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아버지의 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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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서재만 작성일06-11-23 16:31 조회3,156회 댓글0건본문
가을, 아버지의 눈물
서재만
나는 하루 일과가 시작되면 언제나 철창 밖의 산을 바라본다. 오랜 세월동안 온갖 풍상으로 쓸리고, 허물어지고, 깎인 탓에 상처 난 가슴을 드러낸 바위 면을 바라볼 때면, 항상 지나간 나의 삶의 여정이 떠오른다. 슬프고 괴롭고 순간순간 가슴 저리는 과거의 편린들이…
삼십 년 전의 아득한 시절, 돌이키면 그 아슴한 세월의 건너편 내 청춘의 고단한 기억들이 보인다. 그러나 다시 한 번 그 시절로 돌아가면 좋을 듯한 추억의 편린이 나를 목 메이게 한다. 서울 상계동 뚝방동네. 하천을 따라 길게 이어진 뚝 밑, 판자로 지은 집에서 산다고 하여 뚝방동네라 불렸다.
나는 서울 삼양동에서 사남 일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수차례 이사를 다닌 끝에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이곳 뚝방 동네에서 성장하게 되었다. 갈 곳 없는 철거민들이 한 집 두 집 모여서 동네를 이룬 곳, 나는 뚝방 동네에서 가난을 그림자처럼 달고 다니면서 사람과 인생에 대해 고뇌하며 자라야 했다.
중학교 일학년 때인 어느 가을날 오후, 일터로 나가신 부모님을 기다리며 배고픔에 칭얼대는 동생들을 토닥이던 나는, 느닷없이 들이닥친 철거반원들에게 가재도구와 함께 집밖으로 내쫓겼다. 판자로 된 집이 뜯겨지고 부서지는 광경을 어린 동생들과 함께 두려움과 슬픈 눈으로 바라보아야 했던 기억이 새롭다.
나의 어린 시절은 꿈과 낭만의 시간보다는 가난과 시련이 연속된 시간이어서 항상 나를 서글프게 만들었다. 큰아들인 나는 일터로 나가신 부모님을 대신해서 집안일과 어린 동생들을 돌보아야만 했다. 그런 나를 부모님은 대견하게 여기시며 가난한 살림이지만 중학교에 입학을 시켰다.
비록 영세민들이 대부분인, 교육부 허가도 없는 상업전수학교 겸 고등공민학교였지만 교복을 입고 학교에 다닌다는 사실만으로 나는 정말 행복했다. 중학교 졸업 후에도 같은 시설인 상업전수학교에 진학, 열심히 공부하였다.
세월의 흐름에 따라 집안 사정도 한결 좋아져서 고등학교 졸업반쯤에는 허름한 주택이나마 이사를 하게 되었다. 학교 졸업을 앞두고 고등학교 졸업자격 검정고시를 치르게 되었는데, 당시 학교에서 유일하게 여학생 한 명과 남학생인 나 혼자만이 합격하게 되었다. 부모님은 무척 기뻐하시며 큰아들인 내가 대학에 들어갈 수 있다면 어떤 고생도 감수하시겠다며 공부를 계속하라고 격려해 주셨다. 그때가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때가 아니었나 생각한다. 졸업 후 나는 대학진학을 위해 부모님과 상의한 후 종로에 있는 대입학원에 다니게 됐다.
그러나 대학진학의 꿈을 성공시키고 성공한 사람이 되어 멍에처럼 달고 다니던 가난의 굴레를 벗어버리고 돈을 많이 벌어보겠다고 선택한 그 길이, 그 후 이십 년간의 세월을 눈물과 고통으로 살게 하리라고는 결코 생각하지 못했다.
학원에 다닌 처음 몇 개월 동안은 꿈과 희망에 부풀어 학업에 전념했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변화한 세상을 의식하기 시작했고, 거침없이 돈을 써대는 젊은 사람들을 보면서 초라한 나의 존재와 비교하며 상대적 빈곤감에 갈등을 느끼기 시작했다.
생각이 가는 곳에 행동도 따라가듯 나는 학원가에서 건들거리는 뒷골목 친구들과 어울리게 되었다. 그때부터 학원보다는 당구장, 다방, 술집 등을 전전하였고 대마초까지 입에 대었다. 더구나 사치와 유흥비를 마련하기 위하여 소매치기 일원이 되어 타인의 주머니를 뒤지고 다녔으니, 이때부터 범죄자로서의 삶이 시작된 것이었다.
