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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호및지난호

여름날의 그림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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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학수(가인재) 작성일07-08-10 14:12 조회3,03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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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아침 수련이 꽃잎을 열고 있는 연못가에 이젤을 세웁니다. 그리고 작은 유화용 캔버스 한 장을 올려놓습니다. 어줍잖은 솜씨로나마 이 아름다운 연화세계를 화폭에 담아보고자 함입니다. 숨을 고르고 오늘 제가 담아야 할 구도를 가늠해 봅니다. 짙은 초록빛 연잎이 가득한 연못에 화사하게 활짝 핀 순백색의 수련 한송이와 수줍은 듯 고개를 내민 어린 꽃봉오리는 한 폭의 아름다운 그림과도 같습니다. 오늘의 구도는 거의 정물에 가까워서 주인공인 수련 한송이에만 온전히 정성을 기울여야 할 것 같습니다. 물론 꽃을 받치고 있는 연잎이라든가 물 위에 떨어진 하늘빛 한 자락도 놓쳐서는 안 되겠지만 말입니다. 우선 물감을 찍지 않은 빈 붓질로 구도를 대강 그려 봅니다. 물빛은 깊이를 알 수 없을 만큼 아주 진하게 그려야겠고, 그 위로 동그라미를 그리듯이 가지런히 떠 있는 연잎 몇 장을 그린 후 꽃과 잎을 물 위로 올려 보내느라 애써 준 줄기들도 물에 잠긴 그대로 그려줘야겠습니다. 포개진 연잎 사이로 가느다란 꽃대를 뽑아 올려 눈이 부시도록 새하얀 순백의 속살을 드러낸 백련 한송이. 아무리 좋은 물감을 써본들, 아무리 유명한 화가가 그린다 한들 백련이 가진 아름다움을 모두 담아 낼 수는 없을 것입니다. 꽃 뿐만 아니라 날렵하게 생긴 연잎들이 역광으로 아침햇살을 받을 때면 숨어 있던 아름다움이 화려하게 펼쳐집니다. 햇살이 닿는 부분의 안온한 색채감과 그늘진 부분의 서늘하면서 차분한 느낌은 빛과 그림자가 만들어 놓은 자연의 조화입니다. 연꽃이 피기 시작하는 이맘때쯤이면 연꽃이 살고 있는 곳으로 훌쩍 여행을 떠나 어설픈 솜씨로나마 몇 폭의 연꽃 그림을 남기며 살아왔습니다. 가끔 부처님을 뵙기 위해 산사를 찾을 때엔 그곳에선 사시사철 연꽃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진세의 오염 속에서도 영원불멸한 가르침이 있어 세상이 아름답듯이 탁류 가득한 연못의 진흙에 뿌리를 내렸어도 더없이 맑고 밝은 자태를 갖는 연꽃이기에 부처님이 계신 곳 어디서나 연꽃도 함께 피어 있는 듯합니다. 피부에 와닿는 햇살이 따갑게 느껴지는 것을 보니 시간이 꽤나 흘렀나 봅니다. 두 시간 가량의 붓질로 제 작은 화폭에도 수련 한 송이가 피었습니다. 붓을 놓고 다시 한 번 연못 위의 연꽃을 바라봅니다. 아담하고 야무진 수련의 매무새 속에 제가 닮고 싶은 인자하신 부처님 모습이 보입니다. “세상을 사는 동안 어두운 날도 많겠지만 맑고 밝게 살도록 마음을 가다듬어라” 화구를 챙기는 귓전에 그 말씀이 들리는 듯합니다. 비록 취미생활이지만, 한폭의 연꽃을 그리면서 이보다 더 소중한 여름날의 그림일기를 남기고 나는 이제 집으로 돌아갑니다. 아쉬움에 제가 잠시 머물렀던 연못가를 돌아보며 눈인사를 보냅니다. “보고 싶으면 언제든 다시 올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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