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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닦는 최상의 도구 공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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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작성일07-11-21 15:53 조회3,57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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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닦는 최상의 도구 공덕

 

                                                                            남배현 (법보신문 편집국 차장)

 

공과 덕을 떼어 생각하면 깨달음을 일구어 가는 도구를 연상케 한다. 좋은 일을 쌓는 공과 불도를 수행한 덕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또 악(惡)이 다함을 공이라도 하고 선이 가득 차는 것을 덕이라 하기도 했다.

만약 어떤 이가 공덕의 마음이 찰나의 틈도 없이 항상하다고 한다면 깨달음을 완성했다고 이를 수 있을 것이다. 지구촌의 불자들로부터 관세음보살의 화신으로 추앙받는 달라이라마는 자비와 공덕이 충만하다면, 그리고 그러한 마음이 상(相)으로부터 자유로워 항상하다면 그 사람이야말로 보살이요, 바라밀을 담은 법체라고 설하셨다. 달라이라마의 가르침과 같이 부처님의 지혜를 담은 경전에는 공덕을 주제로 한 경전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상을 내고 오욕에 찌든 중생심을 정화하는 최상의 도구로 보시, 지계, 인욕, 선정, 정진, 지혜 등 바라밀을 실천해 일군 공덕을 제시하고 있으며 바라밀을 실천함으로써 중생심은 보살의 마음을 닮아간다고 이르고 계시다.

부처님의 일상은 쉼 없는 공덕의 연속이었다. 공덕이 여여(如如)했으니 삿된 마음과 행이 끼어들 틈이 없었다. 여러 생을 윤회하시며 많은 종류의 바라밀 공덕을 쌓으시고 수행하시어 마침내 무상정각을 이루셨다. 전생담을 살펴보더라도 부처님이 걸어오신 길은 공덕 그 자체였음을 알 수 있다. 부처님께서는 다른 이를 살리기 위해 목숨을 보시하는 등 여느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따라할 수 없는 보살행을 실천했는가 하면 그릇된 행동을 하는 이들에게는 조언을 하거나 용서하는 이타행(利他行), 또는 지혜로서 어리석은 이를 깨우치는 등 생을 거듭하면서 무수히 많은 공덕을 보이셨다. 어찌 공덕을 크다 작다 구분할 수 있을까 마는 그 가운데에는 범부의 눈으로 보기엔 그리 대단해 보이지 않는 소소한 공덕들도 많았다. 이와 같이 공덕의 탑을 상징하는 부처님의 전생은 작건 크건 공덕 하나하나가 귀하여 공덕을 쌓지 않고서는 결코 성불할 수 없음을 일깨워주고 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일체의 행(行)이 공덕 아닌 것이 있을까. 『법구경』에는 정직한 보시 공덕에 담긴 의미를 설하고 있다. 목갈라나 존자가 천상에 갔을 때다. 그곳에서 목갈라나 존자는 많은 천인들이 호화로운 집에서 안락하게 살고 있는 모습을 보고는 그들에게 “어떤 공덕을 지었기에 천상에 태어나 호화로운 생활을 하느냐?”고 물으니, 천인들이 저마다 다른 연유를 내놓았다.

“시주를 많이 해서도, 설법을 많이 들어서도 아니고 다만 진실만을 말하며 정직하게 살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천상에 태어난 것은 마구 때리고 학대하는 주인에게 앙심을 품지 않고 오히려 그가 나를 고용해준 것에 대해 감사히 여겼기 때문입니다. 나는 지극히 적은 물건이라도 진실한 마음으로 정성스럽게 수행자나 이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보시했기 때문입니다.”

천인들로부터 대답을 들은 목갈라나 존자가 부처님께 “이처럼 작은 공덕만으로도 천상에 태어나 호화로운 생활을 누리는 과보를 얻을 수 있습니까?”라고 여쭈었다. 부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아무리 작은 것일지라도 어진 마음으로 행하게 되면 반드시 그 이익이 뒤따르는 법, 그런 사람은 반드시 천상에 태어나느니라.”

부처님의 이 가르침을 꼼꼼히 살펴보면 시주를 많이 하거나 법문을 많이 듣는 것이 분명 커다란 공덕이기는 하나 어질고 진실한 마음을 내는 것만 못함을 의미하고 있다. 또한 보시를 많이 하는 것도 공덕이 되기는 하지만 비록 하찮은 것이라도 정성껏 보시하고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를 성심껏 돕는 것만 못하다는 가르침도 간파할 수 있다. 특히 인욕은 내가 남에게 직접적인 도움을 주거나 보시를 베푸는 등 적극적인 선행이 뒤따르지 않더라도 분노하지 않고 상대를 원망하지 않으며 그에게 감사의 마음을 내는 것만으로도 천상에 나는 과를 얻을 수 있다는 점에서 그 공덕이 각별함을 알 수 있다. 일상이 공덕인 점을 강설하시면서 진실하고 지혜로운 마음에서 우러나는 공덕의 수승함을 찬탄하고 있는 것이다.

그 어떤 행이든 회향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공덕이 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악행을 보더라도 수행하고 바른 삶을 살아가는 양약으로 삼으면 공덕이 될 일이며 선행을 보고 그대로 실천하면 또 공덕을 쌓게 된다. 일체가 공덕이니 실천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할 터, 일체의 행을 공덕의 지혜로 회향하는 것이 몸과 마음에 배어야 한다. 내가 지금 하는 행동이 공덕을 쌓는 일이라는 의식은 곧 상을 드러내는 것이니, 그러한 상 역시 계행을 실천하듯 경계에 또 경계해야 할 대상이다.

공덕은 불자들에겐 발원이자, 발심이기도 하다. 『법화경』 신해품에는 사리불이 부처님께 수기를 받은 것을 보고 가섭존자를 포함한 사대성문(四大聲聞)이 함께 희유한 마음으로 한없이 기뻐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바로 수희공덕(隨喜功德)을 일깨우는 모습이다. 내가 받는 수기도 아닌데도 가섭존자는 왜 그토록 기뻐했겠는가. 가섭존자의 기쁨에는 질투와 상, 가식 따위는 없었다. 수기에 대해 함께 기뻐한 것 자체가 수희공덕임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어디 그 뿐인가. 사리불의 수기를 보며 나 역시 수기를 받고 싶어 하는 마음을 발하게 되며 이를 통해 원을 세우게 된다. 가섭존자는 수희공덕을 통해 나의 마음을 관하면서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무엇인지, 그것을 얻기 위해 나는 어떤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가라는 점을 깨닫고 있다. 사리불 역시 함께 기뻐해 주는 도반들을 보면서 쉼 없는 정진을 발원한다. 수희공덕은 바로 깨달은 도반과 그렇지 못한 도반이 함께 수행하여 도를 이루리라고 서로를 격려하는 서원의 장인 셈이다.

마음을 닦는 최상의 도구인 공덕,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그 의미는 무엇일까. 앞서 살펴보았듯이 이웃의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자비심을 일으켜 이웃과 원만하게 살아갈 수 있게 하는 삶의 원리라고 말할 수 있다. 아울러 우리 불자들에게는 바라밀을 실천하겠다는 마음을 일으키게 하는 힘의 원천으로 보아도 좋을 듯하다. 항상 자신의 법성에 공덕이 있음을 알아차려 이기심과 아상(我相)을 끊고 밖으로 공경하는 삶, 또 모든 이가 그리 살아간다면 일체의 시비는 사라져 원융 공동체가 완성되지 않을까. 불국정토를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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