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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호및지난호

참선공부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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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작성일06-11-23 17:08 조회2,95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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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선공부의 시작



사람들은 모두 금을 소중히 여깁니다. 산에 묻혀 있는 금광석은 잡철이 섞여 있어 정금을 하지 않은 그 자체로서는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불성이란 것도 광산에서 파내지 않은 금과 마찬가지로 번뇌 망상 속에 뒤섞여 있어서 그대로는 부처님의 모습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광부가 땀을 흘리면서 광사에서 금을 파내어 용광로에 녹이고 자꾸 정금을 해서 일단 완전히 금이 되고 보면 어떻습니까? 비녀도 만들고 가락지도 만들고 술잔도 만들고 온갖 것을 만들어도 그 금은 변함없이 소중한 금이지요. 비녀를 만든다고 해서 금이 변하는 것이 아니라 다 금입니다. 이렇게 해서 한 번 금이 되면 다시 돌 속에 버려져 섞이지 않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이제 불성을 찾아 한 번 깨치고 보면 성을 내도 그 자리요, 울어도 그 자리요, 모든 행동이 그대로 그 자리입니다. 그러니까 부처의 그 자리를 한 번 얻어놓으면 탐진치로 얽혀 있는 그 생사 속에 막 뛰어 들어서 중생과 똑 같이 생활하여도 조금도 상함이 없는 그러한 생활을 할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이 불교사상입니다.
그러니 이 불교는 다른 데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일상적인 정치 경제 문화 등 인간생활 속에 불교가 살아있는 것이지 불교의 진리란 따로 어디 선반에 묶어 둘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한 마디로 이 세상에서 우리 모두 행복하게 잘 살 수 있는 그 길을 선택해 나가자는 것이 불교입니다. 사실 누구에게 물어봐도 세상 사람들의 목적은 다 똑같습니다. 누구 하나 자신의 인생을 함부로 살겠다는 사람은 없습니다. 모두가 잘 살려고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모두 잘 살려고 하는데 왜 잘 못살고 서로 부딪치고 괴로워하느냐 하면 불교의 근본이치를 모르고 욕망을 쫓기 때문입니다.
남을 해치고 어떻게 자기가 잘 살아지고 물건을 부수고 남과 다투면서 어떻게 자기에게 복이 돌아오고 잘 살아지겠습니까? 남을 해치고 남을 원망할 때 그만한 물질도 손해보거니와 남을 해치는 그 순간에 이미 자기 마음부터 벌써 악의 가시가 돋치고 마음이 악해져 버리니 그야말로 자신에게 올 복까지도 깎아먹게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잘 살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잘 사는 길, 행복하게 사는 길을 제시하신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입니다. 잘 살 수 있는 방법은 모르면서 저마다 잘 살려는 목적만 달성하려는 것이 오늘날의 현실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곳에 가려한다 해도 그 길을 모르면 잘못된 길로 들어서서 가시밭을 헤매다 옷도 찢기고 살도 긁히고 얼마 나아가지도 못하면서 애만 먹기 쉽습니다.
우리 중생이 잘 살 수 있는 정당한 길 즉, 우주의 공도, 진리를 비켜두고 욕망의 가시밭길을 기어다가 보니 엎어지고 자빠져서 불행해지고 온갖 병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중생들이 사는 모습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이것을 측은히 여겨 가지가지 방편으로 팔만사천법문을 명시하셨지요.
오늘날 이 사회가 물질은 상당히 풍요롭지만 어지럽고 못 살게 된 것은 정신이 병들어서입니다. 사실 오늘날처럼 정신이 빈곤한 시대는 일찍이 없었습니다. 잘 사는 사람은 누가 빼앗을까봐 항상 신경을 곤두세우면서 살풍경을 이룹니다.
인간이 살아가려면 물질이 필요하지만 물질이 곧 인간을 행복하게 해 주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우리가 이 정신 상태만 고치면 이보다 훨씬 가난하게 살아도 풍부하게 사는 세계가 열립니다. 참다운 눈을 뜨고 정신을 차려 행복하게 사는 것이 불교의 선사상입니다.
따라서 이 선이란 것은 어디 다른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생활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아무리 금쪽같은 진리라 하더라도 일상생활을 여의고는 우리 인간에게 하등의 이익이나 상관이 없습니다. 일상생활에서 손 움직이고 발 움직이고 울고 웃고 이웃 간에 항상 대화하는 그 속에서 24시간 불교를 찾는 생활, 그것이 선입니다.
선을 닦으면 항상 마음에 여유가 있어 누가 욕한다고 하더라도 내 마음 저 깊은 곳에 그것이 닿지를 않습니다. 어떠한 경계라도 내 마음의 문 밖에서 얼씬거릴 뿐이지요. 누가 아무리 부아를 내도 씩 웃을 수 있고 오히려 ‘저 사람이 얼마나 속이 답답하고 괴로우면 저렇게 부아를 낼까’하는 동정심을 갖게 됩니다. ‘네가 아직도 그렇게 헤매니 참 불쌍하구나.’하는 동정심이 생기는데 어떻게 맞장구를 치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항상 선생활을 할 때에 비로소 이 세상에서 아주 원만하고 풍족하고 여유있게 살아갈 수 있으며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복되고 힘찬 날들이 됩니다. 이렇게 생활에 여유가 있고 멋지게 살아갈 수 있는 인생관, 그것이 이 선이 아니고는 찾아볼 수가 없는 기쁨이지요. 우리가 그런 기쁘고 바른 인생관을 확보하려면 항상 가나오나 24시간 선을 해야 합니다.
만약 선하는 태도가 삐뚤어져 버리면 온갖 경계가 나를 침범해 들어옵니다. 그러나 평소에 선을 해서 내 중심을 딱 가지고 있다면 비록 내 목숨을 빼앗아 가는 경계가 온다 하더라도 태연자약하게 대처할 수 있는 그런 지혜가 생깁니다. 이런 점에 불교의 위대한 이치가 있는 것이지 무슨 신통력을 부리거나 신기하고 묘한 이치를 말하는 게 불교가 아닙니다. 이렇듯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자기 인생을 밝혀가는 그 방법이 바로 선이고 수행입니다.
그러나 선은 이론으로 설명되는 것이 아닙니다. 큰스님들이 ‘할’ 하고 방망이질을 하는 것이 무슨 이론이 모자라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 그 언저리 깊고 깊은 곳을 찌르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대번에 알아차리면 되는데 그렇지 못할 때는 부득이 이야기를 하는 것이니, 스스로 알아차리지 못하면 종일 이야기해도 모자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법이라도 알아듣지 못하면 그것은 법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제 그 법을 알아듣게 하기 위해서 그 자리까지 올려야 되는데 그것은 하루아침에 되는 것이 아닙니다. 꾸준히 노력해야 됩니다. 따라서 정진을 하다가 안 된다고 포기해 버려서는 안 됩니다. 자꾸 하다보면 몇 달 동안이나 해도 안 되던 것이 찰나에 되는 이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쉽게 획득하려 하지 말고 꾸준히 정진해야 합니다.

- 서암 스님 법문집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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