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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호및지난호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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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기은 작성일06-07-29 17:46 조회2,96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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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 도
김기은

매년 이맘때 쯤이면 화랑무궁훈장을 비롯한 네 다섯 개의 훈장을 양쪽 가슴에 자랑스럽게 달고 유공자 모임에 다녀오시는 것을 최고의 외출로 삼으셨던 아버지. 이젠 고단했던 지나온 삶을 정리하는 팔순을 바라보는 노인이 되셨다. 육군 만기제대 후, 우연히 시작하셨던 부동산업은 어질고 올곧은 성품의 아버지에게는 맞지 않는 직업이었고,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인해 어머니는 우리 다섯 남매를 위해 교통이 불편한 시골 구석구석까지 행상을 다니셔야만 했다. 그 때 내 나이 스물다섯, 어느 덧 결혼적령기를 넘어서고 있었던 그 무렵 사촌오빠의 자금을 끌어들여 투자한 부동산이 남의 손에 모두 넘어가게 되자 아버지는 머리를 싸매고 누우셨고 나날이 더해가는 생활고 속에서 우리는 근근히 살아가고 있었다. 게다가 마치 아버지가 속여서 돈을 빼돌리기라도 한 것처럼 사촌오빠의 횡포는 극에 달했으며 거의 이삼일 간격으로 만취한 상태로 찾아와 이미 너덜너덜해진 아버지의 가슴에 칼을 들이대기 일쑤였다. 나무관세음보살…. 그때만 해도 나는 기도라는 게 무엇인지, 어떻게 하는 지도 몰랐다. 그냥 내가 처한 이 지옥 같은 현실로부터 도피하고 싶었지만, 용기도 없었고 그저 막연하기만 했다. 잠들 때마다 백팔염주를 손에 쥔 채 끊임없이 부처님을 부르며 잠들기를 반복하던 어느 날, 눈부시게 맑고 푸른 빛이 다가오면서 굵고 청아한 목소리로 ‘천생연분’이라 말하고는 사라지는 것이었다. 참 기이한 꿈이었다. 그런 꿈을 꾸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고등학교 교편을 접고 시작했던 사업이 실패로 끝난 후 작은 대리점을 운영하고 있던 지금의 남편을 만나게 되었다. 그는 첫 만남에서 과장직함이 새겨진 명함을 내밀며 내게 청혼을 해왔다. 집에서 벗어날 날만을 갈망하던 나는 조건이나 서로를 알아보는 시간도 갖지 않은 채 애정 없는 결혼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동안 결혼자금으로 모아두었던 곗돈은 부모님이 살고 계신 집을 구입하는데 모두 들어가, 나는 이불 한 채와 그릇 몇 가지만 준비해서 시댁에 들어가 더부살이 신혼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남편은 직장이 있었지만 생활비를 내놓을만한 형편은 되지 않았고 시댁에 얹혀사는 처지에 둘째 아이까지 태어나면서 심적 부담감은 늘어만 갔다. 두 시어른은 온종일 밖에 나가서 농사일을 하셨고, 나는 아직 코흘리개인 두 아이를 돌보랴 살림하랴 게다가 개, 고양이, 오리, 돼지, 닭까지 키우면서 하루하루 정신없는 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애들 고모부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이미 빚더미에 올라앉은 화장품 대리점을 떠맡게 되면서 우리가족의 불행은 시작되었다. 남편의 출퇴근이 용이치 않았던 탓에 우리는 단칸방 전셋집으로 분가를 했지만 여전히 생활은 시부모님께 의지하고 있었다. 또 이미 사향길에 들어선 남편의 사업은 시간이 흘러도 회복될 줄을 몰랐고, 그동안 들인 시간과 노력이 아까워서인지 끝까지 고집을 피우며 적자운영을 하다가 결국은 빚잔치로 끝을 맺고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은 남편 몫의 전답마저 남의 손에 넘어가게 되었다. 많은 고민 끝에 시댁의 도움을 받아 대리점을 다시 열면서 사무실 공간 한 켠을 판자로 막아 살림집을 합치고, 대부분의 옷가지나 주방도구 등은 모두 박스에 담아놓고 피난살이 같은 생활을 시작했다. 상가 건물이다 보니 환기는 엄두도 낼 수 없었고 같은 건물에 위치한 음식점에서 넘어오는 음식냄새가 늘 코를 찔렀다. 게다가 바퀴벌레와 하루 종일 귀를 괴롭히는 갖가지 소음에 시달려야 했고 겨울이면 콘크리트 바닥에서 올라오는 냉기를 우리가족의 체온과 전기장판 하나만으로 견뎌야 했다. 언젠가 나아지겠지 하는 막연한 희망만을 품은 채 살다가, 그동안 모은 돈으로 1990년대 초 조그마한 화장품 가게를 열게 된 나는 작은 아이를 종일반 보호시설에, 큰 아이를 유치원에 떠맡기듯 보내놓고 일을 하기 시작했다. 그때 당시로서는 200여만 원의 적지 않은 돈을 벌게 되었으나 그 돈마저도 남편이 하는 사업의 뒷돈으로 모두 들어가 종국에는 내가 운영하던 가게마저 정리하게 됐다. 끊임없이 날아오는 각종 세금고지서와 독촉장에 아이들이 아파도 약 한 첩조차 사줄 수 없는 상황이 계속되는 악몽 같은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이렇게 서서히 삶의 의욕을 잃어갈 무렵, 친언니의 소개로 불국사 원통전을 찾게 되었고, 차 향기처럼 맑은 기운이 가득한 스님을 만나 뵙게 되었다. 천일관음기도중이셨던 스님은 내게 아침에 일어나면 바로 관세음보살님을 떠올리며 삼배를 올리고, 백팔참회을 하고 금강경 독송과 관음정근을 하기를 권하셨다. 그리고 기도를 마치면서 다시 부처님 전에 삼배를 올리고 간절하게 발원을 하라고 당부하셨다. 가끔 기도 중 절을 할 때면 왜 그렇게 등 뒤가 섬뜩한 지 누가 머리채를 당기는 것 같았고, 금강경을 독송할 때면 손 끝이 불에 데인 듯 뜨거워서 한참을 찬물에 담그고 나서야 기도를 끝마칠 수 있었다. 그런 경계가 생길 때마다 나는 스님께 도움을 청했고 감사하게도 밤늦은 시간에도 불편해하는 기색 없이 도움을 주셨다. 그렇게 기도를 이어가던 어느 날, 큰 아이가 초등학교에 다니던 겨울방학 때였다. 남편의 사무실 직원이 급히 병원으로 가보라는 연락을 해왔다. 정신없이 달려가 병실 문을 여니 큰 아이가 왼쪽 다리를 천장에 매달고 누워있었던 것이다. 아이는 나를 보자마자 소리 없이 울먹이기 시작했고 다친 이유를 물어도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대답을 하지 못한 채 머뭇거리기만 했다. 이에 곁에 서있던 남편은 아이가 대리점 안에서 조심성 없이 뛰어다니다가 높은 박스에서 떨어져 다쳤노라고 얼버무리며 병실을 나갔다. 남편이 병실을 나가는 것을 확인한 아이는 내게 귓속말로 다친 사정을 이야기 했다. 15년째 하루도 빠짐없이 새벽기도 정진을 하며 진실한 불자로 살기 위해 노력하는 김기은 보살님의 글은 다음 호에도 계속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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