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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명을 밝혀 주는 부처님의 등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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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축서사 작성일08-05-21 17:32 조회3,48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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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명을 밝혀 주는 부처님의 등불

지안스님 (조계종립 은해사 승가대학원장)

 

  중국 당나라 때 배휴(裴休797~870)가 쓴 청량국사의 비명(碑銘)에 “태양도 한 밤의 어둠은 밝혀 주지 못하고 자애로운 어머니도 죽은 자식의 시신을 곁에 두지 못한다.”(大明不能破長夜之昏 慈母不能保身後之子)라는 말이 있다. 굳이 이 말을 덧붙여 설명 하자면 이 세상에는 인연이 맞아야 일이 제대로 되며 또 때를 맞추는 인연인 시절 인연이 있다는 뜻을 나타내는 말이라고 볼 수 있다.

봄에는 봄꽃이 피고 가을에는 가을꽃이 피어 시절에 따른 개화가 있듯이 세상일에도 시절 인연이 있다. 물론 인연이란 말 자체가 때와 장소, 다시 말해 시간과 공간이 교직(交織)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는 말이기 때문에 인연이 있으면 때와 장소가 따라오는 것이다. 다만 우리 중생의 현실에서 볼 때 이 인연이 시공을 통하여 나타나는데 있어 가깝고 먼 차이가 있을 뿐이다. 가까이 있는 인연이 있는가 하면 멀리 있는 인연이 있다는 말이다. 시절이라는 것이 삼세를 타고 물같이 흘러가는 것이기 때문에 언제나 가까워지고 멀어지는 것이 생긴다.

조사어록에 가끔 거성시요(去聖時遙)라는 말이 등장한다. ‘성인이 가신 때가 멀어졌다.’는 이 숙어는 말세에 태어난 중생이 부처님 당시로부터 시대적인 거리가 점점 멀어지고 있다는 것을 뜻하는 말이다. 때가 멀어져 부처님 법을 만나기가 어려워 교화 제도의 이익을 받지 못한다는 안타까움을 표현하는 말이다. 부처님 법을 듣기 어려운 8가지 경우를 말해 놓은 문법팔란(聞法八難) 가운데 불전불후나란(佛前佛後難)이 있는데 이 역시 부처님이 역사적 인물로 살아 계실 때 직접 법문을 들을 수 있는 큰 이익이 있지만 부처님이 계시지 않는 시절에는 법을 듣기 어려워 부처님과의 인연이 멀어진다는 것을 나타내는 말이다.

유행가 가사에 ‘세월 가면 잊어질까?’ 하는 말처럼 사람들은 인연이 멀어지면 망각을 한다. 그래서 옛말에 거자일소(去者日疎)라는 말이 생겼다. 떠나간 사람은 날로 내 기억에서 조금씩 사라져 간다는 말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일은 내가 남으로부터 완전히 잊혀져 버리는 일이라고 말한 사람도 있다. ‘잊지 말아 줘!’ 물망초의 전설처럼 사람의 가슴 속에는 또 하나의 향수, 누군가가 자기를 기억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다.

인류 역사 속에는 문화적 가치를 살리자는 뜻에서 잊지 말자는 뜻을 모아 기념일을 만들어 놓은 날들이 많다. 달력을 보면 일요일을 제외한 법정 공휴일이 있는가 하면, 무슨 무슨 기념일이라 표기된 날들이 많다. 모두가 이 날을 잊지 말고 기억해 두자고 표기해 둔 것이다.

인류의 스승 석가모니 부처님이 사바세계에 강림하신 날도 전 세계의 불교도들이 부처님을 잊지 말자고 기념하는 날이다. 부처님 오신 뜻을 되새기는 이날을 맞아 불자들의 새로운 각오와 다짐이 있어 부처님을 향한 마음이 밝은 등불처럼 훤히 비쳐졌으면 한다. 우리 불자들은 부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을 해가 뜬 것에 비유, 불일승천(佛日昇天)이라고 찬탄해 왔다. 해가 떠야 세상이 밝아지듯이 부처님이 오시면 중생의 세계가 밝아진다는 것이다. 실제 부처님은 횃불을 밝혀 어둠 속에서 아무것도 보지를 못하고 있는 중생들에게 이제 밝아졌으니 보고 싶은 사람은 와서 보라고 일러 주셨다는 것이 불교라 한다.