돌이켜 보면 참으로 부끄럽기만 한 세월이었다. 방황과 욕망으로 점철된 나의 이삼십대, 가난에 대한 한풀이라도 하듯 나는 오직 돈만이 인생의 전부인양 돈을 움켜쥐기 위해 거리를 배회하였다. 나는 범죄가 주는 마력에 빠져 헤어날줄 몰랐다. 가속도가 붙은 팽이처럼 자학이나 욕망의 채찍을 들지 않아도 ‘소매치기’는 그대로가 나의 생활이 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것은 생활이 아니었다. 일종의 자학이었다. 가난을 떨쳐 버리고 집안을 일으켜 보겠다고 다짐했던 소년은 어느덧 시나브로 전과자가 되었고 영혼은 물론 육체까지도 철저하게 망가지게 되었다. 이렇게 반복된 생활은 전과의 횟수가 늘어감에 따라 같은 전과자들도 끔찍하게 생각하는 청송감호소를 두 번씩이나 오게 만들었다.
아버지의 눈물을 처음 보았다. 지금도 마치 날카로운 매의 부리로 가슴을 쪼아대는 것 같은 고통으로 생생하게 떠오른다.
1993년 10월 중순, 의정부경찰서에 구속된 후 부모님이 면회를 왔다. “이 자식아! 이제 들어가면 언제 나오냐! 차라리 나오지나 말지” 하시며 통곡하시는 어머니 등 뒤에서 말없이 눈물을 흘리시던 아버지의 모습을 기억한다. 그 어떤 역경과 난관 속에서도 언제나 굳건한 모습을 보이시던 아버지께서 눈물을 흘리신 것이다. 하지만 청송감호소에서 가출소한 지 6개월도 안돼 또다시 소매치기죄로 구속된 자식을 보시고 아버지께서 겪으셔야 했던 그 좌절감과 배신감 그리고 마음의 고통을 내가 어찌 헤아릴 수 있었겠는가.
징역 1년6월과 보호감호 7년을 선고받고 다시 올 수밖에 없었던 청송땅. 또다시 부모님과 형제들에게 실의와 배신감만을 안겨준 채 10년 가까운 세월을 담 안에서 보내야 한다는 사실이 나를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반변천 물줄기를 타고 불어오는 갈바람이 유난히도 매섭게 느껴지던 95년 11월 중순, 부모님께서 다시 면회를 오셨다. 흰머리에 굵은 주름이 나이보다 더 늙어 보이시는 부모님을 대하니 내 가슴은 찢어질 듯 아팠다. 나는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시는 어머니를 바라보며 터져 나오려는 회한의 눈물을 이를 악물고 참아야 했다.
불경에 “어버이 은혜를 갚기 위해 왼쪽 어깨에 아버지를 업고 오른쪽 어깨에 어머니를 업고서, 살갗이 다 닳아서 뼈가 나오고 뼈가 닳아서 골수에 미칠만큼 수미산을 백 천번 돌아도, 부모님의 은혜를 갚기에는 부족하다”는 말씀이 있다.
아! 자식이 효의 예를 다하여도 부모님께 항상 부족한 자식인데, 부모님과 동생들에게 세간의 전과자의 부모형제라는 손가락질을 받게 하였으니, 그 죄가 얼마나 큰 것인가! 그러던 중 소포가 도착했다. 아버지께서 보내주신 불자수지독송경과 불교성전이었다.
95년 11월 하순에 처음 만난 불법이었다. 불교경전과 접하면서 나는 새로운 각오로 수형생활에 임하기 위하여 96년 1월부터 정비기능사 2급 훈련생에 입교하여 정비기술을 배우기 시작했다. 처음 접하는 자동차의 구조와 조립방법을 익히며 새로운 흥미를 가지고 열심히 기술을 배우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6개월이 지나면서 또다시 나의 마음자세는 흐트러졌다.
태양볕이 가장 뜨거운 7월 중순, 며칠 동안 식사도 거른 채 불면의 밤을 보내며 내 자신에게 반문해 보았다. 나는 정말 이렇게 밖에 살 수 없는가? 나는 참으로 구제불능의 패륜아인가? 소중한 내 인생을 여기서 끝내려 하는가?
