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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이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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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제열 작성일06-06-11 17:43 조회3,75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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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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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업()이란 말은 그리 좋은 감정을 갖게 하는 용어가 아니다. 사람들은 이 업이라는 말을 사용하거나 듣고, 그것을 죄와 악이라는 어둡고 고통스러운 뜻으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내가 전생에 무슨 업을 지었기에 팔자가 이 모양이냐., “이게 다 너의 업보이니 달게 받아라., “부잣집 업 나가듯 슬며시 사라졌다” 등의 자주 하는 말들 가운데 들어 있는 업이라는 의미가 그것을 말해준다.

그러나 본래 업이라는 말은 이렇게 어둡고 부정적인 면만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니다. 불교에서 사용하는 업이라는 말은 산스크리트어 카르마(karma)에서 비롯된 것으로 행위·조작·일·짓거리라는 뜻을 가진 용어인데, 중생이 일으키는 모든 활동을 통칭한다. 그러니까 업이라는 말 속에서는 선한 행위, 악한 행위,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은 등의 모든 행위가 포함되는 것이다.

불경을 읽다보면 이 업이라는 글자의 앞과 뒤에 여러 종류의 또다른 글자가 붙은 용어를 발견하게 된다(업자 앞에 붙이는 말로 선업, 악업, 무기업, 순현업, 순서업, 순후업, 별업, 공업, 부정업, 표업, 무표업 등이 있고 업 뒤에 붙이는 말로는 업보, 업장, 업경, 업습, 업력 등이 있다). 이는 업이라는 용어가 지니고 있는 뜻의 범주가 그만큼 넓기 때문이기도 하다. 실제로 부처님께서는 업이라는 뜻을 설명하는데 여러 각도에서 중생들을 이해시키려고 하셨다. 왜냐 하면 업이야말로 중생을 이 세상에 태어나게도 하고 죽게도 하며 행복하게도, 불행하게도 하는 주체이기 때문이다.

“세계는 업에 따라 존재하고 사람 또한 업에 따라 존재한다. 수레바퀴가 쐐기에 얽혀져 굴러가듯 존재하는 모든 것은 업에 속박당하고 있다”라는 『숫타니파타』의 말씀과 “사람의 행위는 좋은 땅에 잘 뿌려진 씨앗과 같은 것이다. 비가 내려 날 때가 되면 나서 성장하여 열매를 맺는다. 이와 같이 사람들이 악함과 선함으로 하는 행위도 반드시 성숙하여 과보를 가져오나니 현세에서나 내세에서나 그 과실을 먹어야 한다”라는 『증일아함경』의 말씀은 업이 바로 세계와 중생을 건립하는 요인이며 금생과 내생의 삶을 되풀이하게 하는 윤회의 씨앗임을 알게 해 준다. 이렇게 볼 때 우리 모두는 업을 짓는 자이면서 동시에 업을 받는 자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이렇게 중생의 삶을 지배하며 장악하고 있는 업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하고 대처해야 옳을까?

경험해 본 사람은 알겠지만 옛날 시골의 논둑이나 밭둑길을 걷다 보면 풀섶에서 썩은, 짧은 새끼줄 떨어진 것을 간혹 발견하게 된다. 그런데 때로는 이 새끼줄이 사람의 가슴을 무척 놀라게 하는 수가 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그 새끼줄을 뱀으로 착각했을 경우이다. 꼭 뱀이 풀섶에서 몸을 늘이고 있는 것처럼 착각하고 뒷걸음치던 경험을 시골에서 살았던 사람은 한두 번쯤 해봤을 것인데 이 일이 아니라도 우리는 이와 비슷한 경험을 당할 때가 종종 있다. 속담에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라는 말도 그 한 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매우 흥미 있고 유익한 이치를 생각해 낼 수 있다. 그것은 다름아니라 왜 썩은 새끼줄을 하필이면 뱀으로 착각하였느냐 하는 점이다.

새끼줄을 염주로도 볼 수 있었을 텐데 어째서 뱀으로만 보았느냐는 말이다. 여기서 두 가지 대답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가장 흔한 대답으로 “당연히 새끼줄이 뱀의 모습을 닮았기 때문이다”라는 경우이다. 즉 썩은 새끼줄이 뱀으로 착각되어 보이는 이유는 새끼줄 자체가 염주나 꽃을 닮지 아니하고 뱀의 모습과 흡사하기 때문이라는 것인데 이 대답에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이 동조한다. 다음의 두 번째 대답은 좀 이해하기 어려운 대답으로 “새끼줄을 뱀으로 본 것은 새끼줄을 보고 뒤로 도망친 사람이 뱀에 대한 생각을 마음속에 저장해 두었기 때문”이라는 경우이다.

즉 썩은 새끼줄을 뱀으로 보고 도망친 이유는 새끼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새끼줄을 보고 있던 사람의 마음에 뱀에 대한 정보가 미리 들어 있다가 새끼줄이라는 인연을 만나 착각 현상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불교는 후자의 대답을 지지한다.