대승경전 『법화경』<방편품>에는 부처님이 세상에 출현한 것을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이라고 표현 하였다. 일대사 인연이란 글자 그대로 하나의 큰일을 하기 위한 인연이라는 말이다. 꼭 해야 될 중요한 일이 있어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이다. 부처님이 이 세상에 와서 꼭 해야 할 일이 무엇이었겠는가?

『법화경』에서는 이것을 중생들에게 여래의 지견을 열어주고(開), 보여주고(示), 깨닫게 해 주고(悟), 들어오게 해 주기(入) 위해서라고 설명하고 있다. 여래지견(如來知見)이란 부처님의 지혜에서 알고 보는 깨달은 자의 소식이다. 이를 진여(眞如)의 소식이라고 말하는 경우도 있다. 말하자면 진여 세계의 소식을 중생들에게 전해주고자 이 세상에 오셨다는 말이다.

 

고향을 떠나 오랜 세월을 객지에서 살고 있던 사람에게 어느 날 고향에서 온 사람이 고향 소식을 전해 준다면 그 소식을 듣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겠는가? 이런 이치에서 볼 때 부처님이 전해 주는 진여의 소식을 듣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은 없는 것이다. 다만 부처님을 만나는 인연이 멀고 가까운 차이가 있어 부처님이 오신 것은 모르거나 어디쯤 계신다는 말을 듣고도 거리가 멀다고 생각하고 부처님을 찾아가 만나 소식을 듣고 싶어 하는 마음을 유예시켜 버리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부처님이 우리에게 전해 주는 진여의 소식은 무엇일까? 그것은 잠을 자다 꿈을 꾸고 있는 사람에게 깨고 나면 꿈은 없다는 소식이다. 업식(業識)에 의해서 비록 꿈이 꾸이기는 하나 잠을 잤기 때문에 꿈이 꾸인 것이며, 깨어 있는 사람에게는 꿈이 꾸이지 않는다는 것, 따라서 꿈을 꿈으로 알라는 것이 부처님의 전언인 것이다. 이것은 출세간법의 대의로 제법실상의 궁극적인 이치를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놓은 것이다. 『열반경』에는 생사는 헛된 것이라는 말이 있다. 중생이 나고 죽는 생사를 부정하여 헛된 것이라 한 이 말씀 역시 출세간법의 대의다.

불교에서 수행하는 마음을 무위심(無爲心)에 두고 하라는 말을 자주 한다. 무위심이란 하염없는 마음 곧 어떤 의도된 생각을 앞세워 이해타산을 따지거나 목표한 바 대상에 집착하지 않는 마음을 말한다. 바꾸어 말하면 어떤 조건에 구속되지 않는 마음이다. 이 무위심이 될 때 올바른 수행이 이루어진다 한다. 부처님의 자비가 무위심에서 나온다. 동체대비의 정신이 자타를 초월한 무위심이라는 것이다. 서양에서 말하는 신의 사랑이라는 아가페 정신이 동체대비이므로 무위심은 바로 무연대비로 전환되는 것이다.

불교는 비(悲)의 윤리를 실천하는 종교다. 부처님의 대자대비를 세상에 펴서 평화의 공간을 확대해 나가는 것이 결국 불교의 힘이다.

봉축의 등을 밝히는 것은 지혜와 자비를 상징하는 행사로 빛을 놓아 어둠을 물리치는 것이다. 빛은 원래 퍼져나가는 힘을 가지고 생명의 성장과 존재의 성숙을 도와준다. 내 마음속에 있는 불성의 빛을 밝혀 내가 등불이 되면 부처님께 올리는 진정한 등공양이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성불의 인연이요, 세상에 남겨 놓은 은혜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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