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과 발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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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작성일07-02-25 21:50 조회3,058회 댓글0건본문
수행과 발심
불도에 들어가는 데는 발심이 있어야 한다. 자동차가 움직이려면 먼저 시동을 걸어야 되는 것처럼 번뇌에 억눌려 있는 마음을 크게 한 번 일으켜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경전을 표지판으로 해서 길고도 험난한 마음의 고향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것이 중생이 살아가는 이상이며 목적이다.
첫 번째 발심은, 믿음은 반드시 성취된다는 발심이다. 그 믿음은 절대적이어야 한다. 호리만큼의 의혹심도 있어서는 안 된다. 칼을 든 외과의사에게 전신을 다 내맡기듯이 믿음속에 모든 것을 맡겨놓아야 한다. 그때 그들은 천인의 공양과 찬탄을 한꺼번에 받게 될 것이며 모든 현인과 성인들이 줄을 이어 이마를 만져주시며 장하다 할 것이고, 대승의 십지보살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어 그 믿음이 장도에 오르는 수행자를 격려해 줄 것이다.
물이 얼면 단단해져 각을 이룬다. 인간이 갖고 있는 불성이 죄업에 묶이면 각자의 개성인 모양을 이룬다. 그 모양이 천차만별의 인간 모습이다. 그러므로 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모이면 언제나 부딪치고 깨진다.
이 모양을 가지고서는 심원의 바다로 절대로 흘러 들어갈 수 없다. 그 모양을 녹여야만 자연적으로 물의 바탕인 바다로의 회귀가 가능하다. 이 녹이는 작업이 바로 수행인 것이다.
부처와 중생의 마음도 근원적으로 분리되어 있지 않다. 언제나 물의 체성과 같이 더불어 이어져 있다는 것이다. 바다가 모든 물줄기를 흡입하듯이 부처도 중생의 근본 마음을 부처의 근원으로 끌어당기고 있다. 그러므로 불신의 마음을 가지고 그분께 버티어 설 필요는 없다. 그분은 우리와 함께 호흡하고 우리와 함께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부처와 중생의 근본 마음은 허공의 성품처럼 완전히 동일하다. 바다가 오염된 물을 자체 정화하듯이 부처도 불해(佛海)에 들어온 중생들의 혼탁한 마음을 자체 정화하기 위해 중생을 제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중생이 있는 한 그분은 언제나 중생과 함께 살아 숨쉴 수 밖에 없다.
그와 같이 우리도 중생들의 몸과 분리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그들에게 무한한 자비심을 베풀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한 마음을 가져야만이 부처의 마음에 장애 없이 유입될 수 있는 길이 트이기 때문이다.
두 번째 발심은, 알고 행하는 발심이다. 알지도 못하고 무조건 믿기만 하면 미신에 빠진다. 자기 자신이 가야할 방향을 제대로 잡지 못하고 믿음만으로 밀어붙이는 돌진은 위험하다. 완급을 조절하고 강약을 잘 다스려 주어진 목적지로 차근차근하게 나아가야 한다.
자기마음을 제어하는 데에는 미숙하기 이를 데 없다. 그러므로 세련되게 나아가기까지에는 초보자다운 조심성과 신중함이 언제나 요구된다. 잘못하다가는 평생을 힘들게 수행해도 그 결과는 정반대의 극점에 도달하게 되어 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우리는 소득이 없이 힘만 소비한 수행[勞修]이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먼저 경전을 잘 이해하고 자기의 역량을 충분히 점검한 뒤에 근기에 맞는 수행으로 나아가야 한다. 맹목적인 오기와 열의로 호기를 부릴 때는 곧 방향을 잃고 몸과 마음이 병들어 버린다는 것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세 번째 발심은, 깨닫기 위한 발심이다. 수행의 목적은 깨달음에 있다. 그 목적이 분명하게 정해져 있지 않으면 중도에서 한없이 배회하게 된다. 수행은 단시일 내에 완공되는 건축공사가 아니다. 그것은 전 생애를 통틀어 투자해도 모자랄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 공파 스님 ‘바이로차나’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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