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 아래 깃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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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축서사 작성일09-08-22 16:28 조회3,490회 댓글0건본문
돌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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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아래 깃들다
이미현_출판인
살아가면서 잊혀지지 않는 풍경들이 있다. 특히 어린 날의 추억이 담긴 곳이거나 삶의 큰 변곡점이었던 지점들은 날이 갈수록 또렷해져 언제까지나 시간을 초월한 공간으로 남기도 한다.
▶▶ 아버지, 당신의 나무에 기대어
아주 어린 나이 때 선친은 맏딸인 나를 데리고 시골 할아버지 댁에 자주 가시곤 했다. 버스 종점에 내려서 논밭 사이로 이십 리 이상을 걸어야 했으니 지금 생각해도 꼬맹이의 새다리 걸음으론 꽤 힘에 부치는 일이었다. 걷다가 힘들면 아버지 등에 업히기도 하면서 시골길을 타박타박 가다보면 이제나저제나 나타날까 기다려지는 곳, 바로 무수골 모퉁이에 당당히 버티고 있는 정자나무다.
아버지는 당신이 딸의 나이였을 때부터 소 몰고 꼴 베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이 나무 아래에서 쉬어가곤 했다고 하셨다. 소를 나무에 메어놓고 친구들과 놀다가 깜빡 단잠에 빠지는 바람에 할머니로부터 종아리를 맞기도 했고, 중학교에 보내주지 않는 할아버지에 대한 원망으로 집을 나와서는 이 나무 아래에서 섧게도 울었다는 아버지.
나무는 이후 소년이 도회지로 나가서 장가를 가고 아이들의 아버지가 되어 고향에 다니러 오는 모습을 말없이 지켜봤고, 이제는 그의 어린 딸에게도 고마운 쉼터가 되었다.
쉘 실버스타인의 책 <아낌없이 주는 나무>에서 나무는 소년이 자신의 열매와 가지와 몸을 다 가져간 다음 노인이 되어 돌아왔을 때 쇠약한 몸을 쉴 수 있는 나무둥치가 되어줌으로써 마지막까지 아낌없는 사랑을 주었다. 어떤 댓가도 바라지 않고 자신의 모든 것을 내줄 수 있는 나무의 헌신은 어머니의 모성과 닮아 있고 그래서 영원한 마음의 고향이기도 하다.
돌이켜보면 평생 산과 나무를 그토록 사랑한 아버지의 심성은 바로 고향의 나무들로부터 받은 깊은 위안에서 기인한 것이리라.
초등학생이 되면서 아버지는 방학 때면 나를 시골집에 며칠씩 맡겨두 셨다.
어느 해 여름, 먹구름이 하늘을 새카맣게 덮더니 장대같은 소나기가 며칠을 퍼부었다. 비바람이 몰아치기 시작하자 집앞 개울가에 늘어선 느티나무들이 기다렸다는듯 가지를 흔들어대기 시작했고, 집 뒤켠 재실 담장을 에워싼 대나무들은 온몸을 떨며 기묘한 소리를 냈다.
어둠 속에서 쉼없이 몰아치는 나무들의 울음소리는 그렇찮아도 때이른 불면에 힘들어하던 어린 나를 끝모르는 심연으로 끌고가 숨을 쉴 수 없을 정도였다. 딱히 두려움만도 아닌, 세상에 대한 슬픔과 허망함이 겹쳐진 묘한 감정을 지금도 표현할 길은 없다. 한껏 여름 홑이불을 끌어당겨 귀와 눈을 막고 있다가 기어이 눈물을 흘리면 우리 울보공주님은 비가 와도 울고 눈이 와도 울고~ 하며 웃으시던 할머니. 이 날 까닭없는 서러움은 무상(無常)의 시작이었을까...
해가 뜨고 지고 바람이 불고 비가 오고 눈 내리는 시간들이 속절없이 흘렀다.