며칠이 지났을까? 배고픔에 밥을 먹으려고 식기함에 손을 내미는 순간 지금까지 관심을 두지 않았던 책 한 권이 눈에 띄었다. 식사를 마친 후, 나는 문득 시간을 소일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무심코 책을 펴 보았다. <지장경>이라는 불경이었다. 순간 부모님의 얼굴이 떠올랐다. 책장을 넘겼다. 첫 장에 삭발한 모습의 스님이 왼손에는 여의륜주를 들고, 오른손에는 석장을 짚고 연꽃 위에 앉아 계시는 사진이 보였다. 왠지 친근하게 와 닿는 그 분은 지장보살님이셨다. 나는 독거실에 수용된 지 4일째부터 <지장경>을 읽기 시작했으니, 이 <지장경>을 통하여 내 일생일대의 회심이 이루어질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었다.
“지옥중생들을 위하여 눈물을 흘리시며 성불하지 못한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있는 한 결코 성불하지 않겠다는 대원을 세우시고, 중생구제를 위하여 어떠한 악취(惡趣)에도 나시며, 어떤 중생이 아무리 많은 악업을 지었더라도, 아주 작은 선행을 했다면 그를 불법으로 이끌어 주시고 그 생을 보살펴 주시는 지장보살님!”나는 <지장경>을 독송하며 불교의 자비사상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나같이 삼악도에 빠질 죄인을 위하여 지장보살님은 부처의 자리도 미루시고, 지금도 나에게 자비의 손길을 내밀고 계심을 깨닫게 되었다. 나는 가슴벅찬 회한 속에서 마음속 깊이 다짐했다. ‘이제부터 지장보살님을 내 인생의 등불로 삼고 그 분의 행과 원을 정성을 다하여 본받겠다…’고 나는 내 인생의 가장 척박하고 고통스런 상황에서 불법을 만나 일생 처음으로 내 자신을 위한 참회의 눈물을 흘렸다. 나는 묶인 두 손을 간신히 합장하고 두 무릎을 꿇고 앉아 태어나서 처음으로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를 올렸다.
이 자식을 위해 눈물을 흘리시던 부모님의 모습이 보이고, 나의 탐욕으로 인하여 상처를 입은 수많은 사람들의 증오가 내 가슴에 비수가 되어 찔러 오는 듯했다. 아! 전생의 업도 지중한데 하물며 현생의 죄업마저 더한다면 나는 무간지옥에 빠져 한없는 고통의 세월을 보내야 하리라.
나는 무엇보다도 먼저 부모님께 뼛속 깊이 우러나오는 참회의 서신을 올렸다. 앞으로는 진정 참다운 불자로서 신앙생활을 하며, 부끄럽지 않은 아들이 되겠다는 다짐의 서신을. 나는 거실생활을 하며 신심을 가지고 경전을 탐독하기 시작했다. 몇 개월이 지난 후 작업공장에 출역을 함과 동시에 불교신자들이 생활하는 불교방에 입실하여 불자로서 부처님께 조석으로 예불드리는 신앙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불법을 체계적으로 배워야겠다는 의욕이 끊임없이 일어났다. 그리하여 98년 8월에 대망의 한국불교통신대학의 졸업장을 받게 되었다. 이 졸업장은 나의 어두웠던 과거를 몰아내고 부처님의 진리 안에서 전법사로서 새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게 하는 길잡이이기에 그 기쁨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이 컸다.
이 모든 것의 인연을 베풀어 주신 부모님께 진정 감사드린다. 어둠을 뚫고 솟아오르는 찬란한 태양처럼 세상을 비추는 불법의 진리를 만나 참된 인간의 존재를 자각하고, 내 가슴에 희망이 가득함은 실로 부처님의 은혜라 아니할 수 없다. 이제는 이 자식을 위해서 아버지께서 흘리신 눈물이 결코 헛되지 않도록 할 것이다. 어머니의 애틋한 눈물도 결코 잊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현재의 삶이 힘들고 나태해지면 부처님의 말씀을 경책 삼아 수행에 전념할 것이다.
