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하는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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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철순 작성일06-11-23 17:12 조회3,246회 댓글0건본문
셋/ 기도하는 마음
이철순 (해조음 출판사 대표)
간절히 기도 하고 싶은 날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신심 있는 보살님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해 보는 철야정진 기도에, 삼천배 기도, 백일기도, 관음기도, 지장기도 등등 그 많은 기도 대열에 제대로 서 보지 못했다. 그저 불교 일을 하면서 불교의 테두리 안에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요즘엔 이런 일반적인 기도와는 조금 다른, 아주 현실적인 부분에 대해서 기도하는 마음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내 사무실 근처에 제법 규모가 큰 사찰이 하나 있다. 지난해 그 사찰은 기존의 단층집을 헐고 1년 넘게 걸려 지하 1층, 지상 4층 규모의 도심 속 대형 포교당을 완성해 낙성식을 눈앞에 두고 있다. 큰 사찰을 짓느라 그동안 이웃의 눈치도 보았을 것이고 불사 동참을 위해 사부대중이 힘을 모았음은 당연지사다.
나는 아침저녁으로 그 사찰을 지날 때마다 한 편으로는 뿌듯한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동안은 주택가 속 골목에 자리 잡고 있어서 사찰을 찾기도 어려웠는데 이제 제법 먼 곳에서도 쉽게 눈에 뛸 만큼 우뚝 솟은 중심 건물이 되어 사람들의 눈길을 끈다. 웅장한 법당 규모만 봐도 왠지 어깨가 으쓱거려지고 처마 끝에 새겨진 오색 찬란한 단청들을 보노라면 절로 신심이 우러나는 것이다. 그곳에 사는 이웃 주민들도 불편했던 감정들을 접고 내심 반기는 분위기인 걸 보면 불자의 한 사람으로서 자긍심이 느껴지곤 한다.
그런데 이런 자랑스러운 사찰의 모퉁이를 다 지날 때쯤이면 다른 한 편으로는 걱정이 생기기도 한다. 혹여 이렇게 멋지게 잘 지어진 큰 사찰에 사람들이 많이 모이지 않으면 어쩔까, 대형 사찰이라 부담스러워하지는 않을까 하는 등의 우려가 가슴 한 켠에서 슬금슬금 삐어져 나오게 되는 것이다. 그러다 마침내 사찰을 보다 효율적으로 운영할 수는 없을까 하는 고민으로까지 생각이 미치면 새롭게 잘 지어진 사찰이 주는 벅찬 기쁨보다 가슴이 답답해져 옴을 느낄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나는 기도해 본다. 사찰만 큰 게 아니라 그 안에 담겨질 내용들도 크고 멋지기를. 또 사찰의 규모만큼이나 많은 사부대중이 불법의 품안에서 행복하기를 말이다.
21세기는 보다 전문적이고 다양한 것을 요구하고 있음은 누구나 인식하고 있다. 덩치만 큰 사찰보다 오히려 불교를 이미지화하고 문화로 승화시켜 누구나 가까이 느낄 수 있도록 하는 그런 측면을 더욱 요구하고 있는 게 사실이다. 그러려면 보다 전문적이고 체계적인 일을 할 수 있는 전문인이 필요하리라.
불법을 잘 수호하고 널리 전파하기 위해서는 새롭게 사찰을 짓고 불상을 모셔 대법당을 건립하는 일이 꼭 필요한 일임에는 틀림없다. 하지만 미래지향적 불교는 사찰 규모에 버금가는 사찰 운영 콘텐츠 개발과 인재 양성에 더욱 힘을 쏟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시대에 맞는 불교로 새롭게 변하지 않으면 불교가 설 자리는 자꾸만 좁아질 것이기 때문이다.
불자의 한 사람으로서 내가 꿈꾸는 기도는 적어도 우리의 삶 속에서 살아있는 불교가 되게 하는 것이다. 물론 부처님의 그 고결하고 자상한 가르침은 우리 삶 속에 언제나 함유되어 있다. 그래서 불교는 언제나 살아서 꿈틀거린다. 그러나 그것을 모르고 사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다. 그래서 그 미망의 어두운 터널을 빠져나오기 위해 우리는 다양한 형태의 도구를 찾아내고 방편을 찾아내고, 길을 안내해 줄 안내자를 찾는 것이다. 그러나 손에 딱 잡히는 도구, 머리와 가슴에 탁하고 와 닿는 방편, 훌륭한 안내자를 만나는 것이 그리 쉽지 않다. 그것의 실현으로 불교와 문화와의 접목을 시도해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불교는 무궁한 문화의 보고다. 그러나 크고 우람한 불교 건물만으로 불교를 다 표현할 수는 없다. 그 안에 담긴 작고 섬세하며 고유한 문화를 실타래 뽑듯이 뽑아낸다면 분명 불교는 대중과 함께하는 문화로 자리매김할 수 있을 것이다.
