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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호및지난호

어머님, 오늘 학교에 다녀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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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월명심(경북봉화) 작성일06-06-11 17:45 조회3,07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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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님, 오늘 학교에 다녀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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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명심 (경북 봉화)

“어머님, 오늘 학교에 다녀왔습니다. 3학년 진급도 하고, 장학금도 15만원 받았어요.” 아랫방 문을 열자 아무도 없는 빈 방에 시어머님의 사진만이 벽면에서 미소를 지으며 저를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순간 저는 눈물이 흘러나왔어요. “아, 정말 어머님은 돌아가시고 아니 계시는구나. 이 큰집에 철부지인 우리들만 남겨두고 가셨구나.” 어머님의 모습이 그리워지고 어머님 생각이 간절합니다.

어머님의 자리가 이렇게 큰 줄은 미처 깨닫지 못했어요. 오늘 제가 학교(방송통신고)에서 장학금 받은 것을 어머님께서 아셨으면 무척이나 반가워하시고 많은 칭찬을 해 주셨을 텐데, 저는 이제 누구에게 마음 놓고 자랑하며 떠들고 살아야 하나요?

버스 정류장에서 내려 우리 집을 바라보자, 문간에 어머님이 서서 저를 기다리시고 계실 것만 같았어요. 제가 외출했다가 돌아오면 어머님은 “에미, 이제 오나?” 하시면서 시집 간 딸이 친정 오는 것보다 더 놀라고 반갑게 저를 맞이하곤 하셨지요. 그런데 못난 저는 때로는 그것이 힘들 때가 있었어요. “에미야, 에미야” 하시면서 따라 다니시고, “네 음성만 들어도 좋고, 발자국 소리만 들어도 반갑다”고 하시면서 제 옆에 계시고 싶어 하실 때, 가끔은 싫기도 하고 속상하기도 해서 슬쩍 자리를 피할 때도 있었지요. 지난 가을에 영전사 행자 스님이 『지장경』을 보내 주시면서 열심히 읽으면 극락 간다고 하기에 어머님께 드렸더니, 어머님은 그 말씀을 믿으시고 열심히 보시면서 저를 찾지 않으시기에 속으로는 얼마나 좋아했는지 모릅니다. 저는 제 편함을 위해서 어머님께 드렸는데, 어머님은 『지장경』을 간절하게 읽으신 공덕으로 정말로 돌아가실 때는 너무나 편안하고 곱게, 저희들을 힘들게 하지 않고 돌아가셨어요. 손자들, 손부도 부른 듯이 와 있을 때였어요. 어머님, 지금에 와서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마는 저 자신이 원망스럽습니다. 구순 연세의 어머님이 외롭고 힘들 때, 제가 마음의 벗이 되어 드리지 못한 것이 한으로 남습니다. 어머님이 진정으로 원하시는 것이 좋은 음식과 빛나는 의복이 아니라 다정한 마음의 벗인데, 저는 물질적으로 부모님께 잘 해드리면 된다는 어리석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니, 어찌 자식의 도리를 했다고 할 수 있겠어요? 어머님이 힘드실 때, 제가 관세음보살처럼 포근한 마음으로 같이 아파하고 같이 고독을 느껴야 하는 건데,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이 후회막급입니다. 어머님의 용서를 바랍니다.

어머님, 돌이켜보면 제가 어머님을 처음 뵈었을 때가 중학교 2학년 여름방학 때였지요. 저는 친정아버지를 따라 봉화 장에 갔다가 마늘 사러 오신 어머님을 처음 만났어요. 검정 치마에 하얀 모시적삼을 입으신 단아한 모습이 무척이나 고와 보이시고 저를 바라보는 눈빛이 인정으로 넘쳐 흘렀어요. 저를 보고 자꾸 웃으시기에 저도 따라 웃었어요. 아버님과 친정아버지가 둘도 없는 친구 사이여서, 그때 저희 둘은 이미 혼인이 언약되어 있었지요. 어머님과의 귀한 인연은 그 때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제가 이 집에 시집 온지도 벌써 40년이 다 되어 옵니다.

