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도하지 말고 그냥 함께 하라, 힘은 저절로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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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작성일06-11-23 17:02 조회3,019회 댓글0건본문
의도하지 말고 그냥 함께 하라, 힘은 저절로 흐른다
로스엔젤레스에서 열렸던 수련회에서의 일이다.
수련회가 끝나자 참석했던 한 화가가 내게로 와 “달과 꽃을 아름답게 그리고 싶습니다. 그것들을 어떻게 바라보는 것이 좋을까요?”라고 물었다.
나는 대답했다. “그런 식으로 생각하신다면 당신은 달의 본질을 볼 수도, 꽃과 진정한 교감을 할 수도 없을 겁니다. 달을 통해 무언가를 얻겠다는 생각이나 꽃을 이용하겠다는 생각은 다 접으십시오. 그런 마음은 다 버리시고 그냥 꽃과 함께 하세요.”
그는 다시 물었다. “그렇지만 저는 친구 관계에서조차 도움을 받는 게 좋겠다고 생각하는 입장입니다. 꽃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그냥 아무 목적 없이 바라보라니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나는 대답했다. “물론 친구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는 있습니다. 그렇지만 친구는 단지 당신을 도와주고 격려해주는 사람만이 아닙니다. 친구는 그 이상이지요. 친구는 그냥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족한 그런 사람입니다.”
우리는 무슨 일을 하기 전에 먼저 이런 질문을 한다. “그 일을 하면 내게 어떤 득이 생기지? 이익은 얼마나 될까?”우리는 무엇을 하든 그 행동에 말에 목적이 있어야 한다고 배웠다.
사람들은 이것을 실용주의라고 부른다. 하지만 실제 삶에는 실용주의가 적용되지 않을 때가 더 많다.
미술대학에 가면 당신은 그림 그리는 기법을 배울 수 있다. 그러나 그림은 기법만으로 되는 게 아니다. 그림에는 혼이 있어야 한다. 주체와 객체를 엮어주는 무언가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베트남에 연꽃을 그리고 싶어하는 한 젊은이가 있었다. 그는 저명한 화가를 찾아가 견습생으로 받아줄 것을 청했다. 화가는 젊은이를 연꽃이 피어있는 연못으로 데리고 가서는 하루종일 연꽃만 바라보게 했다. 태양이 중천에 떠 있을 때 젊은이는 연꽃 한 송이가 피어나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해가 질 무렵, 꽃잎이 얼굴을 닫고 다시 봉오리로 되는 것을 보았다. 그 다음날도 그는 종일 연못에 있었다. 꽃 한 송이가 시들었을 때 꽃잎들이 모두 물속으로 후두둑 떨어졌다.
그는 다시 연꽃을 관찰했다.10일동안 똑같은 일을 반복한 후 젊은이는 화가에게 갔다. 화가는 물었다. “이제 그림을 한 번 그려보겠나?”젊은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해보겠습니다.”화가는 젊은이에게 붓을 주었고 젊은이는 세상에서 처음으로 크레파스를 잡은 아이처럼 그림을 그렸다.
그가 그린 연꽃은 매우 아름다웠다. 자기 자신이 연꽃이 되자 그림은 저절로 그려졌던 것이다. 비록 기법은 보잘 것 없었지만 그의 그림에는 진정한 아름다움이 있었다.
불교에는 아프라비타라는 말이 있다. 이것은 무원 즉, 아무 소망 없음, 또는 아무런 목적이 없음을 뜻한다. 다시 말해 내 앞에 무엇인가를 놓아두고서 그것을 갖기 위해 달려가지 않는다는 뜻이다. 멈추는 방법을 배우고 나서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다.
그것들을 볼 수 있을 때, 우리는 그동안 알지 못했던 것들을 저절로 이해하게 된다. 진정한 친구를 만나고 싶다면, 꽃의 아름다움에 눈뜨고 싶다면, 우선 멈추고 집중하라.
수행을 할 때도 이런 정신이 필요하다. 다만 수행 그 자체를 즐기는 것이다. 어떠한 목적도, 다다라야 할 목표도 필요 없다. 걷기 명상에서 걸음은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 아니다.
그저 걷기 위해서 걸을 뿐이다. 깨어있는 마음을 수행하는 것은 무엇을 얻기 위함이 아니다. 그저 우리 자신과 함께 하고 세상과 함께 하기 위해서 수행하는 것이다.
나는 계속 말해왔다. 호흡은 몸과 마음을 잇는 다리며, 호흡 수행을 잘 하면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고 말이다.
그러나 호흡 역시 당신이 붓다가 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되어서는 안 된다. 호흡을 즐겨라. 단지 그뿐이다. 붓다가 되는 것은 즐거운 호흡 그 다음에 오는 부산물에 불과하다. 걷는 것도 마찬가지다.
어딘가에 도착하기 위해서 걷는다면 당신은 걸음과 그 순간을 희생시키는 것이다. 삶은 그저 걸음일 뿐이다. 삶은 도착지가 아니다. 삶은 다만 길이다.
