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함 속에서 비범함을 배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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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축서사 작성일09-02-10 17:10 조회3,415회 댓글0건본문
평범함 속에서 비범함을 배우라
기후스님
봄 같은 겨울이라 하건만 그래도 문수산 축서사의 새벽 공기는 귓불을 얼얼하게 만든다. 장갑을 끼고 목도리를 두르고 문 밖으로 나서는 순간 언제나 초롱초롱한 빛으로 새벽인사를 나누던 무수한 별들 대신 하얀 눈발들이 그들을 대신하여 사륵사륵 옷깃에 떨어진다.
올 겨울엔 서너 차례 눈이 오긴 했지만 함박눈 대신 싸락눈이 조금 오다가 그치곤 해서 내심 불만이 적지 않지만 이것도 많은 눈이 쌓여 얼어붙으면 겨우내 냉기가 산골짝을 떠나지 않는 혹독한 강추위에 비하면 그저 배부른 푸념으로 해 보는 건조한 불평일 뿐이다.
발자국이 날 정도의 흰 눈을 뽀드득 거리는 소리를 들으면서 손전등의 불빛 따라 고개를 넘어 소나무 숲 모퉁이를 돌아 운수각 보현선원에 이르니 이미 방마다 불이 꺼진 채 전 대중이 벌써 법당으로 향했고, 깔딱 고개 찻길엔 누군가가 벌써 눈을 넓직하게 쓸어 놓았다. “이 이른 새벽에 그 어느 누구의 대빗자루 손길이 이 눈 위에 와 닿았을까?” 흰 눈을 닮았을 그의 하얀 속마음에 또 다른 흰 눈이 소복하게 쌓이고 있다.
이윽고 큰 종소리가 은은하고 장중하게 문수산을 울린다. 어서 빨리 대웅전 부처님 곁에 모이라는 비천상의 독촉의 노래이다. 채전밭 근처 식구들은 전등불을 환하게 켠 채로 어둠속을 헤집고 뚜벅뚜벅 올라오고 선열당과 안양원의 방문들도 삐그덕 소리를 내면서 출입하는 사람들로 분주하다. 삼성각의 큰스님은 뒤따르는 시자와 함께 사뿐사뿐 눈 위에 발자국을 만들면서 법당으로 향하고 적묵당의 문수선원 선객들도 마른기침 소리를 내면서 하나 둘 한 곳으로 모인다.
축서사 전 대중은 그렇듯이 눈 속에서 들려오는 범종 소리를 들으면서 법당에 함께 모여 부처님께 엎드려 절하면서 그분의 뜻을 기린다. 온 종일 뿔뿔이 흩어져서 각자의 공간에서 정성껏 자신의 책임을 다 하던 한솥밥의 식구들이 오롯하게 큰 법당에 모여서 하나 됨의 마음으로 부처님 앞에서 합장하고 머리 조아림은 이렇듯 말 대신 지심귀명례로 불보살님의 뜻을 찬탄하고 우리도 그분들의 서원을 닮아서 자타일시 성불도를 합송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그리곤 또 다시 각자의 정해진 처소로 되돌아간다.
상선원 적묵당엔 하루 15시간씩 참 자기를 만나려는 용맹정진의 몸부림이 ‘딱딱딱’ 죽비소리와 함께 선열락에 맛들이고, 대웅전에선 천일 관음기도를 드리는 목이 쉰 부전스님의 염불소리가 문 밖으로 새어 나온다. 보탑성전에선 언 듯한 목탁 소리가 정구업진언으로 바쁘게 시작되고 하선원에서도 입정을 알리는 죽비소리가 ‘딱딱딱’ 세 번 울릴 때, 난 조심조심 그 소리를 엿들으면서 운수각 앞마당을 지나 송림칠현을 만나고 북암으로 넘어간다. 뒤이어 두 군데의 후원에선 불이 훤하게 켜지고 물 흐르는 소리와 또닥또닥 칼질하는 손놀림이 바쁘다. 참마음을 길러내는 문수산 축서사는 이렇게 하루가 시작되며 또 이렇게 일년을 보낸다.
