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 깨달음을 향한 참된수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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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운 스님(동화사 강주) 작성일07-02-25 21:57 조회3,149회 댓글0건본문
1. 이것은 괴로움이요, 이것은 괴로움의 해결이다.
깨달음을 향한 참된 수행에 대하여 원고 청탁을 받았을 때 지금 우리나라의 수행법에 대하여 생각해 보았습니다. 외국으로부터 들어온 갖가지 기공수련법과 수행법들 그리고 국내의 많은 수행과 수련법들 속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혼란을 겪을까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명백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모든 중생들의 괴로움을 해결합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나는 오직 한 가지를 알려줄 따름이니 괴로움과 괴로움의 소멸이니라”(중부경 22)라고 하셨습니다. 괴로움에는 여러 유형이 있는데, 이들 괴로움들은 감각적인 괴로움, 무너짐에서 오는 괴로움, 무지에 의해 일어나는 괴로움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감각적 괴로움이란 육체적인 것을 말합니다. 무너지는 데서 오는 괴로움은 명예나 지위, 아끼는 물건의 파손 등에서 오는 괴로움입니다. 무지에서 오는 괴로움이란 새끼줄을 보고 뱀으로 착각하듯이 진실을 보지 못하고 착각에 의해 일어나는 괴로움입니다.
2. 한 생각 일어난 순간이 삶의 전부이다.
괴로움은 탐욕과 성냄, 어리석음 등의 번뇌로부터 일어납니다. 번뇌란 생각입니다. 좋은 생각은 몸과 마음을 가볍고 편안하게 하지만 좋지 않은 생각들은 몸과 마음을 괴롭힙니다. 이러한 번뇌의 이면에는 자아관념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느낌이나 감정, 생각에는 꼭 ‘나’라는 생각이 들어가 있습니다.
대승기신론에 의하면 아리야식(阿梨耶識)에서 주객으로 나누어지기 전의 미세한 움직이는 마음이 무지의 모습이라고 합니다.
무지의 힘을 받아 나타나는 자아는 마음이 고요해진 선정상태거나 깨어있는 반야지혜의 마음상태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생각이 일어날 때 자아관념이 고개를 듭니다. 결과적으로 괴로움이란 아뢰야식이라는 아주 미세한 생각인 무지로부터 일어났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생각을 어떻게 다스리느냐가 문제입니다.
이 생각들이 바로 모든 행위와 사건을 일으키고 세간을 조작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지금 이 순간순간 일어나는 생각을 어떻게 닦느냐가 바로 수행입니다.
3. 바른 깨달음과 참된 수행이란
참된 수행에 대하여 말하는 것은 그릇된 수행이 있기 때문입니다. 수행에 있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중생에 대한 괴로움의 자각과 염리심(厭離心), 그리고 자비심과 보리심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른 견해와 주의집중과 관찰의 지혜로 정념이 있어야 합니다.
괴로움에 대한 자각과 염리심이 없이 수행하는 것은 어떤 명리목적에 의해서 하는 것입니다. 이는 자비심과 보리심을 가리기 어렵습니다. 설령 자비심과 보리심이 일어났다고 해도 바른 견해에 의지하지 않으면 그 수행의 과정과 결과는 삿될 수 밖에 없습니다. 바른 견해를 가지고 있다면 주의집중과 관찰의 지혜인 정념에 의해 바른 깨달음을 얻는 참된 수행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수행에는 다섯가지 심리가 있습니다. 이를 오별경심소(五別境心所)라고 하는데 특별한 경계를 만났을 때 작용합니다. 즉 욕(欲)·승해(勝解)·염(念)·정(定)·혜(慧)입니다. 이를 통해 깨달음을 향한 참된 수행에 대해 이야기 해보고자 합니다.
수행하려는 마음은 욕(欲)심리입니다. 괴로움을 자각하고 염리심에 보리심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하지만 보리심을 일으켰다고 해서 곧장 수행의 길로 들어설 수 없습니다. 가는 길을 명확하게 알아야 합니다. 즉 바른 견해에 의지했을 때 수행의 바른 길을 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통해 우리에게 일어난 한 생각의 본질을 명확히 아는 것을 승해(勝解)라고 합니다. 무엇보다도 수행의 바른 잣대가 되는 것도 승해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의 핵은 연기법(緣起法)입니다. 유정무정 모든 존재는 바로 연기한다는 것입니다. 이 연기법은 시간적으로 끊임없이 변하는 무상이요 연기에는 자아와 실체가 결여되어 있어 실재하는 것은 없으므로 공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연기, 무아, 공은 다 같은 뜻으로 유와 무가 아닌 중도(中道)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연기의 생멸인연의 현상적인 측면은 위빠사나(觀)에 의해 파악되며 본질적인 측면은 사마타(止)에 의해 파악됩니다. 지와 관은 모두 관(觀)입니다.
그리고 모든 생각과 마음은 모두 연기입니다. 그래서 위빠사나와 사마타 수행으로 생각의 본질을 파악하여 미세망념까지 타파해 갑니다. 무지의 타파는 선정을 얻을 수 있는 진언수행이나 관상수행으로 되지 않습니다. 불법학습을 통해 연기, 공, 무아, 무상을 철저히 이해해야 되며 이 이해를 바탕으로 실재 수행에 들어가서 미세망념인 무지를 타파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유무(有無)라는 잘못된 견해를 근본으로 하는 수행은 지(止)수행으로 바른 선정을 얻을 수 없으며 관(觀)수행으로 지혜를 얻을 수 없습니다. 곧 삿된 수행과 삿된 깨달음을 얻을 것입니다.
그러나 정념으로 관하는 이 관은 마치 불빛과 같아서 대상을 남김없이 비추면서 동시에 불빛의 근원인 등불자체를 비춥니다. 따라서 주객이 모두 무아이며 공으로 드러나 모든 존재가 인드라망과 같은 연기실상이 드러나므로 허무주의와 절대주의가 지관수행 중에는 없습니다.
지관수행을 통해 이전에는 칭찬하는 소리나 싫은 소리를 들으면 들떴던 마음이 없어지게 됩니다. 마음의 들뜸이 없어진 상태를 정(定)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우리 생각에 불변인 그 무엇이 있을 것 같았던 그런 것이 없음을 알게 됩니다. 있다가 사라지는 것을 관찰하면서 지금까지 고집하고 소유하고 있는 것들이 없어집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공(空)의 흐름을 보게 되는 것이 혜(慧)입니다. 이렇게 오별경심소 중에 그 중심은 바로 정념수행입니다. 이 정념의 지관수행에 의해 최종적으로 미세망념인 무지가 타파되어 온전한 깨달음을 이루는 것입니다.
참된 수행이란 유무를 근거하지 않고 바로 연기공을 바른 견해로 지관수행하는 것이 참된 수행이며 부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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