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마음이 달처럼 밝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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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축서사 작성일09-02-10 17:08 조회3,079회 댓글0건본문
“우리의 마음이 달처럼 밝아야 합니다”
‘아승지阿僧祇’라는 말은 시간을 말하는 것입니다. 불교는 원래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경전 곳곳에 아승지라는 말이 많이 나옵니다. 아승지는 한량없는 시간입니다. 대방광불화엄경 아승지품에서 말하는 가장 높은 숫자는 불가설불가설 불찰극미진수不可說不可說 佛刹極微塵數, 즉 말할 수 없고 말할 수 없는 무한의 숫자를 이르는 것입니다.
그 숫자는 백천의 백천을 1구리라 하고, 구리의 구리를 1불변이라 하며, 불변의 불변을 1나유타라 하고 나유타의 나유타를 1비파라라 하는데, 이렇게 차례로 나아가서 75번째를 불가칭량이라 하고 115번째를 불가사의라 하며 120번째를 불가설전, 121번째를 불가설전전이라 합니다. 이것은 오직 부처님의 지혜로서만 헤아릴 수 있는 무량수입니다.
부처님께서는 그렇게 언설로서 표현할 수 없는 작은 티끌이 있고, 그 티끌 속마다 수없이 많은 불가설의 중생이 있고 하나하나의 털구멍 속에 가지가지로 모양이 다른 무수한 부처님의 나라가 있다고 하셨습니다.
금강경에 보면 부처님께서 갠지스 강 모래를 예로 듭니다. 항하사수라고 하는데 갠지즈강의 그 많은 모래알을 누가 다 헤아리겠습니까? 항하수 모래알만큼 많은 항하사가 있고, 그 모래알만큼 많은 항하사가 또 있으며, 그만큼의 항하사가 또 있고, 그러한 세계가 첩첩으로 싸여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한 티끌을 부수어서 항하수 모래알 같이 많은 세계를 만들 수 있다 했습니다. 그 세계는 모든 것을 다 갖추고 있는 세상입니다. 일미진중함시방一微塵中含十方이라, 한 티끌 가운데 모든 세계가 다 포함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다시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우리의 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티끌이란 다른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의 번뇌 망상의 티끌입니다. 그것을 초월해 버리면 일체 숫자와 경계에 끄달리지 않고 한 눈에 척 알아보게 돼 있단 말입니다.
영이라는 숫자가 숫자 아닌 것 같지만, 그것은 무한대의 숫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불교의 공사상과 수학이 같이 연계가 되는 겁니다. 즉 공의 세계는 반야의 세계요, 반야의 세계는 지혜로 밝은 본래 성품의 세계입니다. 그 세계에 가서 보면 숫자 관념이 없어지지만, 또 모든 숫자를 다 알 수 있게끔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부처님은 지혜의 눈으로 숫자를 다 알 수 있지만, 우리는 아직까지 중생 틀이 벗겨지지 않아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석가모니께서 붓다가야 보리수에서 깨달음을 얻고서 일체중생의 마음은 본래 더러운 것도 없고 어리석은 것도 없고 모두가 다 밝은 마음, 깨끗한 마음, 본래의 그 마음, 불성을 가지고 있음을 아셨습니다. 그러나 우연히 눈으로 색깔의 때가 묻고, 귀로는 소리의 때가 묻고, 코로는 냄새의 때가, 혀로는 맛의 때가, 피부로는 촉감의 때가 묻어서 본래의 맑은 성품이 오염되고, 그러한 연유로 지혜로운 마음이 드러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잘못된 과보를 받게 되어 고생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그 근본자성에서는 모두 부처님입니다. 그런데 뒤바꾸어 생각해보면 즉, 중생의 입장에서 중생을 생각할 때 중생의 고통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부처의 입장에서 중생을 보면 모든 중생은 다 부처입니다. 그러나 중생의 입장에서 중생을 보면 고통과 번뇌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여러 가지 중생의 업에 따라 천백억 모습으로 나투십니다. 중생은 생김새도 다르고 살아가는 모든 것이 전부 각각입니다. 중생이 수백만 수천만 수억이 있더라도 업이 다 다르기 때문에 전부 다른 것입니다. 중생들의 공통점을 찾아서 그들로 하여금 같이 친구가 되어서 수행하게 하고, 그 수행으로 인해서 물든 마음, 더렵혀진 마음을 깨끗하게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마음에 밝은 지혜의 불성이 확 드러나게 되어 세상이 훤하게 보이고, 죄 지을 것도 없고 남하고 시비하고 다툴 것도 없고, 안 될 것도 없이 형통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불교가 참 좋지요.
부처님이 그렇게 훌륭하셔서 티끌 숫자만큼 우리가 공양하고 절을 하고 예배해도 부처님의 그 원력을 따라갈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원래 어리석은 사람이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방이 더럽다고 그대로 두면 그 방은 못쓰게 됩니다. 못쓰게 될 방이라도 청소하고 먼지 털고 닦아내면 깨끗해집니다. 열 번 닦으면 닦는 것만큼 깨끗해지고 백 번 닦으면 닦는 것만큼 깨끗해지면 뭐든지 할 수 있지 않습니까. 우리 마음도 그와 같습니다.
부처님의 원력을 빌어서 자꾸 닦으면 됩니다. 그래서 말할 수 없는 빛깔마다 나타나는 광명을 말할 수 없고, 광명 속에 있는 달도 말할 수 없고, 달 속에 있는 달도 말할 수 없으니, 이 세상이 곧 광명천지입니다. 우리 마음의 달이 밝아야 한단 말입니다.
팔만대장경 속에서 대방광불화엄경이 가장 방대한 경전인데, 팔만대장경의 모든 내용이 어디로 돌아가느냐 하면 마음으로 돌아갑니다. 만법귀일심萬法歸一心이라.
부처님께서 심왕보살에게 말한 그 숫자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찾아야 하느냐. 본래 성품, 본성, 자성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 가장 중요한 내용입니다. 들어도 들어도 이 말인지 저 말인지 통 모르겠지만, 모르는 속에 알아지는 것이 있습니다. 비록 거울이 아는 것이 없다 해도 맑게 비춰주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 정수기에 물이 걸러지듯이 마음이 맑아지는 것입니다.
말법 시대에 부처님 말씀을 잘 지키기란 참으로 희유하다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야말로 부처님의 생명을 이어나가는 사람들이고 불성의 종자를 심는 사람들입니다. 종자가 없으면 생명이 이어질 수 없습니다. 그런 간절한 마음으로 공부하고 기도하십시오. 그래서 업장소멸과 바른 깨달음의 길로 걸어가십시오.
법산스님 법문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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