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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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축서사 작성일08-11-03 14:23 조회3,435회 댓글0건본문
눈 뜬 이의 가르침 통해 온전한 코끼리를 찾아야
부처님 비유 설법 가운데 눈 먼 장님이 코끼리를 만지면서 코끼리를 얘기한 대목이 나옵니다. 그런데 눈 먼 장님이 부위별로 말을 해도 눈 뜬 사람은 그것이 코끼리라는 것을 안다는 겁니다.
제가 요즘 불자들에게 전해드리고 싶은 것은 우리는 눈 뜬 선지식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렇다고 해서 막무가내로 눈 먼 장님처럼 아집과 편견에 의해 치우치고 얽매여 하나 더하기 하나를 둘이라고 고집하는 입장이 되어서도 안 되겠습니다. 코 만진 사람은 코 이야기 하고, 눈 만진 사람은 눈 이야기를 하더라도, 우리는 그것을 취합할 수 있는 지혜를 증장해 나가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기 위해서는 불보살님의 가르침이나 선지식의 가르침을 믿고 의지하고 따르면서 실천할 때 지혜의 덕목이 불어날 거란 겁니다. 그렇다면 저나 여기 오늘 모인 대중들은 눈은 뜨지 못했더라도 눈 뜬 이야기의 가르침을 통해 그것을 취합해서 하나로 이어갈 수 있는 노력은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입장에서 ‘나는 누구인가?’ 해보자는 겁니다.
부처님이 자비심을 가지고 살라 하셨습니다
KBS 다큐멘터리 ‘순례자의 길’ 보셨어요? 한겨울에 식구들 먹을 거 준비해 놓고 다섯 명의 길손이 2,100Km라는 거리를 떠났던 거 아시죠? 세 명은 일배삼보 일배삼보하고, 두 노인은 7개월간 필요한 물품이 실린 리어카를 끌면서 고생했습니다. 폐병 때문에 힘들어하면서도 ‘다른 순례자들한테 누가 된다면 돌아가야겠지만, 이만큼 왔으니까 버텨볼 때까지 노력을 해 볼 것’이라 했던 66세의 노인은 마지막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이런 말을 합니다. “나는 이미 소원을 이뤘습니다.” “뭘 이루셨습니까?” “부처님이 자비심을 가지고 살라고 하셨습니다.” 얼마나 기가 막힙니까? 그런 분들이 2,100Km를 도착해서 55일 동안 다시 10만 배를 하고 돌아갔답니다. 저는 그걸 보면서 그렇게 가슴 떨리고 간절하게 느껴질 수가 없었습니다.
여러분, 살다보면 끔찍한 경험이나, 음식에 대한 나쁜 기억, 가슴앓이처럼 현상에서 벌어지는 일도 오래 가는데, 하물며 정신적인 마음의 상처와 충격은 어떻게 금생에서 제대로 감당이 되겠습니까? 그러면 어떻게 해야되느냐? 바로 관심과 배려가 필요합니다. 2,100Km를 리어카를 끌고 오면서 ‘자비한 마음으로 살라’는 것을 이미 성취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자비한 마음으로 살기 위한 네 가지 이치
그런 이치를 이루기 위해서는 첫째, 선지식을 가까이 하십시오. 세 사람이 걸어가는데, 좋은 사람은 귀감을 삼고 모진 사람은 경계를 삼으면 두 사람 다 스승이랍니다. 그런 입장에서 내 남편, 내 아내, 내 부모, 내 자식이 선지식으로 나에게 다가올 수만 있다면 그 사람은 복된 인생, 행복한 인생 아닐까요.
