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화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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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기후스님(축서사 선덕) 작성일07-06-18 00:08 조회3,100회 댓글0건본문
내가 예전 한국에 올 때면 가끔 남몰래 살금살금 드나들던 곳이 한 군데 있다. 그 곳은 내외 내외분 넷이서 따스한 인간의 훈기를 안고 사는 내 속가와 좀 먼 인연이 있는 집이다.
풍광이 빼어난 그곳은 뒷산이 반달처럼 동네를 에워싸고 있는데, 산 가득 빽빽하게 들어찬 춘양목 노송들이 봄이면 송화가루를 날려 보내어 툇마루를 누렇게 덮는가 하면 마른 솔잎이 바람에 흩날리기 시작하는 가을이 되면 무더기 송이가 은은한 향기를 내뿜으며 삐죽삐죽 밀치고 올라온다.
전생에 유생이었는지 나는 정자가 있는 아늑한 시골을 좋아한다. 그런 까닭에 내가 살았던 곳마다 좀 높은 곳에 정자를 지었는데, 통도사 서운암에서는 백호등 근처에 통대를 얼기설기 걸치고 난간을 만들어서 한 여름이면 그곳에 올라 시원한 영축산 선들바람을 즐겼고 기림사 북암에서는 작은 냇가 언덕에 원두막을 참하게 지어놓고 보름달이 뜨는 밤이면 달맞이꽃을 보면서 궁상을 떨기도 하였다.
어디 그뿐인가. 호주에 있으면서 절 한 켠 담장 옆에 6각정을 만들어서 6화정이란 이름을 붙이고 다음과 같은 글까지도 송판에 적어 걸어두고 살았던 것을 보면 아마도 전생의 업력이 가는 곳마다 그런 것을 짓게 하는 가 보다.
‘육화정’.
이 정자의 이름은 6화정이다. 그것은 화목의 정신을 일깨우기 위함이니 예부터 화합은 자연의 실상이요 생명의 근원이라, 그것을 회복하면 행복의 문이 열리거니와 잃어버리면 불행의 씨앗을 틔우게 되나니 이에 그 중요한 여섯 가지를 잘 섬겨서 다 같이 복된 길을 찾도록 노력했으면 좋겠다.
그 1은 도덕을 함께 지켜서 믿음을 키울 것이요. 그 2는 상대방의 뜻을 서로 존중해서 각자의 개성을 인정할 것이며 그 3은 이해관계를 분명하게 하여 불신을 제거할 것이고 그리고 4는 몸가짐을 조심해서 신의를 가꿀 것이며 그 5는 말씨를 부드럽게 하여 곡해를 불식시켜야 될 것이요, 그 6은 생각을 맑게 하여 서로 간에 감정을 쌓게 하지 말아야 될 것이니 이 여섯 가지 항목이 화합을 이루게 되는 주춧돌과 같은 것이다. 오가며 인연이 있어 이 정자에 드는 이 이 글을 읽고 심장속에 깊이 새겨서 그리 길지 않을 일생 티없이 밝고 맑게 살아가길 기원하노라.
그 집 역시 6화의 훈기가 곳곳에 배어있어 그 집 마당과 방안에만 들어가도 보여지고 들려지는 것이 이미 화합과 평화를 한껏 잉태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갓과 도포를 입고 찍은 어른들의 빛바랜 사진과 대대로 내려오는 손때 묻은 고가구가 놓여 있어 예와 지금을 이어 안정된 분위기를 뿜어낸다. 퇴근하고 돌아온 아들의 인사말속엔 공경심이 알곡처럼 무게있게 차있고 어른들의 화답속엔 사랑의 눈길 가득하다.
할아버지가 마당을 쓸면 할머니는 마루를 닦고 며느리가 수박을 내오면 서로 잘 익은 부분을 먹으라면서 골라 주고 받는다.
서로를 인정하며 섬기고 살아갈 때 삶의 향기는 곱으로 늘어나고 자애로운 마음으로 아끼고 살 때 행복은 강물처럼 넘친다. 조금 높은 정자에 앉아 좀 더 시야를 넓히면서 인간의 삶을 조망할 수 있는 자기만의 시간을 갖는 것이 소중한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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