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감이란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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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축서사 작성일08-11-03 13:35 조회2,974회 댓글0건본문
강미화_영주
가슴이 답답하다.‘두근두근’“왜 이럴까?”
나는 사람들 앞에 서는 것을 몹시 두려워하는 성격이다. 학교 다닐 때 다른 사람 앞에 서는 일처럼 두려운 일은 없었다. 순서에 따라 지목이 되는 순간 가슴은 멈춰버리는 듯 어떻게 그 순간을 모면할 수가 없었다. 언제나 소심하여 나서지 못하는 조용한 학생시절을 보내고 꽃다운 23살의 나이에 지금의 남편을 만나 덥석 결혼이란 것을 하고 말았다.
결혼생활은 꿈꾸던 동화속 나라도, 희망을 추구하는 이상향도 결코 아니었다. 시부모님과 시동생, 시누이 우리 내외를 반쪽씩 닮은 아들 둘. 가족 구성원 모두가 개성이 제각기 강한 분들이라 어디에다 기준을 맞추어야 하는지를 종잡을 수가 없었다. 소심한 나는 점점 더 자신감을 잃어 삶에 대한 의욕을 느낄 수가 없었다.
이렇게 살다보니 20여년이란 세월이 언제 흘러갔는지…. 어느 날 내면의 소리를 들었다.
“더 이상 이렇게 살지 말자, 언제까지 고개 숙인 채로 살아갈 것이냐”며 자신을 찾으라는 소리를 들었다. 고민해 보았다. 습관처럼 익숙해진 생활들을 벗어나 새로운 도전을 한다는 것은 커다란 용기를 필요로 했다.“그래, 한번 시도해 보는 거야.” 두손을 불끈 쥐고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찾았다. 우선은 ‘서도회’에 가입을 하였다. 붓을 잡고 쓰기를 10여년 해서, 행서, 초서를 습작하고 도전과 국선 등을 거치면서 성취감을 느끼며 나름대로의 자신을 만들어 가게 되었다.
결혼과 함께 학업을 계속할 수 없어 못내 아쉬움을 가지고 있던 차에 통신대학 국어국문학과에 다니게 되었다. 도서관과 서도회를 오가며 즐거운 마음으로 최선을 다한 결과 졸업장과 서예 작가증을 가슴에 안게 되었다. 서서히 자신에 대한 믿음이 싹트고, ‘하면 된다’는 확신으로 생활하던 어느 해 시어머님이 돌아가시게 되었다. 자신의 삶이 아닌 자식을 위해 평생을 부처님전에 기도 정진하시며 사셨는데, 죽어서도 축서사와 가까이에 묻히고 싶으시다는 어머니의 소원을 무여 큰스님께서 흔쾌히 허락하시어 지금의 축서사에 고이 잠들어 계신다.
이렇게 어머니께서는 돌아가시면서까지 부처님의 가르침을 함께 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며느리인 나에게 인생에서의 전환점이라 할 수 있는 축서사와 무여큰스님과의 인연을 연결해 주신 것이다. 그러한 인연으로 초하루법회와 큰스님의 법문을 듣기 위해 한 달에 두 번씩은 축서사를 방문하게 되었고, 마음을 가다듬어 부처님께 가까이 가려고 무던히 노력하게 되었다. 기도를 통해 소심한 자신을 조금씩 변화시켜 보려고 하였고, 함께하는 도반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릴 수 있는 기회가 많아졌다. 마음의 편안함, 안락함이랄까. 그러한 마음으로 신행생활을 하던중 그동안 구심점을 찾지 못하고 뿔뿔히 흩어져 제각기 하던 신행활동을 하나로 모아보자는 움직임을 접하게 되었다. 축서사 인근지역인 영주신도회의 활성화를 도모하시는 큰스님의 의중을 헤아려 함께 힘을 모아보자는 강한 움직임으로 신도회가 결성이 되었고, 내가 신도회의 총무를 맡게 되었다.
“ 그래 해보는 거야! 작은 힘이나마 신도회를 위해 보태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수행자의 한사람으로서 이제는 자신감을 가져보자.” 는 확신에 찬 믿음으로 회원들과 함께하려 한다.
신도회가 결성된지 10개월이라는 시간이 흐르면서 부처님오신날 영주대표로 부처님전에 발원문을 낭독하는 영광을 안기도 했다. 지금은 회원들과 함께 한 달에 한 번 축서사에서 봉사하는 즐거운 마음으로 신행활동을 하고 있다.
이제는 더 이상 소심한 인간이 아닌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며 수행하는 한사람으로서 당당히 자신감을 가지고 열심히 정진하는 자신을 발견하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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