이 글은 현대불교신문에 실린 신행수기를 인용허락을 얻어 게재합니다.
서재만
나는 하루 일과가 시작되면 언제나 철창 밖의 산을 바라본다. 오랜 세월동안 온갖 풍상으로 쓸리고, 허물어지고, 깎인 탓에 상처 난 가슴을 드러낸 바위 면을 바라볼 때면, 항상 지나간 나의 삶의 여정이 떠오른다. 슬프고 괴롭고 순간순간 가슴 저리는 과거의 편린들이…
삼십 년 전의 아득한 시절, 돌이키면 그 아슴한 세월의 건너편 내 청춘의 고단한 기억들이 보인다. 그러나 다시 한 번 그 시절로 돌아가면 좋을 듯한 추억의 편린이 나를 목 메이게 한다. 서울 상계동 뚝방동네. 하천을 따라 길게 이어진 뚝 밑, 판자로 지은 집에서 산다고 하여 뚝방동네라 불렸다.
나는 서울 삼양동에서 사남 일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수차례 이사를 다닌 끝에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이곳 뚝방 동네에서 성장하게 되었다. 갈 곳 없는 철거민들이 한 집 두 집 모여서 동네를 이룬 곳, 나는 뚝방 동네에서 가난을 그림자처럼 달고 다니면서 사람과 인생에 대해 고뇌하며 자라야 했다.
중학교 일학년 때인 어느 가을날 오후, 일터로 나가신 부모님을 기다리며 배고픔에 칭얼대는 동생들을 토닥이던 나는, 느닷없이 들이닥친 철거반원들에게 가재도구와 함께 집밖으로 내쫓겼다. 판자로 된 집이 뜯겨지고 부서지는 광경을 어린 동생들과 함께 두려움과 슬픈 눈으로 바라보아야 했던 기억이 새롭다.
나의 어린 시절은 꿈과 낭만의 시간보다는 가난과 시련이 연속된 시간이어서 항상 나를 서글프게 만들었다. 큰아들인 나는 일터로 나가신 부모님을 대신해서 집안일과 어린 동생들을 돌보아야만 했다. 그런 나를 부모님은 대견하게 여기시며 가난한 살림이지만 중학교에 입학을 시켰다.
비록 영세민들이 대부분인, 교육부 허가도 없는 상업전수학교 겸 고등공민학교였지만 교복을 입고 학교에 다닌다는 사실만으로 나는 정말 행복했다. 중학교 졸업 후에도 같은 시설인 상업전수학교에 진학, 열심히 공부하였다.
세월의 흐름에 따라 집안 사정도 한결 좋아져서 고등학교 졸업반쯤에는 허름한 주택이나마 이사를 하게 되었다. 학교 졸업을 앞두고 고등학교 졸업자격 검정고시를 치르게 되었는데, 당시 학교에서 유일하게 여학생 한 명과 남학생인 나 혼자만이 합격하게 되었다. 부모님은 무척 기뻐하시며 큰아들인 내가 대학에 들어갈 수 있다면 어떤 고생도 감수하시겠다며 공부를 계속하라고 격려해 주셨다. 그때가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때가 아니었나 생각한다. 졸업 후 나는 대학진학을 위해 부모님과 상의한 후 종로에 있는 대입학원에 다니게 됐다.
그러나 대학진학의 꿈을 성공시키고 성공한 사람이 되어 멍에처럼 달고 다니던 가난의 굴레를 벗어버리고 돈을 많이 벌어보겠다고 선택한 그 길이, 그 후 이십 년간의 세월을 눈물과 고통으로 살게 하리라고는 결코 생각하지 못했다.
학원에 다닌 처음 몇 개월 동안은 꿈과 희망에 부풀어 학업에 전념했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변화한 세상을 의식하기 시작했고, 거침없이 돈을 써대는 젊은 사람들을 보면서 초라한 나의 존재와 비교하며 상대적 빈곤감에 갈등을 느끼기 시작했다.
생각이 가는 곳에 행동도 따라가듯 나는 학원가에서 건들거리는 뒷골목 친구들과 어울리게 되었다. 그때부터 학원보다는 당구장, 다방, 술집 등을 전전하였고 대마초까지 입에 대었다. 더구나 사치와 유흥비를 마련하기 위하여 소매치기 일원이 되어 타인의 주머니를 뒤지고 다녔으니, 이때부터 범죄자로서의 삶이 시작된 것이었다.
