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서사에서의 산중일기山中日記 - 제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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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작성일08-02-22 16:35 조회3,060회 댓글0건본문
축서사에서의 산중일기山中日記 - 제8일
김원경 (서울)
속가에서의 복잡한 마음을 내려놓고 시작한 축서사 생활 8일째….
새벽을 가르는 목탁소리에 눈을 뜨고 분주히 새벽 예불 채비를 하고 대웅전으로 들어섰다.
절 생활도 예불문도 너무도 생소했고 축서사란 이름마저도 낯설었던 나에게 이제 축서사에서의 생활은 마치 여기서 나고 자란 사람마냥 편안하다. 속가에서 묻은 묵은 때와 냄새를 빼고 큰 스님께 인사를 올리겠노라 혜안 스님과 약속한 지 8일째, 오늘은 꼭 큰 스님을 만나 뵈야지 다짐하며 내 몸을 깨끗이 씻었다.
아침부터 안개가 자욱하다. 축서사에서 내려다보는 아름다운 산세를 보지 못하니 문득 번뇌 망상이 내 안의 불성을 가리고 있다는 스님의 말씀이 떠올랐다. 큰 스님께 인사드리고 나오니 언제 그랬냐는 듯 축서사에 자욱했던 안개가 걷히니 멀리 첩첩히 펼쳐진 雲海가 장관이다.
올해 30이 된 나는 정처 없이 달려온 20대의 삶을 되돌아보고 앞으로 10년을 더 신나게 살아보고자 5년 동안 다니던 회사를 잠시 쉬기로 했다. 멀쩡히 잘 다니던 회사를 그만 둔다니… 주위에서는 다들 놀라는 눈치다. 그리고 묻는다. “어디 다른 회사로 옮겨 가는 것이냐”고….
“아닙니다. 그냥 쉬면서 절에도 다녀오고 이리저리 여행도 다니려 합니다.” 그리고 미련 없이 택한 축서사행.
축서사에 온 첫 날, 배정받은 방에는 이미 또래의 보살들이 100일 기도를 위해 축서사에 머물고 있었다. 새벽예불, 사시예불, 미시예불, 저녁예불 하루 네 번을 2시간이 넘게 기도하는 그들을 보면서 그야말로 신기할 따름이었다. 그냥 나와는 다른 세상의 사람들.
축서사에서 우리는 애기보살들이다. 민망하다. 나이 30에 애기보살이라니, 그래도 그 애칭이 이제는 좋아지기 시작했다. 오늘 처음 만난 스님들과 보살님들과 처사님들 모두 따뜻한 눈빛과 말씀으로 위해주신다. 또 삼시세끼 따뜻한 밥과 맛난 반찬들로 공양하고 틈나면 과자도 챙겨주시고, 과일도 챙겨주신다.
절에 가면 고생한다? 서울에서의 자취생활 7년째, 이런 호사가 있었던가? 저녁예불을 드리고 나오는 길에 쏟아지는 별들을 보면서 애초 계획했던 2주간의 사찰일정을 연장해버렸다. 보탑성전 위로 조용히 내려앉는 석양을 내 언제 이만큼 즐길 수 있을까? 마음먹었을 때 즐길 만큼 즐기다 가리라. 툇마루에 앉아 오후 햇볕을 쬐며 싸 짊어지고 온 책들도 모두 읽고 가리라. 물이 왜 위에서 아래로 흐르고 사물이 나고 지는지 천천히 생각도 해보리라. 저녁 9시 30분. 잠자리에 들기 전 다이어리를 펼쳐든다. 사찰에서 다이어리 쓸 일이 무에 있으랴 싶지만 사찰에서의 하루는 생각보다 다양하다. 아침 7시 스케줄부터 시작하는 내 프랭클린 다이어리도 쫓아오지 못할 만큼 알차다. 축서사 전의 내 하루는 서너 개의 미팅과 잡무(수십개의 이메일과 리포트)로 가득했었는데, 12월 축서사에서 내 하루는 명상과 기도와 독서와 즐거운 해프닝들로 더욱 알차게 채워져 간다. 따뜻하다. 편안하다. 사람도, 도량도, 문수산 자락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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