문득 얼마 전 어느 젊은 스님께서 툭 내뱉은 한 마디가 생각난다. 평소 자신의 전문 분야를 개발해 불교 포교와 접목시켜 열심히 활동하시는 분이었는데 스님의 말씀이 그만 나의 가슴에 꽂히고 말았다.
“보살님, 요즈음은 불교라는 이름을 걸고 사회적으로 활동하려고 하니 왜 그렇게 걸리는 게 많지요.”
불교가 얼마나 대중과 멀어져가는 지를 짐작케 하는 말씀이다. 그래서 스님은 불교라는 용어를 잘 풀어서 쓰면서 불교 활동을 해야 그나마 대중들에게 어필할 수 있다고 부언 설명하셨다. 불교라는 이름으로 뭔가를 이루려니 잘 안 된다는 씁쓸한 말씀은 두고두고 생각의 여지를 남겼다.
불교가 늙고 고루한 것이라는 일반인들의 인식을 불식시키려면 분명 불교는 젊어져야 한다. 불교가 젊어져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질수록 미래의 새로운 불교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를 먼저 고민해야 한다는 말이다.
깊은 산 속의 절도 다양한 문화행사를 개최하며 대중 곁으로 다가오고 있고, 인터넷이나 여타의 매체를 통해 산문 안의 소식을 밖으로 전달한다. 수행공간으로서의 엄숙함과 품격을 유지하는 것 외에, 대중 곁에서 호흡하며 그들 속으로 불교의 기운을 불어넣는 것도 불교계 전체의 몫이 아니겠는가.
미래를 향한 새로운 불교수행체를 꿈꾸며 젊은 불교의 청사진을 그리는 어느 신행단체의 ‘수행하는 불자, 보시하는 불자, 포교하는 불자’라는 슬로건을 다시 한 번 음미해 보며, 나는 오늘 또 하나의 대작 불사가 이루어진 사찰 현장에서 찬란한 불교가 새롭게 태어나고 다양한 불교문화가 꽃피기를 기도해 보는 것이다.
내 남편 사업이 승승장구 하기를 바라거나, 아들들이 공부 잘 하기를 기도하는 일보다 더 간절한 나의 기도이다.
이철순 (해조음 출판사 대표)
간절히 기도 하고 싶은 날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신심 있는 보살님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해 보는 철야정진 기도에, 삼천배 기도, 백일기도, 관음기도, 지장기도 등등 그 많은 기도 대열에 제대로 서 보지 못했다. 그저 불교 일을 하면서 불교의 테두리 안에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요즘엔 이런 일반적인 기도와는 조금 다른, 아주 현실적인 부분에 대해서 기도하는 마음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내 사무실 근처에 제법 규모가 큰 사찰이 하나 있다. 지난해 그 사찰은 기존의 단층집을 헐고 1년 넘게 걸려 지하 1층, 지상 4층 규모의 도심 속 대형 포교당을 완성해 낙성식을 눈앞에 두고 있다. 큰 사찰을 짓느라 그동안 이웃의 눈치도 보았을 것이고 불사 동참을 위해 사부대중이 힘을 모았음은 당연지사다.
나는 아침저녁으로 그 사찰을 지날 때마다 한 편으로는 뿌듯한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동안은 주택가 속 골목에 자리 잡고 있어서 사찰을 찾기도 어려웠는데 이제 제법 먼 곳에서도 쉽게 눈에 뛸 만큼 우뚝 솟은 중심 건물이 되어 사람들의 눈길을 끈다. 웅장한 법당 규모만 봐도 왠지 어깨가 으쓱거려지고 처마 끝에 새겨진 오색 찬란한 단청들을 보노라면 절로 신심이 우러나는 것이다. 그곳에 사는 이웃 주민들도 불편했던 감정들을 접고 내심 반기는 분위기인 걸 보면 불자의 한 사람으로서 자긍심이 느껴지곤 한다.
그런데 이런 자랑스러운 사찰의 모퉁이를 다 지날 때쯤이면 다른 한 편으로는 걱정이 생기기도 한다. 혹여 이렇게 멋지게 잘 지어진 큰 사찰에 사람들이 많이 모이지 않으면 어쩔까, 대형 사찰이라 부담스러워하지는 않을까 하는 등의 우려가 가슴 한 켠에서 슬금슬금 삐어져 나오게 되는 것이다. 그러다 마침내 사찰을 보다 효율적으로 운영할 수는 없을까 하는 고민으로까지 생각이 미치면 새롭게 잘 지어진 사찰이 주는 벅찬 기쁨보다 가슴이 답답해져 옴을 느낄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나는 기도해 본다. 사찰만 큰 게 아니라 그 안에 담겨질 내용들도 크고 멋지기를. 또 사찰의 규모만큼이나 많은 사부대중이 불법의 품안에서 행복하기를 말이다.
