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하나 된 마음으로 발보리심하라
페이지 정보
작성자 목정배(대한불교법사회 이사장… 작성일07-08-10 14:53 조회3,389회 댓글0건본문
기도란 무엇인가
기도는 한 마음이 되고자 하는 염원이다. 하나로 맑아지는 바람이 없다면 기도를 할 필요가 없다. 하나되는 마음은 어떤 대상이 자기 앞에 다가와도 분별하고, 시샘하는 마음을 내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의 모든 것을 하나로 녹여 융합하는 마음이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하나되는 마음을 갖기가 대단히 어렵다. 그것은 항상 분별하고, 고깝게 보는 생각이 앞서 있기 때문이다. 어떤 것에 생각을 낼 때도 그 생각자체에다 분별의식이 발동하면, 그 생각은 좋은 생각이 아니고 삐뚤어진 생각이다.
그러므로 눈을 뜨고 마음을 열고 사물을 대할 때, 한 생각을 하여야 하는데 눈에다 게슴한 분별로서 마음에 전달하면 마음도 이상한 경계를 도출하게 된다. 이러한 모든 현상이 망상분별의 소치인 것이다. 깨어있거나 잠이 들거나 우리의 의식을 올곧게 하여야 한다. 우리의 의식이 올곧지 아니하면, 모든 현상을 망상으로 보고 번뇌로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기도를 한다는 것은 자기의식 속에 망상을 없애고, 항상 깨끗하고 맑은 마음을 연속시켜야 한다. 자신은 기도한다고 밖으로 자랑하면서, 만약 그 마음속에 기도하는 한마음이 자리잡히고 기도삼매의 경지에 들지 않는다면 모양만 기도를 하는 것이지 참다운 기도가 아닌 것이다.
기도는 자랑하는 것이 아니고, 스스로의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희열이고 법열이다. 이러한 희열은 자신을 감동시키는가 하면 주변의 사람에게 조용히 자기 법열을 보시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참다운 기도에 몰입하여 삼매를 느껴야 한다.
기도하는 마음
마음이 울적하거나 모든 일이 잘 풀리지 않고, 세상사에 얽히고 설키고 앞뒤가 캄캄하면 한 번 기도나 해볼까 하는 사람이 있다.
마음을 달래고 만사형통의 촛불을 밝히려고 기도하는 마음을 내는 사람도 있다. 아니 세상일들이 혼란하여 자기 사업에 불운을 가져다주면, 기도나 한 번 하여 보면 어떨까 하여 기도하는 경우도 있다. 스스로가 괴롭고 구차하여 기도하는 경우가 있다. 사실 괴로움을 극복하고, 그 고통을 이겨내어 보려는 생각으로 기도를 하기도 한다. 아무튼 기도를 발상하는 마음은 여러 형태로 나타나게 된다. 그러나 정말 기도는 어떤 때 하여야 하는가. 평상심이 도란 선가의 말이 있듯이, 기도도 평상심에서 일어나야 한다. 기쁘거나 슬프거나 건강과 병고에 빗대지 말고, 항상 한결한 마음으로 자기 내면 속에 자리하고 있는 보리심을 들어내어야 한다. 나만이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일체중생이 모두 함장하고 있는 본래청정한 보리심을 마음 밖으로 들어내어 이 보리심이 중생중생과 서로서로 무진연기를 일으켜야 한다. 이러한 무진연기의 보리심이 보살의 마음이 되어, 중생중생들이 바라밀로 성취되는 것이 참 기도의 본질이다.
그런데 지금 세상 사람들은 자기 기도 많이 하면 되지 남의 기도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제 밭의 풀만 뽑으면 되지, 남의 풀은 왜 뽑느냐고 반문하는 사람이 있다. 사실 제 논이나 밭의 풀도 무수히 자라 이것만 뽑아내는데 혼줄이 나고 피땀을 흘리게 되는데, 무엇 때문에 남의 논밭의 풀을 뽑느냐고. 남의 논밭의 풀이 자기 논밭으로 건너오니 그것을 서로 품앗이 하여 가면서 뽑아야만 온 들판의 농사가 황금농사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기도가 중생중생이 연기농사를 짓는 것과 같은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만이 알고 자기만 따뜻하게 하려고 한다. 그러나 가깝게 생각하면 저 남이라고 하는 상대가 바로 나인 것을 깨달아야 한다.
그러므로 남을 위하여 기도하여야 한다는 큰 스님의 법문이 우리 가슴에 와 닿는 말씀이다. 이렇게 지극히 깊은 마음에 사로잡혀 기도하면 온 우주의 기운이 자기로 와서 그 기운이 다시 남을 위한 자비와 지혜로 발광하게 될 것이다.
기도의 성취
옛날 큰 스님의 행장에서 찾아볼 수 있듯이 첫째는 발심하고, 그 발심을 영원히 지속시키기 위하여 둘째는 정진기도를 하였다.
그렇다면 기도는 발심의 첫걸음이다. 첫걸음이 정견으로 나아가야지 첫걸음이 잘못 나가면 천리현격이 될 것이다. 마음이란 하나이면서 오차가 가득찬 존재적 분별이다. 한마음, 깨친 마음, 두루한 마음이 되지 않으면 멍청한 마음, 치우친 마음이 되어 천지사방을 바르게 분별하지 아니하고 마구 설치는 마음으로 작란하게 된다. 그러므로 발심은 정견으로 하여야 한다. 지금까지 세상에 묻혀 살다가 갑자기 무슨 생각이 나서, 불교를 믿어볼까 하는 생각이 발심이라고 할 수 있지만, 참다운 발심은 나도 부처님과 같은 저 높은 입지를 깨쳐 싯달타가 종전의 수행법을 가차없이 버리고 우주적 연기법을 발현하려고 다시 발심한 그 자리를 희구하고 구도하는 자세가 발심의 근원이 되어야 한다.
두 번째는 정진이라는 기도가 있어야 한다. 정진이란 나태심의 제거이다. 어느 정도 공부나 수행하면 이 정도 하면 되었다고 자긍하는 경우가 생기고 나는 잘 정진기도하고 있다는 자부심이 나기도 한다. 그러나 인간이 자긍심을 느끼고 자부심을 자랑한다는 것은 참으로 착각의 경우가 많다.
정진에는 허풍이나 과장을 허락하지 않는다. 정진은 그 진리 앞에 우리의 모든 것이 나목이 되는 것이다. 한 겨울의 그 추위에 나목이 되지 아니한 나무는 다음의 봄날을 맞을 수 없다. 그 극한의 엄동을 과동하였기에 봄향기를 내품는 꽃으로 변신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경계를 아무런 탈없이 이겨내는 것이 정진기도인 것이다.
우리는 기도의 의미를 새롭게 새겨 내 마음속에 있는 기도·원력·정진을 앞세워 나가야 한다. 만약 우리들이 이러한 기본자세를 갖고 기도에 임한다면 우리 한국불교는 새로운 계기를 마련할 것이다.
그래도 하는 일 모두 모두가 부처님께 올리는 공양이고 가는 곳 어느 곳이 기도법당이 아닌 곳이 없다.
항상 자기 마음에 하나되는 기도를 하고 있는 자리에서 발원하면 모든 하는 일에 발보리심이 되고 반야바라밀이 장엄될 것이라 생각한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