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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나의 발원으로 중생의 서원 일궈낼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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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오심스님(대한불교조계종 포교… 작성일07-08-10 14:53 조회3,27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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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발원으로 중생의 서원 일궈낼 수 있기를



엄마를 부르며 쫓아다닐 나이에 나는 스님을 따라다녔고, 그 스님을 내 엄마로 아버지로 인식하며 살았다. 그때가 나의 나이 5세 때의 일이다. 그렇게 시작한 사찰에서의 생활은 그야말로 도량을 활보하는 망아지 같았으며 또 때로는 준엄하고도 혹독한 시간까지 감수해야 하는 행자의 생활이었다. 초등학교 중, 고등학교를 절에서 다니는 흔치 않은 아이였으나 사중에 들어오면 난 분명, 승려의 본분을 지키고자 하는 어린 승려가 분명했다.
그러나 그 작은 아이의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언제나 염불과 좌선 삼매에 빠진 스님들의 뒷모습을 대하는 일이었으며 간절함이 묻어나는 기도의 모습을 지켜보는 일이었다. 그런 승가의 모습에는 힘과 질서가 배어 있었으며 그 승가의 뒤를 묵묵히 걸어가는 나는 스스로의 정해 놓은 길을 걷는 일처럼 아주 자연스런 용수의 법칙 같은 게 적용되어 실려 가고 있었다.
누구에게나 성장의 시간은 크로키의 기법처럼 휙 스쳐 지나는 것. 도무지 오지 않을 것만 같았던 성년으로서의 순간은 오고 감을 알지 못하는 사이 그렇게 휙 지나가고 없었다. 그러나 성년이 되고 본사의 굵직한 소임을 두루 거치면서 내 안의 채워지지 않는 무엇인가는 떠나지 않고 있었다.
소임을 맡기 이전까지 염불 잘 하는 스님으로 부끄러운 칭송을 받곤 하던 ‘나’는 사라지고 그야말로 사중의 일을 도맡아 진행하는 행정승으로서 입지를 굳힌 것이다. 어느 도반은 선방에서 몇 철을 나고, 어느 도반은 암자에 틀어박혀 자신의 공부에 진력하는 동안 나의 위치는 그렇게 나름의 자리를 만들어 가고 있었다.
허망한 마음에 어느 날 밤은 방사를 털고 나와 반질반질해진 마루 끝에 서 보았다. 기와가 덮인 흙 담 너머로 오래된 고목의 잎새는 나풀거리고 있었으며 공양간 후원 사이로는 달빛을 받은 뽀얀 빨래가 넘실대고 있었다. 사방은 묵묵한 당우로 가득했다. 순간, 뒷덜미를 탁 치고 지나가는 무엇인가가 있었다. “ 내 눈 앞에 펼쳐지는 이 모든 풍경들이 신장(神將)이겠구나. 그렇다면 지금의 나야말로 주어진 소임에 충실해야 하는 것이 이 신장들의 외호를 받는 일이 될 것이며 나 또한 어떤 중생에게는 든든한 신장으로 자리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죽비가 되어 내리치는 거였다.
나의 은사 스님은 몇 해 전, 열반하신 월하 대종사이시다.
스승께서는 늘 한결같았다. 무엇이든 처음 먹은 마음으로 지긋이 나아갈 것과 중생들의 원을 바르게 받아 부처님께 바로 올리는 마음이 부처님을 섬기는 불제자로서의 의무이며 책임이라고 일러주곤 하셨다. 불같이 화를 내지 않으셔도 소리 없이 눈빛만을 건네셔도 사형사제들은 스승의 뜻을 알아 저마다의 본분사를 다하곤 했다. 바로 그런 예지의 눈을 지녀야 하겠다는 생각으로 환희심이 일었다.