돌이켜 보면 참으로 부끄럽기만 한 세월이었다. 방황과 욕망으로 점철된 나의 이삼십대, 가난에 대한 한풀이라도 하듯 나는 오직 돈만이 인생의 전부인양 돈을 움켜쥐기 위해 거리를 배회하였다. 나는 범죄가 주는 마력에 빠져 헤어날줄 몰랐다. 가속도가 붙은 팽이처럼 자학이나 욕망의 채찍을 들지 않아도 ‘소매치기’는 그대로가 나의 생활이 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것은 생활이 아니었다. 일종의 자학이었다. 가난을 떨쳐 버리고 집안을 일으켜 보겠다고 다짐했던 소년은 어느덧 시나브로 전과자가 되었고 영혼은 물론 육체까지도 철저하게 망가지게 되었다. 이렇게 반복된 생활은 전과의 횟수가 늘어감에 따라 같은 전과자들도 끔찍하게 생각하는 청송감호소를 두 번씩이나 오게 만들었다.
아버지의 눈물을 처음 보았다. 지금도 마치 날카로운 매의 부리로 가슴을 쪼아대는 것 같은 고통으로 생생하게 떠오른다.
1993년 10월 중순, 의정부경찰서에 구속된 후 부모님이 면회를 왔다. “이 자식아! 이제 들어가면 언제 나오냐! 차라리 나오지나 말지” 하시며 통곡하시는 어머니 등 뒤에서 말없이 눈물을 흘리시던 아버지의 모습을 기억한다. 그 어떤 역경과 난관 속에서도 언제나 굳건한 모습을 보이시던 아버지께서 눈물을 흘리신 것이다. 하지만 청송감호소에서 가출소한 지 6개월도 안돼 또다시 소매치기죄로 구속된 자식을 보시고 아버지께서 겪으셔야 했던 그 좌절감과 배신감 그리고 마음의 고통을 내가 어찌 헤아릴 수 있었겠는가.
징역 1년6월과 보호감호 7년을 선고받고 다시 올 수밖에 없었던 청송땅. 또다시 부모님과 형제들에게 실의와 배신감만을 안겨준 채 10년 가까운 세월을 담 안에서 보내야 한다는 사실이 나를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반변천 물줄기를 타고 불어오는 갈바람이 유난히도 매섭게 느껴지던 95년 11월 중순, 부모님께서 다시 면회를 오셨다. 흰머리에 굵은 주름이 나이보다 더 늙어 보이시는 부모님을 대하니 내 가슴은 찢어질 듯 아팠다. 나는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시는 어머니를 바라보며 터져 나오려는 회한의 눈물을 이를 악물고 참아야 했다.
불경에 “어버이 은혜를 갚기 위해 왼쪽 어깨에 아버지를 업고 오른쪽 어깨에 어머니를 업고서, 살갗이 다 닳아서 뼈가 나오고 뼈가 닳아서 골수에 미칠만큼 수미산을 백 천번 돌아도, 부모님의 은혜를 갚기에는 부족하다”는 말씀이 있다.
아! 자식이 효의 예를 다하여도 부모님께 항상 부족한 자식인데, 부모님과 동생들에게 세간의 전과자의 부모형제라는 손가락질을 받게 하였으니, 그 죄가 얼마나 큰 것인가! 그러던 중 소포가 도착했다. 아버지께서 보내주신 불자수지독송경과 불교성전이었다.
95년 11월 하순에 처음 만난 불법이었다. 불교경전과 접하면서 나는 새로운 각오로 수형생활에 임하기 위하여 96년 1월부터 정비기능사 2급 훈련생에 입교하여 정비기술을 배우기 시작했다. 처음 접하는 자동차의 구조와 조립방법을 익히며 새로운 흥미를 가지고 열심히 기술을 배우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6개월이 지나면서 또다시 나의 마음자세는 흐트러졌다.
태양볕이 가장 뜨거운 7월 중순, 며칠 동안 식사도 거른 채 불면의 밤을 보내며 내 자신에게 반문해 보았다. 나는 정말 이렇게 밖에 살 수 없는가? 나는 참으로 구제불능의 패륜아인가? 소중한 내 인생을 여기서 끝내려 하는가?
