셋 깨달음, 그 장엄한 자리
페이지 정보
작성자 김옥자 작성일07-02-25 21:56 조회3,069회 댓글0건본문
불자로서 깨달음에 이르는 길은 어떤 것이 있는가?
이 물음에 저는 그만 말문이 막히고 말았습니다. 그 많은 부처님의 말씀을 얼마나 많은 곳에서 들었고, 얼마나 많은 책자에서 보았던가요? 그런데도 단 한 줄의 글도 쓸 수가 없어 몇 날을 끙끙거린 것은 부처님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아니면, 내 마음의 불심(佛心)이 아직도 참 불심이 아니란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부처님을 모르던 시절에는 그 존귀한 가르침과 믿음을 얼마나 가볍게 보았는지 모르겠습니다. 법당에서 절하는 불자들의 모습까지도 이상하게 보였던 젊은 시절이 있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도 부끄럽고 민망하여 새벽마다 108참회를 하며 아상(我相)을 눈물로 지워냅니다.
언젠가 통도사에서 불이문(不二門)을 보고 왜 불이문일까 하는 궁금증이 일어난 기억이 있습니다. 여기 저기 문이 많기만 한데 두 개가 아니고 하나라고 하니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습니다. 이것이 부처님 궁전에서 처음으로 느꼈던 무지하고 어리석었던 저의 한 생각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저에게 큰 의문이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스님께 여쭈어 보았습니다.
“스님, 불교에서 말하는 법(法)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그런데 열심히 말씀하시는 스님의 설명을 도저히 알아들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처럼 자상한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니 귀머거리와 다름이 없었습니다. 이 의문을 풀고 싶어 문을 두드린 곳이 통신대학이었습니다. 불교의 기본교리를 공부하고 나서야 ‘내가 어리석고 불쌍한 중생이구나! 아이고, 어쩌면 좋아’하는 생각이 물밀듯 밀려오는 것이었습니다.
마음법을 모르면 십 수 년의 학력(學歷)도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육바라밀 가운데 한 가지 계율도 실천하지 못하고, 남의 가슴에 못질만 하여 자국을 남겨놓았던 지난 날을 참회할 뿐이었습니다.
제가 배운 불교는 우주의 모든 것을 담고 있었습니다. 4차원의 미세한 과학 세계를 담고 있었고, 심오한 철학적 세계가 녹아있었습니다. 의심을 사랑하라는 선(禪)의 미로(迷路)에 정신이 아득해졌고, 팔정도(八正道)의 가르침에 놀라고 또 놀라 밤새워 새벽까지 외웠습니다.
내 생애 가장 보람 있고 위대한 일이라 생각하고 스스로 행복해하는 것은 부처님을 친견하는 일입니다. 그리하여 세세생생 부처님을 사랑하며 살리라 다짐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일까요. 부처님 존재의 실상을 의심했던 지난 날의 전도된 망상들이 큰 죄업으로 느껴지니 말입니다.
교사불자들의 모임인 청림회와 인연이 닿은 것 역시 저에게는 큰 행운이었습니다. 거기서 저는 법화경을 배우게 됐습니다. 부처님 말씀의 꼭지점이라 불리는 법화경은 깨달음으로 가는 길에 더없이 밝은 빛이 되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아름다운 영취산에서 한량없는 자비심으로 중생들을 위해 법화경을 설하셨습니다. 탐진치에 절어 있는 어리석은 중생들에게 설법하시는 동안 얼마나 답답하고 가슴 칠 때가 많으셨을까요.
진정한 불자란 자기 마음을 아는 자, 마음을 다스릴 줄 아는 사람일 것입니다. 불교의 마음을 논파한 유식학은, 오늘날 시공을 초월하는 초과학적 심리적 입문서, 프로이드의 잠재의식론이나 융의 무의식 세계론이 감히 따라갈 수 없는 세계였습니다. 본래 마음자리를 확연히 꿰뚫어야 하는 그 세계에 비하면 서양의 학문은 티끌만한 이론들에 불과했습니다.
유식의 백미인 아라야식은 삼세를 담는 마음의 창고입니다. 마음의 창고에 있는 나를 찾아 가는 길이 깨달음으로 가는 길일 것입니다. 이 길은 사람마다 각기 달라 부처님은 이것을 아시고 팔만사천가지의 다양한 말씀을 중생들의 가슴에 보석처럼 달아 주시려고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우주광명의 법(Dharma)을 보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이 법 속에 사는 우리는 매 순간을 알차게 잘 가꾸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실상은 그렇지가 못합니다. 마음 한 번 잘 쓰면 얼마든지 인생을 바꿀 수 있고 향상의 세계로 나아갈 수 있지만,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은 이것을 방해합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마음을 잘 쓰고 깊은 신심으로 참회하여 업장을 녹이면 새로운 모습으로 탈바꿈하여 마침내 깨달음을 이룰 수 있게 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갈대 같은 중생들은 자기 마음을 제어하지 못해 고통의 바다를 헤매고 다닙니다.
마음의 고통 바다를 헤치고 나갈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법(法)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그토록 법을 바로 보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이 법이 바로 불법(佛法)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자신 속의 또 다른 자신을 찾아 삼매(三昧)의 강을 건너라 하고, 차(岸)에서 피(岸)의 강을 건널 때는 용맹정진 다리를 건너라 하셨습니다. 형편 따라 능력 따라 나에게 맞는 방편을 선택하여 부단하게 수행정진 하는 것이 ‘등정각’을 이루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법이 옳거든 부지런히 수행하고, 수행하면 마음이 안정되어 지혜가 일어나 의심이 없어지니 이것이 바로 육바라밀입니다. 그래서 불자는 깨달음에 이르기 위해 팔정도와, 육바라밀을 반드시 실천해야 합니다. 참선도, 108배도, 염불도 모두가 깨달음에 가까이 가기 위한 방편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欲爭佛土 맑고 깨끗한 불국토를 원하거든
當爭其心 스스로 그 마음을 깨끗이 하라
隨其心爭 마음이 맑고 깨끗해짐에 따라
卽佛土爭 불국토도 맑고 깨끗해지느니라”
- 유마경 불국토품 -
깨달음의 길은 사바세계를 불국토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불자가 걸어가야 하는 길은 오로지 깨달음의 길이어야 합니다. 그 깨달음의 길은 오직 일성불(一佛成)에 있다 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 길을 가기 위해 얼마만큼의 참 삶을 살며, 얼마만큼의 노력을 하고 있을까요.
인연법(因緣法)을 알고 내세(來世)를 안다면 어찌 물처럼 흘러가는 하루하루가 아깝지 않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칼날같은 이 순간을 오로지 행(行)을 통한 깨달음으로 일불성(一佛成)을 이루어야 할 것입니다.
아 ! 부처님, 감사합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