포교의 꽃으로 불리는 포교국장의 소임은 다른 소임에 비해 불자들을 접하는 일이 잦다. 전법의 꽃을 피우는 일을 해 내야 하는 만큼, 개개인의 소사에서부터 더러는 알지 않아도 좋을 일까지 알아버리는 상황도 곧잘 맞닥드리게 되는데 그런 불자들의 발원의 출발선에 내가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보니 그들의 입장 하나 하나를 헤아리는 일 또한 내가 맡은 불사 가운데 가장 시급한 불사라는 생각에 하루가 짧았다. 그리하여 소임을 보면서도 내 앉은 자리에서 심약한 어느 중생을 위한 지극한 기도를 해야 했으며 혹은 에너지가 넘쳐나는 젊은이를 위한 안온한 마음 냄을 쉼 없이 해야 했고, 포교의 일선에서 풀어야 할 난제들을 그 지극한 한 마음으로 다지고 또 다져야 했다.
법당이 아니어도 도량 밖을 걸으면서도 여일하게 지속되어야 할 마음 속 기도를 원력이라는 나무를 땅에 묻듯 그렇게 하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불자들을 향한 내 법문은 늘 기도의 원력은 자신을 속이지 않는다는데 주안점을 두고 있었다. 때 묻지 않은 어린 동심들을 위한 어린이 법회에서는 나 또한 철저한 동심이 되어 계곡에서 함께 발을 담그고 법회를 진행했으며 청년불자들을 위한 법회에서는 그들의 당면 과제들을 나의 일로 받아들이며 같이 고민하고 풀어나갔다. 그런가 하면, 후원의 봉사단을 향해서는 어머니의 마음을 어루만지듯 자식과도 같은 기염(?)을 토해내야 했다. 그 속에서 존재의 가치와 그들의 가치 창조를 동시에 해 나가고 있었다. 그것이 내가 해야 할 일이었다.
조밀하고도 빠듯한 일상이 주는 가치를 그런 일상을 살아보지 않은 이들은 알지 못할 것이다. 분명, 이(理)를 지키고 사(邪)를 배제하는 삶을 살고 있다면 종종 ‘나’를 잊고 산다 할지라도 그것은 충분히 가치 있는 삶을 산다 할 수 있을 것이다. 나 또한 그런 매일을 살고자 애썼다.
본사에서는 가장 오랜 기간 장기집권(?)을 하고 소임을 놓던 날, 10개 단체가 넘는 신행팀의 임원들은 한 목소리를 내 주었다. “ 스님과 함께 한 시간들에 더러는 고단한 순간도 있었으나 ‘원력’이라는 것이 얼마나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라는.
감사한 마음, 아쉬운 마음과 함께 다시 나를 밝히는 촛불을 켜 든 심정이었다. 수도 없이 내려놓고 살라고 일러주신 은사스님의 말씀과 드넓은 도량 가운데를 가로질러 뛰어다니고 철부지처럼 은사스님의 무릎을 독차지 하고 앉아 있곤 하던 내 어린 삶이 주마등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그런 본사에서의 소임을 맡았던 이력으로 나는 지금 종단의 포교를 관장하는 포교국장의 소임을 맡아 벌써 세 계절을 지나고 있는 중이다. 어찌 보면 통도사에서의 소임 때에 비해 소소한 일은 줄어든 셈이지만 전국의 크고 작은 사찰과 행사장, 법석을 찾아 포교원을 대표하는 소임을 다해야 한다. 그러다보니 업무의 규모 면에서나 행사의 성격 면에서나 세세한 곳을 놓치고 돌아서야 할 때가 많다. 마치 나를 철저히 돌아보아야 앞으로의 진행을 바로 할 수 있는 이치처럼 온 길을 다시 돌아보는 일을 회한이 아닌, 점검으로 나를 이끌곤 한다. 그러면서도 놓지 않겠노라 다짐했던 불법에 귀의하는 삶과 그에 기초한 중생들을 위한 서원을 어린 시절 뒤에서 보아왔던 승가의 진지한 뒷모습을 대하듯 간절하고도 간절하게 발원한다. 그리하여 이 기도가 불법의 세상을 감동시키고 중생의 원을 녹이는 최상의 원력으로 우뚝 서게 되기를 바란다.
지금 내가 누군가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면 그것은 숙세에 놓아버린 어머니가 아니라 대 가람에서 다시 태어난 어머니, 대자비의 근원이신 부처님을 시봉하는 일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감사하고 지극한 마음으로 새벽 종송에 귀를 기울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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