제 나이 17세 때, 4대 독자인 아드님에게 시집을 왔으며, 이후 현재까지 늘 어머님과 함께 살았지요. 자연히 어머님이 친정어머니보다 정이 더 들고 의지하게 되었습니다. 요즈음 같으면 고등학생 밖에 안 되는 어린 나이에 시집을 왔으니, 저는 살림살이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몰랐어요. 이런 저를 어머님은 조금도 나무라지 않으시고 뭐든지 잘 한다고만 하셨어요.

어머님은 매사에 무척이나 조심하셨는데, 저는 덜렁대는 성격이었습니다. 제가 부엌에 있는 사기접시는 거의 다 깨뜨리자, 하루는 어머님이 장에 가셔서 강아지를 팔아 스테인리스 접시를 사오셨어요. 어머님은 제가 무안해 할까봐 강아지 팔아서는 소리 나는 것을 사와야 좋다고 하셨어요. 밥사발도 이를 빼고 깨뜨리자 놋그릇으로 바꾸셨는데, 우리 집에 놋그릇이 지금도 28벌 있지요. 아이들 혼사 때마다 대접을 윤이 나게 닦으셔서 비빔 그릇으로 쓰게 하시니 사람들은 저보고 살림을 규모 있게 잘 한다고 해서 속으로 웃었어요.

어머님, 제가 얼마나 한심했으면 아이들 4남매 키우면서 양말 한 짝 꿰매보지 않고 내복 무릎 한 번 기워보지 않았을까요. 저는 어머님이 옷 꿰매시는 것을 좋아하시는 줄 알고 떨어진 옷만 있으면 어머님의 바느질 그릇에 가져다 놓았습니다. 어머님은 귀찮은 내색도 않으시고 예쁘게 기워서 제 옷장에 넣어 주셨어요. 저는 제 며느리들에게 어머님이 저에게 하셨던 것의 반도 못 할 것 같습니다. 전에 어머님의 당부 말씀은 건성으로 들릴 때가 있었는데, 이제는 그 말씀들을 제가 며느리들에게 그대로 하게 되니 이제야 어머님의 간절한 마음을 알고도 남습니다. 지난 해 이맘 때 제가 학교 소풍갈 때 어머님이 돈 만 원을 주시며 잘 다녀오라고 하셨는데 올해는 그런 기대는 못 하게 되었어요.

어머님, 어제 낮에 모임에 갔다가 우리 집으로 들어오는데 불현듯 어머님 생각이 나서 또 눈물이 나오더군요. 제 심경을 행자 스님께 얘기했더니 참회하는 마음으로 부처님 복장 속에 넣는 법화경을 사경하라고 하셨어요. 어머님을 생각하며 황송한 마음으로 집에서도 쓰고 법당에 가서도 썼습니다. 한자 쓰고 부처님께 일 배하고 그렇게 몇 시간을 했더니 주지 스님과 행자 스님이 그만큼 해도 큰 공덕을 쌓았고 참회 속에 극락의 삶이 있다고 하시니 조금은 위안이 되었습니다.

어머님, 불효한 저의 행동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어요. 모두 사랑으로 용서해 주셔요. 어머님의 은혜는 하늘 같이 높으며, 어머님을 애모하는 정 또한 누를 길 없습니다.

어머님, 이제는 인연으로 맺은 근심걱정 모두 잊으시고 극락왕생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저희들도 열심히 염불하여 부처님의 공덕을 쌓겠습니다. 육신은 허망하고 실체가 없다 하오니, 어머니께서는 이 생에서의 모든 애착을 버리시고, 청정하신 마음으로 극락세계에 다시 나시기를 축원축수하옵니다. 나무아미타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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