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체대비와 평등
페이지 정보
작성자 이춘성 (용호종합사회복지관 … 작성일07-06-18 00:09 조회3,111회 댓글0건본문
부처님은 누구이며 왜 이 사바세계에 나투시어 그리도 큰 원력을 세우셨는지 부처님오신날을 맞이해서 불자라면 모두가 화두로 삼아야 하지 않을까요?
부처님께서는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고자 절체 절명의 고뇌에서 시작하여 6년이란 세월 동안 뼈를 깎는 고행을 한 후 마침내 어느 곳에도 걸림이 없는 완벽한 결과물을 찾아, ‘이것이 괴로움이다. 이것이 괴로움의 원인이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이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로 가는 것이다.’ 이렇게 완전하게 깨달았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욕망으로부터, 존재로부터, 무지로부터 완전한 자유를 성취하시고 무상정각을 이루신 자유로운 존재이십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최초로 하신 말씀이 ‘하늘과 땅위에 나 홀로 존귀하다. 삼계중생의 모든 괴로움을 내가 편안케 하리라’입니다.
다시 말해 이 선언은 이 땅에 평등과 평화를 구현하고자 하는 엄청난 표현이 아닐 수 없으며, 생명의 존엄성과 중생의 고통을 구제하시려는 의지의 표현인 것입니다. 즉 인간 해방 더 나아가 중생 해방을 위해 부처님이 이 땅에 오신 뜻을 확고히 밝히신 것입니다.
지금도 그러하듯이 인도 사회는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탄생할 당시에도 사성계급-우리의 역사에서는 양반계급-이 뚜렷하여 평민이나 천민은 종교행사에도 참석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부처님은 사성계급 제도에 의해 브라만교가 누리던 절대적 권위를 단호히 거부하신 것입니다.
또한 사람은 출생에 의해 신분이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행위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라는 것을 강조하신 부분이기도 합니다. 부처님의 평등사상은 무릇 인간만이 아니라 살아있는 생명 즉, 미물에 이르기까지 만 중생이 누려야 할 생명의 존엄성을 말씀하신 것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수행과정에서 평민이나 천민을 막론하고 7가식을 하시며 중생들에게 골고루 복전을 나누어 주셨습니다. 당시에 상위 계급에서는 천민들이 주는 재물은 천박하다고 하여 받지를 않았으나 부처님께서는 이러한 것에 끄달리지 않고 모든 부분을 수용했습니다. 이 부분 또한 모든 중생이 동일한 생명체이며 운명공동체라는 것을 몸소 실천해 보이신 동체대비와 평등사상을 만천하에 공표하신 한 예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동체대비와 평등사상은 부처님과 불교를 믿고 따르는 불교도의 근본적인 사회관이요, 가치관입니다. 불교의 수행은 크게 지혜의 문과 자비의 문으로 대별할 수 있습니다. 지혜와 자비는 수행자에게는 수행의 관문이지만 일반 신자들에게는 삶의 덕목과 같습니다. 따라서 불자들은 지혜롭게 살고자 하고, 자비롭게 살고자 합니다. 부처님을 위시해 역대 조사스님들도 궁극에는 이 지혜와 자비를 거듭 강조하셨습니다.
누구나 행복하기를 원하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들의 일상생활이 행복해지려면 물질적 풍요와 정신적 성숙이 따라야 합니다. 물질적인 풍요만 하더라도 세속적인 욕망 위에 지혜롭게 대처하는 정신적 성숙이 필요합니다. 또 아무리 물질적으로 풍족하게 살더라도 정신적인 면이 성숙하지 못하면 결국 불행해지고 맙니다. 정신적으로 성숙하면 재산도 잘 관리하고, 건강도 잘 지키고, 대인관계도 부드럽고 원만해서 사방에 친구와 조력자로 넘치게 됩니다. 정신적 성숙이 없으면 인생에 평화도 없고 풍요도 없습니다. 모든 생활이 불행하게 전개되는 것은 정신적으로 미숙해서 그런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는 중생계에는 정신적 성숙이 꼭 필요한 것입니다. 이 정신적 성숙이 바로 지혜와 자비의 가르침입니다.
지혜와 자비는 서로 독립적인 가치이면서 또한 상호 원융하는 가치입니다.