21세기는 보다 전문적이고 다양한 것을 요구하고 있음은 누구나 인식하고 있다. 덩치만 큰 사찰보다 오히려 불교를 이미지화하고 문화로 승화시켜 누구나 가까이 느낄 수 있도록 하는 그런 측면을 더욱 요구하고 있는 게 사실이다. 그러려면 보다 전문적이고 체계적인 일을 할 수 있는 전문인이 필요하리라.
불법을 잘 수호하고 널리 전파하기 위해서는 새롭게 사찰을 짓고 불상을 모셔 대법당을 건립하는 일이 꼭 필요한 일임에는 틀림없다. 하지만 미래지향적 불교는 사찰 규모에 버금가는 사찰 운영 콘텐츠 개발과 인재 양성에 더욱 힘을 쏟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시대에 맞는 불교로 새롭게 변하지 않으면 불교가 설 자리는 자꾸만 좁아질 것이기 때문이다.
불자의 한 사람으로서 내가 꿈꾸는 기도는 적어도 우리의 삶 속에서 살아있는 불교가 되게 하는 것이다. 물론 부처님의 그 고결하고 자상한 가르침은 우리 삶 속에 언제나 함유되어 있다. 그래서 불교는 언제나 살아서 꿈틀거린다. 그러나 그것을 모르고 사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다. 그래서 그 미망의 어두운 터널을 빠져나오기 위해 우리는 다양한 형태의 도구를 찾아내고 방편을 찾아내고, 길을 안내해 줄 안내자를 찾는 것이다. 그러나 손에 딱 잡히는 도구, 머리와 가슴에 탁하고 와 닿는 방편, 훌륭한 안내자를 만나는 것이 그리 쉽지 않다. 그것의 실현으로 불교와 문화와의 접목을 시도해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불교는 무궁한 문화의 보고다. 그러나 크고 우람한 불교 건물만으로 불교를 다 표현할 수는 없다. 그 안에 담긴 작고 섬세하며 고유한 문화를 실타래 뽑듯이 뽑아낸다면 분명 불교는 대중과 함께하는 문화로 자리매김할 수 있을 것이다.
문득 얼마 전 어느 젊은 스님께서 툭 내뱉은 한 마디가 생각난다. 평소 자신의 전문 분야를 개발해 불교 포교와 접목시켜 열심히 활동하시는 분이었는데 스님의 말씀이 그만 나의 가슴에 꽂히고 말았다.
“보살님, 요즈음은 불교라는 이름을 걸고 사회적으로 활동하려고 하니 왜 그렇게 걸리는 게 많지요.”
불교가 얼마나 대중과 멀어져가는 지를 짐작케 하는 말씀이다. 그래서 스님은 불교라는 용어를 잘 풀어서 쓰면서 불교 활동을 해야 그나마 대중들에게 어필할 수 있다고 부언 설명하셨다. 불교라는 이름으로 뭔가를 이루려니 잘 안 된다는 씁쓸한 말씀은 두고두고 생각의 여지를 남겼다.
불교가 늙고 고루한 것이라는 일반인들의 인식을 불식시키려면 분명 불교는 젊어져야 한다. 불교가 젊어져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질수록 미래의 새로운 불교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를 먼저 고민해야 한다는 말이다.
깊은 산 속의 절도 다양한 문화행사를 개최하며 대중 곁으로 다가오고 있고, 인터넷이나 여타의 매체를 통해 산문 안의 소식을 밖으로 전달한다. 수행공간으로서의 엄숙함과 품격을 유지하는 것 외에, 대중 곁에서 호흡하며 그들 속으로 불교의 기운을 불어넣는 것도 불교계 전체의 몫이 아니겠는가.
미래를 향한 새로운 불교수행체를 꿈꾸며 젊은 불교의 청사진을 그리는 어느 신행단체의 ‘수행하는 불자, 보시하는 불자, 포교하는 불자’라는 슬로건을 다시 한 번 음미해 보며, 나는 오늘 또 하나의 대작 불사가 이루어진 사찰 현장에서 찬란한 불교가 새롭게 태어나고 다양한 불교문화가 꽃피기를 기도해 보는 것이다.
내 남편 사업이 승승장구 하기를 바라거나, 아들들이 공부 잘 하기를 기도하는 일보다 더 간절한 나의 기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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