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상, 선행 그리고 수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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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축서사 작성일08-08-09 18:01 조회3,809회 댓글0건본문
아상, 선행 그리고 수행
박규보_동아대학교 철학과 교수
김 형!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이곳 밀양에 온 지도 벌써 두 해를 지나고 있습니다. 예전처럼 곡차를 한 번씩 하던 때는 몰랐는데 막상 교통이 뜸하고 보니 우리가 제법 가까웠던 것 같은 생각이 드는군요. 김 형이 활동하고 있던 기독교 단체의 열린 사람들과의 만남도 자주 생각납니다. 그때는 사회비평적인 주제와 학술적인 대화들이 주를 이루었는데도 모두 진지하게 열정들을 나누었던 것 같습니다. ‘기성 종교의 사회적 역할’ ‘종교 간의 대화와 다원주의’ ‘성전의 현대적 이해 방식’ 등에 대해 나누었던 대화는 매우 유익했지요.
얼마 전에 지인에게서 “삶과 수행”에 대한 글을 부탁 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문득 김형과 이 문제에 대해 대화를 나눠볼까 해서 이렇게 편지를 쓰게 되었습니다. 사실 불교는 깨달음을 추구하는 종교이다 보니 수행에 대한 방법이나 이론이 당연히 발전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경우도 신(神)의 뜻에 순응해가는 일련의 과정들 또한 수행이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비록 추구하는 목적이 다르다고 하더라도 말입니다. 불교는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수행이라고 봅니다만, 기독교의 경우는 신(神)의 하위 개념으로서 수행이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불교의 경우 간과해서는 안 될 주의사항이 하나 있지요. 이타(利他)라고 하는 것입니다. 기원전후의 불교는 자신만의 깨달음을 위해 문 꽁꽁 걸어 잠그고 교학 연구와 명상에만 몰두하는 것이 대세인 불교였습니다. 이런 불교는 원래 부처님의 정신이 중생구제라는 대원칙에 반하는 것이라 규정하고, 본래 부처님 정신으로 돌아가자는 종교개혁운동이었는데 이것이 대승불교운동이었습니다. 어떠한 수행이라 하더라도 대승의 입장에 있다면 타인의 이익이 전제되어야만 하지요. 불교의 네 가지 큰 수행법이라 해서 참선 염불 간경 주력 등이 있습니다만, 타인의 이익을 배제하고 나만을 위한 행위로 수행하는 이가 있다면 그것은 본질은 잊고 방편(方便)에 도취하는 행위를 하는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본질은 잊지 않으면서 수행하는 첩경은 무엇일까요. 한마디로 하자면 선행(善行)을 통한 수행입니다. 불가에 칠불통계게(七佛通戒偈)가 있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 이전에 일곱 부처님께서 한결같이 말씀하신 노래라는 것인데, “모든 악을 짓지 말고 많은 선을 받들어 행하여 스스로 그 마음을 맑히는 그것이,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이다.”라는 내용입니다.
선한 행위를 했는데 나쁜 결과가 있거나 악한 행위를 했는데 좋은 결과가 나올 수는 없지요. 어떤 신념을 가졌느냐 보다는 어떤 행위를 하였느냐가 인격을 가늠하는 잣대라고 볼 수 있습니다. 모든 수행법의 앞머리에는 선행이라고 하는 기초가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불교다운 불교이지요.
예전에 제가 형에게 자주했던 농담 기억나는지 모르겠습니다.
“형은 기독교를 신앙하는 불자입니다. 형이 사회를 위해 행하는 선행이야말로 진실로 불제자의 길입니다. 불교는 무엇을 믿고 받드는가가 요점이 아니고 어떤 행위를 하는가가 요점입니다. 무슬림 크리스찬 짜라투스트라교도 힌두교도 누구라도 그 행위에 의해 다음 생이 결정지어질 뿐입니다. 따라서 종교적 신념이 다르다고 해서 배척하는 일이 있다면 그야말로 악행이지요. 형의 신앙적 관점으로도 형은 천국을 이미 분양받았고, 불교적 관점으로도 형은 많은 선행의 담보물이 가득하니 참 좋으시겠소!” 라던…….