부처님은 물론 역대 도를 깨친 선지식의 일화나 어록을 보면 지혜를 깨친 사람들은 한결같이 자비를 강조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지혜가 개인의 마음을 청정하게 하는 개인의 사유에서 비롯된다면 자비는 상호관계에 의해 구현됩니다. 그런데 개인적인 깨침을 위해 모든 관계를 단절하고 오로지 일심으로 정진해 지혜를 깨친 사람들이 깨치고 나면 왜 한결같이 자비를 강조할까요? 그것은 지혜로운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이 세상에 홀로 존재하는 것은 하나도 없더라는 것을 확연히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관세음보살 보문품>에 보면 관세음보살이 갖가지 고통 받는 중생들의 부르는 소리를 듣고 구제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관세음보살님은 결코 외면하는 법이 없습니다. 도적을 만난 사람, 살인자를 만난 사람, 병든 사람, 망망대해에서 폭풍을 만난 사람이 간절히 부르는 소리를 들으면 반드시 구제에 나섭니다. 관계를 닫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관계에 나서는 것이 보살의 자세입니다. 아픔의 소리에 귀를 막고, 눈을 돌리며 외면하는 것이 바로 무자비입니다. 살인자가 섬뜩한 폭력을 휘두르는 것만 무자비가 아닙니다. 또한 보살이 자비를 베풀 때도 그냥 베푸는 것이 아니라 지혜롭게 근기에 맞게 베풀어서 그 사람의 마음을 상하지 않게 하면서 고통에서 헤어나는 자비를 시현합니다. 그러므로 지혜와 자비는 원융한 관계입니다.
이와 같이 지혜로운 사람이 바라본 세상의 본질이 우리는 모두 그물코와 같이 엮어져 있어서 하나의 그물코를 잡고 흔들면 그물 전체가 흔들리듯이 우리의 육신의 형상이 다르고 부모가 달라도 모두 한 몸이기에 동체대비로 바라보게 되고 평등일여를 가르치게 되는 것입니다.
동체대비는 관계의 사상입니다. 서로 아픔과 즐거움을 나누고 관계하는 자비의 실천입니다. 자비로울 때 인생은 풍요로울 수 있습니다. 서로 관계할 때 우리는 행복할 수 있습니다.
지혜의 눈으로 바라보면 계급이나 지위에 의한 차별이야말로 얼마나 어리석은 허상인지 알 수 있다고 선지식들은 말합니다. 그래서 모든 차별상을 부수는 지혜의 과정이 필요하고 다시 평등의 큰 바다로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오신 뜻도 동체대비의 관계를 일깨우고자 함에 있으리라 믿습니다.
부처님께서는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고자 절체 절명의 고뇌에서 시작하여 6년이란 세월 동안 뼈를 깎는 고행을 한 후 마침내 어느 곳에도 걸림이 없는 완벽한 결과물을 찾아, ‘이것이 괴로움이다. 이것이 괴로움의 원인이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이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로 가는 것이다.’ 이렇게 완전하게 깨달았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욕망으로부터, 존재로부터, 무지로부터 완전한 자유를 성취하시고 무상정각을 이루신 자유로운 존재이십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최초로 하신 말씀이 ‘하늘과 땅위에 나 홀로 존귀하다. 삼계중생의 모든 괴로움을 내가 편안케 하리라’입니다.
다시 말해 이 선언은 이 땅에 평등과 평화를 구현하고자 하는 엄청난 표현이 아닐 수 없으며, 생명의 존엄성과 중생의 고통을 구제하시려는 의지의 표현인 것입니다. 즉 인간 해방 더 나아가 중생 해방을 위해 부처님이 이 땅에 오신 뜻을 확고히 밝히신 것입니다.
지금도 그러하듯이 인도 사회는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탄생할 당시에도 사성계급-우리의 역사에서는 양반계급-이 뚜렷하여 평민이나 천민은 종교행사에도 참석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부처님은 사성계급 제도에 의해 브라만교가 누리던 절대적 권위를 단호히 거부하신 것입니다.
