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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산, 그리고 손가락을 보고 춤을 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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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작성일08-02-22 15:55 조회3,11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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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산, 그리고 손가락을 보고 춤을 추다

 

                                                                                      김종환 (경기도 일산)

 

 

일년만에 하산하니, 세속은 역시나 세속답게 온 누리에 악머구리 풀어놓은 듯 와글와글 시끄럽기 그지없었다. 도를 추구하는 자는 모름지기 세상사를 초월하고, 그 다음엔 물질적인 것을, 마지막에는 자신의 존재조차 초월해야 한다고 했던가. 꼭 도를 추구하는 사람이 아닐지라도 때론 난분분한 세상사에 좀 초연해보는 것도 썩 괜찮은 일이지만 미욱한 중생에겐 그게 어디 그리 쉬운 일인가. 펼쳐지는 주변 경계에 따라 마음 또한 덩달이 춤을 춘다. 적어도 산 속에선 주변 경계가 이렇게까지 현란하지는 않았는데….

섣부른 환경을 탓하며, 심기일전이라도 할 겸 서재를 정리하다가 일년도 더 된 신문기사 스크랩을 하나 발견했다. 용하다는 소문이 짜한 점술가를 인터뷰한 기사였다. 차기 대통령은 누가 될 것 같으냐는 기자의 질문에 그는 모호한 비유로써 대답했다. 하지만 누구를 지칭하는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는 비유였다. 그냥 지나치려다가 퍼뜩 짓궂은 생각이 떠올라, 가위로 그 기사를 오려 두었었다. 맞나 한 번 두고 보자.

이런 류의 기사가 드물지 않은 걸 보면, 점집이 성행한다는 풍문이 한낱 풍문만은 아닐 것도 같다. 점점 빨리 변하는 세상, 앞날 또한 더욱 불확실해지니 미래의 그림을 미리 보고 사전에 대처하고 싶은 욕구들이 그만큼 크다는 의미일 것이다. 좀 더 단순한 절차를 선호하는 사람들은 앞날에 대해 알아보고 말고 할 것도 없이 자신이 원하는 바를 그저 불보살님이나 신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빈다.

간절히 기도하면 우리의 소원은 이루어질지도 모른다. 시험에 합격할 수도 있고 돈벼락을 맞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로 인해 불합격한 사람, 가난해진 사람에겐 그 기도가 저주가 되는 셈이고 따라서 그들의 고통은 고스란히 우리들의 업이 되는 것이다. 그것은 원융무애한 이 우주에서 사사물물이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자그마한 몸짓으로라도 어찌 기도라는 미명 아래 타인에게 날벼락 같은 재앙을 안겨줄 수 있겠는가. 세속적인 성취는 각자의 노력의 영역에서 해결할 일이지 결코 기도의 영역으로 끌어들일 일이 아니며, 마땅히 기도는 일체중생에게 이로움을 주는 방향으로 행해지지 않으면 안 될 일이다. 일체중생을 위한 기도, 그것은 도를 추구하는 자가 지켜야 할 정언적 명령인 것이다!

그런데 금강경은 말한다. ‘추구할 도라는 게 있기는 있나? 황차 위해야 할 중생이라니? 그런 건 모두가 다 헛것이야!’ 모두가 다 헛것이라고? 그럼 주야장천 닦는다는 도는 뭐고 제도해야할 중생은 또 뭐란 말인가? 도대체 있다는 말인가 없다는 말인가?

사물의 궁극적 성질은 있다느니 없다느니 하는 따위의 개념을 초월한다. 그런 건 분석적 사유로써가 아니라 오직 실참실수를 통해서 체득될 뿐이다.

그렇다. 결국엔 실참실수다. 죽음과 대적할 힘을 기르기 위해선 그것만큼 효과적인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방편불교가 주를 이루는 이 땅의 불교 현실에서, 다행히 축서사 같은 실참실수에 중점을 두는 도량에서 당대 손꼽히는 대선사이신 큰스님의 지도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은 정법을 지향하는 불자에겐 참으로 크나큰 축복이다.

개인적으론, 축서사에 머물렀던 지난 일 년간은 그런 실참실수의 분위기를 만끽할 수 있었던 아주 보람된 시간이었다. 어려운 여건 하에서 일 년간이나 머물도록 배려해주시고 수시로 따뜻한 격려를 해주신 큰스님께 이 지면으로나마 감사의 뜻을 전해야겠다. 그리고 그 밖의 사중의 스님들과 식구들, 여러 도반들, 스쳐간 인연들…. 이 지면을 빌려 두루두루 안부를 전한다.

아참, 그리고 그 용하다는 점술가, 차기 대통령 알아맞혔느냐고요? 장자 응제왕편에 나오는 신무(神巫) 계함(季咸)과 열자(列子)의 스승 호자(壺子)에 관한 이야기를 먼저 해보겠다. 계함은 사람의 생사존망, 길흉화복, 수명의 장단 따위를 귀신처럼 알아맞혔다. 하지만 호자가 그에게 ‘본질 그대로의 상(未始出吾宗)’을 보여주자 그는 얼이 빠져 도망치고 만다. 우리가 부지런히 실참실수하여 의식의 저 밑바닥에서 간단없이 꿈틀대고 있는 무의식적 심층심리를 완전히 통제할 수만 있게 된다면 호자의 경지인들 대수랴.

각설하고, 그 용하다는 점술가는 계함만도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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