며칠이 지났을까? 배고픔에 밥을 먹으려고 식기함에 손을 내미는 순간 지금까지 관심을 두지 않았던 책 한 권이 눈에 띄었다. 식사를 마친 후, 나는 문득 시간을 소일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무심코 책을 펴 보았다. <지장경>이라는 불경이었다. 순간 부모님의 얼굴이 떠올랐다. 책장을 넘겼다. 첫 장에 삭발한 모습의 스님이 왼손에는 여의륜주를 들고, 오른손에는 석장을 짚고 연꽃 위에 앉아 계시는 사진이 보였다. 왠지 친근하게 와 닿는 그 분은 지장보살님이셨다. 나는 독거실에 수용된 지 4일째부터 <지장경>을 읽기 시작했으니, 이 <지장경>을 통하여 내 일생일대의 회심이 이루어질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었다.
“지옥중생들을 위하여 눈물을 흘리시며 성불하지 못한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있는 한 결코 성불하지 않겠다는 대원을 세우시고, 중생구제를 위하여 어떠한 악취(惡趣)에도 나시며, 어떤 중생이 아무리 많은 악업을 지었더라도, 아주 작은 선행을 했다면 그를 불법으로 이끌어 주시고 그 생을 보살펴 주시는 지장보살님!”나는 <지장경>을 독송하며 불교의 자비사상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나같이 삼악도에 빠질 죄인을 위하여 지장보살님은 부처의 자리도 미루시고, 지금도 나에게 자비의 손길을 내밀고 계심을 깨닫게 되었다. 나는 가슴벅찬 회한 속에서 마음속 깊이 다짐했다. ‘이제부터 지장보살님을 내 인생의 등불로 삼고 그 분의 행과 원을 정성을 다하여 본받겠다…’고 나는 내 인생의 가장 척박하고 고통스런 상황에서 불법을 만나 일생 처음으로 내 자신을 위한 참회의 눈물을 흘렸다. 나는 묶인 두 손을 간신히 합장하고 두 무릎을 꿇고 앉아 태어나서 처음으로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를 올렸다.
이 자식을 위해 눈물을 흘리시던 부모님의 모습이 보이고, 나의 탐욕으로 인하여 상처를 입은 수많은 사람들의 증오가 내 가슴에 비수가 되어 찔러 오는 듯했다. 아! 전생의 업도 지중한데 하물며 현생의 죄업마저 더한다면 나는 무간지옥에 빠져 한없는 고통의 세월을 보내야 하리라.
나는 무엇보다도 먼저 부모님께 뼛속 깊이 우러나오는 참회의 서신을 올렸다. 앞으로는 진정 참다운 불자로서 신앙생활을 하며, 부끄럽지 않은 아들이 되겠다는 다짐의 서신을. 나는 거실생활을 하며 신심을 가지고 경전을 탐독하기 시작했다. 몇 개월이 지난 후 작업공장에 출역을 함과 동시에 불교신자들이 생활하는 불교방에 입실하여 불자로서 부처님께 조석으로 예불드리는 신앙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불법을 체계적으로 배워야겠다는 의욕이 끊임없이 일어났다. 그리하여 98년 8월에 대망의 한국불교통신대학의 졸업장을 받게 되었다. 이 졸업장은 나의 어두웠던 과거를 몰아내고 부처님의 진리 안에서 전법사로서 새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게 하는 길잡이이기에 그 기쁨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이 컸다.
이 모든 것의 인연을 베풀어 주신 부모님께 진정 감사드린다. 어둠을 뚫고 솟아오르는 찬란한 태양처럼 세상을 비추는 불법의 진리를 만나 참된 인간의 존재를 자각하고, 내 가슴에 희망이 가득함은 실로 부처님의 은혜라 아니할 수 없다. 이제는 이 자식을 위해서 아버지께서 흘리신 눈물이 결코 헛되지 않도록 할 것이다. 어머니의 애틋한 눈물도 결코 잊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현재의 삶이 힘들고 나태해지면 부처님의 말씀을 경책 삼아 수행에 전념할 것이다.
이 글은 현대불교신문에 실린 신행수기를 인용허락을 얻어 게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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