그러면 선행은 어떤 마음으로 해야 할까요!
금강경에는 수행의 요체로 아상(我相)을 버려야 한다고 합니다. ‘나’ ‘내 것’ ‘내가 낸데’ 이런 나에 대한 집착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사회생활을 하고 가족을 형성하고 있는 일반인에겐 참 어려운 얘기지요. 좋은 음식, 예쁜 옷을 보면 부모자식이 생각나는데….
나에 대한 집착을 끊으려고 애쓰는 그 집착이 더 큰 번뇌를 만드는 법입니다. 그래서 저는 ‘나에 대한 집착’을 적극적으로 긍정해 버리라고 합니다. ‘내가 좋아서’ ‘내 마음의 평안을 위해’ ‘내가 복 받으려고’하는 그 마음을 긍정해 버리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긍정의 연속과 선행의 연속 가운데서 어느 순간 마음의 개혁 질적 전환이 일어난다고 봅니다.
형도 잘 아시다시피 갖가지 어려움 때문이거나 타인의 권유 때문이거나 교회나 절에 처음 나온 사람들, 주기도문도 모르고 반야심경도 모르던 그들이 어느새 집사도 되고 포교사가 되듯이 그 출발이 모두 다르더라도 어느 순간 질적 전환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땡감이 어느 순간 홍시가 되듯이 말입니다. 형에게만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저의 경우에는 “내 것”에 대한 천착을 적극적으로 긍정하는 방식으로 선행을 추구하려는 선행을 추구하려는 수행을 원합니다.
“6.2(월) 아침, 솔이 엄마가 읽고 있던 하이쿠시집에 의미 모를 도형 가득 그리다.
6.3(화) 저녁, 솔이 차키를 돼지 저금통에 넣다. 다음날 아침 30분 골탕.
6.5(목) 저녁, 싱크대 하단의 찬장, 쌀통, 세탁기 통에서 CD발견(솔이 짓인 듯! 아… 대화 안 되는 19개월)
6.7(토) 오전. 솔이 화단에 핀 나리꽃 두 송이 똑딱!(살생중죄 금일참회!)
6.8(일) 오후 2시. 대형마트 방송실에서 아이 상봉(말은 못해도 특기는 뛰는 듯 걷는 것)”
- 아빠가 쓰는 솔이 일기 중에서-
아이가 방울토마토를 좋아하는 것 같아 봄에 심어봤는데, 오늘 아침 텃밭에서 발갛게 미소 짓는 방울토마토를 보고는 마치 농부가 다 된 양 자연에 감사했지요. 그런데 오늘 하루를 정말 의미 있게 해 준 건 토마토도 자연도 아니었습니다. 방울토마토를 입에 넣고 방긋 웃는 아이의 모습에 세계가 다 있었지요.
저에게는 19개월 된 아이에 대한 애정을 적극적으로 외부 확장하는 것이 아이에 대한 애정을 부정해가는 방법보다 맞는 것 같더군요. 모든 부모가 자신의 아이에 대한 애정 반만큼이라도 타인을 위해, 세계를 위해 선행한다면 이 세계는 그대로가 형의 천국, 나의 정토가 아닐런지요. 아상을 버리는데 집착하기보다 아상을 긍정하고 적극적으로 확장시켜나가는 선행(善行)이 대단히 역설적이지만 제가 생각하는 수행입니다.
모처럼의 안부 편지에 사족이 너무 길었군요. 형이 생각하는 수행에 대해서도 답신 기다리겠습니다. 여름은 더워야지요! 배롱나무에 핀 붉은 꽃에 위안하며 형을 만날 가을을 기다립니다. -밀양 근방(近方)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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