이 비유에는 불교의 업과 그 수행 원리가 들어 있다. 업이란 수행적 입장에서 볼 때 ‘마음 짓거리’라고 해석할 수 있다. 마음 짓거리의 결과가 업보이고, 마음 짓거리가 쌓여서 이루어진 것이 업장(業障)이며, 마음 짓거리에 따라붙는 버릇이 업습(業習)이며, 마음 짓거리에 의해서 바라보이는 세계가 업경(業鏡)이며, 마음 짓거리가 일어나는 힘이 업력(業力)이다. 그러니까 업을 발생시키고 업을 저장하고 업을 받는 곳이 다름 아닌 마음에 있는 것이다.

중생은 항상 자기 마음이 한 짓거리만큼 세상도 그렇게 보이고 그만큼 가치도 느끼며 과보도 받는 것이다. 똑같은 산을 보고도 골프 좋아하는 사람은 저 산에다 골프장 지었으면 좋겠다고 상상하고 건축업자는 저 산에다 빌라나 콘도를 지었으면 좋겠다고 상상하고, 불자는 저 산에다 수행처를 지었으면 좋겠다고 상상한다.

이렇듯 중생은 자기의 마음으로 모든 것을 그리고, 만들어 놓고, 거기에 다시 집착하여 벗어나지 못하고 얽매이게 된다. 바로 자기의 마음과, 마음에서 일으킨 업과, 업에 의해서 나타난 세계가 본래 따로 분리되어 있지 않건만 중생은 각각 따로 있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제 마음이 뱀의 업을 만들고 새끼줄을 뱀으로 착각해 놀라듯, 중생은 제 업 속에서 살다가 제 업 속에서 죽는다. 불교의 수행은 바로 이렇게 잘못된 착각을 바로잡고 스스로가 지은 업으로부터 벗어나려는 공부이다.

새끼줄을 새끼줄로 볼 수 있는 지혜, 뱀으로 잘못 여긴 뒤집힌 생각으로부터 벗어난 지혜를 얻으려는 공부가 불교의 수행이라는 말이다. 그러려면 항상 마음에 관심을 두어야 한다. 마음을 바꾸고, 날뛰는 마음을 바로잡지 않고서는 업을 바꾸지 못하기 때문이다.

흔히 우리 불교에서 자주 쓰고 있는 업장소멸이니, 업장참회니 하는 것은 모두 전생부터 쌓아 왔던 왜곡되고 굴절된 마음을 정립하고 청정히 하여 내면의 깨달음을 이루기 위해서이다.

그럼 어떻게 업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모든 마음 짓거리에 따른 인과업을 벗어나려면 근본적으로 마음 짓거리를 그쳐야 한다. 업장소멸이니 업장참회니 업장청정이니 멸업장이니 하는 말은 결국은 마음 짓거리가 사라진 경지를 뜻한다.

흔히들 업장을 참회한다, 업장을 소멸한다 하면 죄지은 것을 참회하거나 소멸한다고들 이해하는데, 불교에서 말하는 업장은 단순히 죄지음이나 악한 짓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업장이란 중생들이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아니 그 이전부터 지니고 내려왔던 근본무명과 그에 기반하여 일어나는 일체의 마음 짓거리들을 전부 지칭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실로 업장을 소멸하려면 마음 짓거리를 쉬게 하고 나아가서는 마음 짓거리를 하게 하는 근본무명심을 타파해야 한다. 이것이 해결되지 않고서는 업에서 벗어나려야 벗어날 수가 없다.

진정한 의미의 업장소멸은 뱀을 새끼줄로 보기도 하고 염주로 보기도 했던 자신의 어리석은 마음을 탓하고 다시는 속지 않겠다고 마음을 다지는 자세로부터 출발한다. 바로 자신의 마음으로 모든 것을 돌리는 일, 이것이 매우 중요한 것이다. 항상 쉬지 않고 찰나찰나 일어나는 마음 짓거리를 집중적으로 보면서 그 짓거리를 완전히 쉴 때, 비로소 업의 본질을 보게 되고 업으로부터 벗어나게 된다.

이렇게 볼 때 우리 불자가 늘 업장을 소멸해 달라고 찾는 관세음보살은 입으로 불러들이는 마음 바깥의 관세음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 짓거리를 보게 하고, 쓰게 하고, 여의게 하는 마음 안의 관세음이다. 업은 누가 대신 맑혀주고 참회시켜 주지 않는다. 업은 업을 지은 사람이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

자신에게 닥쳐올 업이 저 밖의 허공이나 세상이나 시간 가운데 어디에 있을 것이라고 두려워하고 없애려 하지 말고, 지금 이 순간에 일어나는 자신의 마음 업을 항상 관찰하며 소멸하려고 수행해야 할 것이다.


- 이제열, 『수행으로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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