- 틱낫한 스님의 ‘힘’ 중에서
로스엔젤레스에서 열렸던 수련회에서의 일이다.
수련회가 끝나자 참석했던 한 화가가 내게로 와 “달과 꽃을 아름답게 그리고 싶습니다. 그것들을 어떻게 바라보는 것이 좋을까요?”라고 물었다.
나는 대답했다. “그런 식으로 생각하신다면 당신은 달의 본질을 볼 수도, 꽃과 진정한 교감을 할 수도 없을 겁니다. 달을 통해 무언가를 얻겠다는 생각이나 꽃을 이용하겠다는 생각은 다 접으십시오. 그런 마음은 다 버리시고 그냥 꽃과 함께 하세요.”
그는 다시 물었다. “그렇지만 저는 친구 관계에서조차 도움을 받는 게 좋겠다고 생각하는 입장입니다. 꽃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그냥 아무 목적 없이 바라보라니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나는 대답했다. “물론 친구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는 있습니다. 그렇지만 친구는 단지 당신을 도와주고 격려해주는 사람만이 아닙니다. 친구는 그 이상이지요. 친구는 그냥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족한 그런 사람입니다.”
우리는 무슨 일을 하기 전에 먼저 이런 질문을 한다. “그 일을 하면 내게 어떤 득이 생기지? 이익은 얼마나 될까?”우리는 무엇을 하든 그 행동에 말에 목적이 있어야 한다고 배웠다.
사람들은 이것을 실용주의라고 부른다. 하지만 실제 삶에는 실용주의가 적용되지 않을 때가 더 많다.
미술대학에 가면 당신은 그림 그리는 기법을 배울 수 있다. 그러나 그림은 기법만으로 되는 게 아니다. 그림에는 혼이 있어야 한다. 주체와 객체를 엮어주는 무언가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베트남에 연꽃을 그리고 싶어하는 한 젊은이가 있었다. 그는 저명한 화가를 찾아가 견습생으로 받아줄 것을 청했다. 화가는 젊은이를 연꽃이 피어있는 연못으로 데리고 가서는 하루종일 연꽃만 바라보게 했다. 태양이 중천에 떠 있을 때 젊은이는 연꽃 한 송이가 피어나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해가 질 무렵, 꽃잎이 얼굴을 닫고 다시 봉오리로 되는 것을 보았다. 그 다음날도 그는 종일 연못에 있었다. 꽃 한 송이가 시들었을 때 꽃잎들이 모두 물속으로 후두둑 떨어졌다.
그는 다시 연꽃을 관찰했다.10일동안 똑같은 일을 반복한 후 젊은이는 화가에게 갔다. 화가는 물었다. “이제 그림을 한 번 그려보겠나?”젊은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해보겠습니다.”화가는 젊은이에게 붓을 주었고 젊은이는 세상에서 처음으로 크레파스를 잡은 아이처럼 그림을 그렸다.
그가 그린 연꽃은 매우 아름다웠다. 자기 자신이 연꽃이 되자 그림은 저절로 그려졌던 것이다. 비록 기법은 보잘 것 없었지만 그의 그림에는 진정한 아름다움이 있었다.
불교에는 아프라비타라는 말이 있다. 이것은 무원 즉, 아무 소망 없음, 또는 아무런 목적이 없음을 뜻한다. 다시 말해 내 앞에 무엇인가를 놓아두고서 그것을 갖기 위해 달려가지 않는다는 뜻이다. 멈추는 방법을 배우고 나서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다.
그것들을 볼 수 있을 때, 우리는 그동안 알지 못했던 것들을 저절로 이해하게 된다. 진정한 친구를 만나고 싶다면, 꽃의 아름다움에 눈뜨고 싶다면, 우선 멈추고 집중하라.
수행을 할 때도 이런 정신이 필요하다. 다만 수행 그 자체를 즐기는 것이다. 어떠한 목적도, 다다라야 할 목표도 필요 없다. 걷기 명상에서 걸음은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 아니다.
그저 걷기 위해서 걸을 뿐이다. 깨어있는 마음을 수행하는 것은 무엇을 얻기 위함이 아니다. 그저 우리 자신과 함께 하고 세상과 함께 하기 위해서 수행하는 것이다.
나는 계속 말해왔다. 호흡은 몸과 마음을 잇는 다리며, 호흡 수행을 잘 하면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고 말이다.
그러나 호흡 역시 당신이 붓다가 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되어서는 안 된다. 호흡을 즐겨라. 단지 그뿐이다. 붓다가 되는 것은 즐거운 호흡 그 다음에 오는 부산물에 불과하다. 걷는 것도 마찬가지다.
어딘가에 도착하기 위해서 걷는다면 당신은 걸음과 그 순간을 희생시키는 것이다. 삶은 그저 걸음일 뿐이다. 삶은 도착지가 아니다. 삶은 다만 길이다.
- 틱낫한 스님의 ‘힘’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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