또한 사람은 출생에 의해 신분이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행위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라는 것을 강조하신 부분이기도 합니다. 부처님의 평등사상은 무릇 인간만이 아니라 살아있는 생명 즉, 미물에 이르기까지 만 중생이 누려야 할 생명의 존엄성을 말씀하신 것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수행과정에서 평민이나 천민을 막론하고 7가식을 하시며 중생들에게 골고루 복전을 나누어 주셨습니다. 당시에 상위 계급에서는 천민들이 주는 재물은 천박하다고 하여 받지를 않았으나 부처님께서는 이러한 것에 끄달리지 않고 모든 부분을 수용했습니다. 이 부분 또한 모든 중생이 동일한 생명체이며 운명공동체라는 것을 몸소 실천해 보이신 동체대비와 평등사상을 만천하에 공표하신 한 예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동체대비와 평등사상은 부처님과 불교를 믿고 따르는 불교도의 근본적인 사회관이요, 가치관입니다. 불교의 수행은 크게 지혜의 문과 자비의 문으로 대별할 수 있습니다. 지혜와 자비는 수행자에게는 수행의 관문이지만 일반 신자들에게는 삶의 덕목과 같습니다. 따라서 불자들은 지혜롭게 살고자 하고, 자비롭게 살고자 합니다. 부처님을 위시해 역대 조사스님들도 궁극에는 이 지혜와 자비를 거듭 강조하셨습니다.
누구나 행복하기를 원하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들의 일상생활이 행복해지려면 물질적 풍요와 정신적 성숙이 따라야 합니다. 물질적인 풍요만 하더라도 세속적인 욕망 위에 지혜롭게 대처하는 정신적 성숙이 필요합니다. 또 아무리 물질적으로 풍족하게 살더라도 정신적인 면이 성숙하지 못하면 결국 불행해지고 맙니다. 정신적으로 성숙하면 재산도 잘 관리하고, 건강도 잘 지키고, 대인관계도 부드럽고 원만해서 사방에 친구와 조력자로 넘치게 됩니다. 정신적 성숙이 없으면 인생에 평화도 없고 풍요도 없습니다. 모든 생활이 불행하게 전개되는 것은 정신적으로 미숙해서 그런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는 중생계에는 정신적 성숙이 꼭 필요한 것입니다. 이 정신적 성숙이 바로 지혜와 자비의 가르침입니다.
지혜와 자비는 서로 독립적인 가치이면서 또한 상호 원융하는 가치입니다.
부처님은 물론 역대 도를 깨친 선지식의 일화나 어록을 보면 지혜를 깨친 사람들은 한결같이 자비를 강조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지혜가 개인의 마음을 청정하게 하는 개인의 사유에서 비롯된다면 자비는 상호관계에 의해 구현됩니다. 그런데 개인적인 깨침을 위해 모든 관계를 단절하고 오로지 일심으로 정진해 지혜를 깨친 사람들이 깨치고 나면 왜 한결같이 자비를 강조할까요? 그것은 지혜로운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이 세상에 홀로 존재하는 것은 하나도 없더라는 것을 확연히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관세음보살 보문품>에 보면 관세음보살이 갖가지 고통 받는 중생들의 부르는 소리를 듣고 구제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관세음보살님은 결코 외면하는 법이 없습니다. 도적을 만난 사람, 살인자를 만난 사람, 병든 사람, 망망대해에서 폭풍을 만난 사람이 간절히 부르는 소리를 들으면 반드시 구제에 나섭니다. 관계를 닫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관계에 나서는 것이 보살의 자세입니다. 아픔의 소리에 귀를 막고, 눈을 돌리며 외면하는 것이 바로 무자비입니다. 살인자가 섬뜩한 폭력을 휘두르는 것만 무자비가 아닙니다. 또한 보살이 자비를 베풀 때도 그냥 베푸는 것이 아니라 지혜롭게 근기에 맞게 베풀어서 그 사람의 마음을 상하지 않게 하면서 고통에서 헤어나는 자비를 시현합니다. 그러므로 지혜와 자비는 원융한 관계입니다.
이와 같이 지혜로운 사람이 바라본 세상의 본질이 우리는 모두 그물코와 같이 엮어져 있어서 하나의 그물코를 잡고 흔들면 그물 전체가 흔들리듯이 우리의 육신의 형상이 다르고 부모가 달라도 모두 한 몸이기에 동체대비로 바라보게 되고 평등일여를 가르치게 되는 것입니다.
동체대비는 관계의 사상입니다. 서로 아픔과 즐거움을 나누고 관계하는 자비의 실천입니다. 자비로울 때 인생은 풍요로울 수 있습니다. 서로 관계할 때 우리는 행복할 수 있습니다.
지혜의 눈으로 바라보면 계급이나 지위에 의한 차별이야말로 얼마나 어리석은 허상인지 알 수 있다고 선지식들은 말합니다. 그래서 모든 차별상을 부수는 지혜의 과정이 필요하고 다시 평등의 큰 바다로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오신 뜻도 동체대비의 관계를 일깨우고자 함에 있으리라 믿습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