한번씩 시골에 갈 때면 지금도 마을 어귀에서 만나는 정자나무. 그 넉넉한 둥치를 가슴 가득 안으면 어느새 따스한 아버지의 체온이 전해져 온다.
▶▶ 너와 나 모두 생명의 나무
인류의 생명이 나무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신화나 설화가 많다. 어느 민족은 버들잎이 인간을 만들었다고 하고, 차로 유명한 중국 운남성에선 찻잎의 홀잎이 남자로, 겹잎이 여자로 변해 인류가 시작되었다는 설화가 있다. 설화 뿐 아니라 무속신앙에서도 나무는 장수와 영험의 상징으로써 마을 주민들의 소박한 기도의 대상이 되어 왔다. 성서에도 하나님이 에덴 동산에서 생명의 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만들었다고 한 걸 보면 서구인들 역시 나무를 통해 생명이 시작됨을 믿었던 것 같다.
나무(木)를 나란히 세워놓으면 숲(林)이 된다. 삼(森)은 나무가 한없이 늘어서 있는 모습이다. 세상의 모든 생명현상을 뜻하는 삼라만상(森羅萬象)도 여기서 유래했으니 나무가 늘어선 모습을 세상의 모습과 같다고 본 것이다.
생물학자들은 나무가 여러 생물체 가운데서도 매우 순수하고 수준 높은 영적 생명체라고 한다. 사람이 숲으로 들어오면 나무들이 알파파를 방출함으로써 영적 성숙을 꾀하는데, 이 땅의 좋은 수행처들이 다 산속에 자리하고 있는 까닭도 이 때문이리라. 인자는 요산(樂山)이라는 말이 있지만 어찌보면 산이 인자를 만드는 게 아닌가 싶다. 해마다 잎을 갈며 성장하지만 다른 생명의 몫을 빼앗지는 않는 나무는 우리가 지향할 바를 몸으로 보여준다.
▶▶ 나무에게서 나무에로
나무는 자신만의 결과 무늬를 갖는다. 사람에게도 결이 있다. 잘라진 나무의 단면에서 나무가 살아온 삶의 흔적을 보듯 사람도 타고난 결을 잘 다듬으면 그 단면이 아름답게 된다.
어떤 것이 결대로 사는 삶일까. 불자라면 본래 지니고 있는 불성을 최대한 갈고 닦아 나의 생명과 너의 생명이 하나같이 평화롭게 살아가는 삶을 의미하는 것이겠다. 그렇다. 몸은 깨달음의 나무이다. 잘만 하면 희(喜)의 나무가 되나 함부로 다루면 고(苦)의 나무가 되리니 신수스님의 게송에 있듯 늘 부지런히 닦아내면 티끌이 묻지 않으리라.
부처님께서도 평생 나무에서 나무에로 머무셨다. 룸비니 숲속 무우수 아래에서 태어나셔서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으시고 쿠시나가라의 숲속 사라쌍수에서 열반에 드신 부처님처럼, 이 시대에도 나무와 숲은 최적의 아란야이며 현대인들이 지향하는 로하스적인 삶(느리게 살기)을 실천할 수 있는 공간이다.
최근 관심이 늘고 있는 나무장례(수목장) 역시 나무(자연)에서 났으니 나무에로 돌아가고 싶다는 소박한 바람에서 비롯한다. 어떤 겉치레도 필요치 않는 수목장은 겸손하고 자연스러우며 마음의 본래 자리로 돌아가고자 하는 본지환처의 마음과도 닿아 있다.
언젠가 부모님을 부처님 법음이 사시사철 들리는 도량의 나무 아래로 모시고 싶다는 생각을 얼마 전부터 하고 있다. 생전 효를 다하지 못한 자식의 마음이다. 두 분 영가가 수행자들의 맑은 기운이 서려 있는 산사의 나무 아래 깃든다면 이보다 좋을 수는 없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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