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자고 번번이 허공에 말뚝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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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축서사 작성일08-05-21 17:23 조회3,049회 댓글0건본문
어쩌자고 번번이 허공에 말뚝을…
김종환 (경기도 일산)
신문을 넘기는데, 한 귀퉁이의 짤막한 기사가 눈길을 끌었다. ‘일본에서는 지금 고전문학이 부활하고 있다. 새롭게 번역된 러시아 소설가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 50만부나 팔렸다.’
사람들은 어째서 백년도 더 된 철 지난 이야기에 여전히 공감하는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그 작품이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우리들 영혼의 어두운 심연을 날카롭게 파헤치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도스토예프스키의 모든 창작은 인간의 불가해성에 관한 것이었다. 그가 탐구한 인간은 추상적인 ‘보편적 인간’이 아니라 내면이 병들고 모순으로 가득 찬 19세기의 실재 유럽인이었다. 그의 작품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는, 어느 의사의 모순된 내면 풍경이 다소 산만하게 언급된 부분이 있는데, 요약하면 대략 다음과 같다.
‘나는 인류를 사랑한다. 그래서 인류를 위하여 정성껏 봉사하는 공상에 빠지기도 하고, 필요할 경우 나 자신을 희생하겠다는 생각도 한다. 하지만 누군가가 실제로 나와 함께 생활하기 시작하면 나는 곧 그의 가장 사소한 습관-이를테면 밥을 오래 먹는다, 감기에 걸려 코를 계속 풀어댄다는 등-까지도 견딜 수가 없게 된다.’
이것은 하찮은 예에 불과하겠지만, 우리 범부들의 낯뜨거운 실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왜 머릿속에서는 일체중생을 위해 기도하고 일체중생을 제도하겠다고 다짐하면서도 현실에서는 쩨쩨한 행동을 일삼는 것일까? 그것은 우리의 의지나 의식과는 무관하게 움직이는 ‘또 다른 정신작용’이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놈은 마치 길들여지지 않은 ‘소’와 같아, 언제라도 의식의 통제를 벗어나 제멋대로 날뛸 준비가 되어있다. 그나마 우리의 의식이 또렷할 땐 ‘쩨쩨한’ 정도에 그치겠지만, 죽음이 닥쳐와 의식이 완전히 없어져버릴 땐 어떻게 할 것인가. ‘소’ 길들이기에 분별하는 의식은 결코 용납될 수 없는 것이다.
‘소’를 잡아 길들이는 일은 한시가 급하고 중차대한 문제인데도 많은 이들은 찾아나서지조차 않는다. 날은 곧 저무는데 갈 길 잃고 헤매는 나그네의 몰골이 이와 같을까. 설혹 찾아나서더라도 그것을 마치 외부에 존재하는 실체로 여겨 신, 마귀 등등의 다양한 이름을 붙여 집착한다. 그러고는 지치도록 끌려 다닌다. ‘소’를 ‘돼지’쯤으로 착각하고 있는 셈이랄까?
이런 착각은 일체를 있는 그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근본적인 미혹 즉 무명 때문에 일어난다. 대승기신론은 무명이 일어나는 모습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중생들 마음의 본바탕은 원래 망념이 없어 청정하고 변함이 없다. 그럼에도 중생들은 모든 사물과 현상들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하나로 연결된 이 세계(one World of Reality)에 대해 막힘없이 환히 알지 못하기 때문에, 홀연히 망념이 일어난다. 이것을 무명이라고 한다.
(所謂心性 常無念故 名爲不變 以不達一法界故 心不相應 忽然念起 名爲無明)
일단 무명이 일어나면, 세 가지의 미세망상과 여섯 가지의 거친 번뇌 나아가 팔만사천의 무량번뇌가 파생된다. 이처럼 무량한 번뇌를 내면에 끌어안고 살면서도, 우리는 언제나 문제의 원인과 해결책을 밖에서 찾는다. 너 때문에, 환경이 좋지 않아서…. 이래선 ‘소’ 찾기란 난망한 일이다. 물론 밖에도 많은 문제가 있고 그것들을 해결하기 위해서 애쓰는 일이 결코 헛된 일만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밖의 문제란 것도 따지고 보면 우리 내면의 투영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결국엔 우리 내면의 문제인 것이다. 그래서 고인은 말한다.
‘구구히 밖으로 찾아나서 발밑이 이미 진흙에 깊이 빠진 걸 알지 못하네.’
너무나 가슴에 와 닿는 말이라, 안으로 찾아 나서는데 또 다른 고인이 꾸짖는다.
‘본래 잃은 바 없는데 어찌 이리저리 쫓아다닐 필요가 있는가 / 깨달음을 등지므로 소원하게 되었고 / 먼지 티끌 마주하다보니 마침내 잃고 만 것 / 고향의 집과 산, 점차 멀어지니 갈림길 더욱 어려워라 / 얻었다 잃었다 하는 생각 더욱 불타오르고 / 시(是)와 비(非)의 대립, 더욱 날카롭게 맞서네.’
날은 저물고 갈 길 먼 나그네, 아아, 어쩌자고 나는 번번이 허공에 말뚝을 박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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