두 번째는 한마음으로 바른 법을 들어라. 열반경에 보면 “세상에는 두 유형의 사람이 있다. 한 사람은 믿는 사람, 한 사람은 믿지 않는 사람. 믿는 사람은 착하고 믿지 않는 사람은 착하지 아니하니라./ 믿는 사람도 두 유형이 있습니다. 절에 가는 사람, 안 가는 사람./ 절에 가는 사람도 두 유형이 있다. 예배하는 사람과 예배하지 않는 사람./ 예배하는 사람도 두 유형이 있다. 법을 듣는 사람과 법을 듣지 않는 사람./ 법을 듣는 사람도 두 유형이 있다. 지극한 마음으로 듣는 이와 건성으로 듣는 이./ 지극한 마음으로 듣는 이도 두 유형이 있다. 생각한 대로 행동하는 사람과 생각하지 않는 사람, 생각한대로 행동하지 않는 사람./ 생각한대로 행동하는 사람도 두 유형이 있다. 자기만을 생각하고 행동하는 사람, 하나는 어렵고 힘든 이들,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이들을 생각하는 이를 이름 해서 세상에서 가장 높고 수승한 이라 하느니라.” 그렇다면 나는 누구입니까?
세 번째는 항상 여여한 마음으로, 한결같은 마음으로 법을 생각하라.
네 번째는 여실한 이 법을 닦아 행하라. 신해행증(信解行證)이라는 말 있죠? 믿고, 이해하고 행동으로 나아가면 반드시 얻어진다. 그런 말입니다. 신지행득(信知行得)이라는 말도 있고 신해행증(信解行證)이란 말도 있습니다.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 말라
살다보면 죽는 날이 옵니다. 그런데 가는 그날이 바로 오늘이라는 거예요. 내일 죽는 이는 없습니다. 그것을 우리는 빨리 알아채야 합니다. 그런데 비극은 인생이 짧다는 것이 아니라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너무 늦게 깨달았다는 겁니다. 숨이 깔딱깔딱하는 그때 이러쿵저러쿵하는 생각에 통한의 눈물을 흘려봤자 때는 늦은 겁니다.
불교에 ‘입각지(立脚地)’라는 말이 있습니다.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 말라. 만약 너희들이 네가 서 있는 자리에서 미리 자기가 할 일을 분명히 해 두지 않으면 훗날 통한과 회한의 눈물을 흘리는 날이 온다는 것입니다. 인생은 너무 빠릅니다. 이렇게 짧은 인생, 그 시간 속에 우리는 수없이 많은 이들을 만나고, 부딪히고, 피하면서, 받아들이면서 열두 고개 고갯길을 넘듯이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런데 절대 혼자 존재할 수는 없습니다. 많은 이들의 자양분 속에서 성장하고 성숙해서 그래서 여기까지 와있다는 것을 스스로 들여다 볼 수 있는 자신이 되었으면 합니다.
어떻게 살고 있느냐가 바로 ‘나 자신’
‘나는 누구인가?’ 라고 물었지만 저 역시도 내가 누구인지 모릅니다.
하지만, 보리심을 지니고 있는 자가 머무르는 모든 곳은 편안하고 녹녹하고 따뜻한 곳(念念菩提心 處處安樂國)이지만 탐진치 삼독을 지니고 있는 한 극락 입구까지도 삼악도(念念三毒心 處處三惡道)라는 말이 있습니다. 삼악도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삼독심을 지니고 있는 한 고통과 괴로움이 수반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오롯이 나를 간직할 수 있다면 따로이 ‘나는 누구인가?’를 알 필요가 없지 않겠습니까?
무상지상(無相之相)이 실상(實相)인 것을, 모양 없는 모양이 실다운 것을, 색(色)이라는 것은 있는 현상이고 공(空)이라는 것은 있는 그대로인데, 현상과 있는 그대로가 무엇이 다른 것이겠습니까?
지금 현재로서는 ‘나’라는 것을 진정으로 알 수 없지만, 그래도 내 모습을 잃어버리지 않는 삶, 모두가 이해해주고 납득될 수 있으며, 더불어 함께 할 수 있는 그런 삶이라면 참 행복을 거기서 가질 수 있는 게 아닐까요? 내게 주어진 자리에서 내 모습 잃지 않고 열심히 살아가는 그 모습이 진정한 행복을 노래하는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 정우스님의 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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