어제 또 다시 달력 거는 곳에 새 주인이 전입신고를 했다. 우선은 12장의 새 그림을 슬쩍슬쩍 넘겨보고 그 다음은 초파일과 구정이 무슨 요일인지 살피고 마지막엔 공휴일이 낀 연휴가 며칠이나 되는지를 더듬어 보는 것으로 새 달력과의 상견례를 끝낸다. 우리들 대부분은 새 달력을 그렇게 건성으로 넘기듯 새해를 맞이하고 보내길 몇 번이나 하였던가? 그나마 정초엔 그럴듯한 덕담도 몇 편 나누고 몇 가지의 소망도 가슴속에 새겨보지만 그것도 관습적인 통과의례에 지나지 않다보니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자연이 그것들도 흔적 없이 사라지고 만다.
올해라는 시간을 좀 더 보람되게 보낼 순 없을 것인가? 시간이란 무엇인가? 불교에선 물질과 마음이 만나는 경계라 했고, 철학적으론 과거로부터 현재, 미래에 무한이 연속되는 그 어떤 것이며, 존재를 증명하기 위한 필요조건의 하나이고 또 물체계를 성립시키는 기초 형식으로 되어 있다고 사전에선 표현하고 있다. 그런 말을 보고 듣고 쓰면서 표현하고 생각해 보아도 아리송한 것이 시간의 개념이지만 우린 그 시간이란 틀 속에서 살고 있는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시간이란 것을 어떻게 우리 삶에 유효적절하게 활용해서 올해는 초라한 나그네의 행색이 아닌 당당한 주인의 모습으로 자신의 삶을 멋지게 꾸려 갈 수 있을 것인가? 가만히 생각해보면 우리에게 각인된 시간의 참된 의미는 자각과 기억이 한 덩어리가 되어 남아 있는 그 어떤 내용의 삶의 편린들이다.
그렇다면 참 시간은 부정보다는 긍정, 절망보다는 희망, 그리고 고통보다는 즐거움으로 채색된 그 자리가 될 것이며 그 농도의 비중에 따라 자신의 삶의 추가 행 불행으로 결정되어질 것이다. 우린 그것의 쟁취를 위해 자신에게 주어진 조건 아래에서 끝없이 노력하고 연구하며 애쓰고 있는 것이다. 그 자리의 원천은 만법의 근원인 일심이며 그것의 동력은 정성이다. 그 일념된 정성 속에서라야 참 시간을 만날 수가 있기에 어느 종교, 어떤 사상도 생각을 한곳에 모으는 기도를 근간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올해의 시간을 한층 더 보람 있게 맞이하기 위해선 지금 이 시각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온전하게 자신을 매몰시키는 것이다. 그것은 너무나 쉬우면서도 매우 가치 있고 슬기로운 삶의 방식이며 우리 모두가 일구어 나가야 할 창의적이고도 복된 삶의 텃밭이며 반드시 성취해야 할 참 생명성의 본원력이다. 그곳을 향함에 가장 큰 걸림돌은 잘못된 의식의 고착화이다.
그래서 지혜로운 우리 불자들은 평범함 속에서 비범을 배우며 무명 속에서 밝음을 눈치 챌 수 있는 깊은 안목을 가져서 언제나 당당한 주인 된 모습으로 살 수 있도록 스스로의 삶의 틀을 리모델링 할 수 있어야 한다. 그 비법은 바로 자신에게 주어진 일과 위치에 대해서 성실하게 수행하고 일념으로 스스로의 자리를 잘 지켜나가는 것이다.
타인의 삶의 그늘이 그러한 정성으로 자신에게 전이 될 때 우리 각자는 또 다시 자신의 삶에 정성을 쏟는다. 이것이야말로 자리가 철저할 때 확실하게 이타로 연결 될 수 있는 불변의 법칙이며 진실이야말로 또 다른 진실을 끄집어내게 되어 있는 중생심의 오묘한 이치이다.
이러한 이치와 축적된 경험을 바탕으로 올해야말로 우리 모두가 자신의 일에 만족하며 충실해야겠다는 새로운 정신적인 자각이 있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이 어려운 사바세계의 험한 파고를 무난하게 넘을 수 있는 유일한 슬기의 사다리이며 주인 된 의식으로 행복한 삶을 건너가게 하는 멋진 징검다리가 될 것이다. 그래서 작은 것에도 만족하고 고마워할 줄 알며 조금 불편하더라도 지금 살아 있음에 감사하면서 감내할 줄 알았으면 좋겠다. 그래서 올 한 해가 당당하게 주인 된 의식으로 살았다는 기억으로 남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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