게 굉장한 인욕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게 인욕이 아니라고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참아야겠다’ 이러면 머리끝까지 화가 올라와서 사고를 칠 판이지만, 그래도 ‘참아라, 참아라, 그래도 참아야지’ 이렇게 하다보면 도인이 된다.
세상만물의 공통된 참모습은 공(空)이라 하였다. 만물은 원인과 결과라는 인연 때문에 생멸하지만 이 또한 공의 경지에서 보면 허무한 것으로 흩어지거나 결합됨이 없고 인연 또한 종잡을 수 없다. 그러나 인연법에 있어서 본래 만물이 가명일지라도 만물이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이상 가명이라고만 할 수는 없다.
요컨대 만물은 원인과 결과라는 인연 없이 독자적으로 존재할 수 없고 항상 인연에 따라 변하기 때문에 실체가 없다. 영원히 변하지 않는 실체가 없기 때문에 허무한 것이고 이 허무함은 만물에 있어 변하지 않는 본성이다. 결국 모든 것은 그대로 공이고 공 그대로가 모든 것이라는 말이다.
- 대반야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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